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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저쪽에 차를 대어 놨거든요!”

 

나를 끌고 가다 갑자기 멈춰선 그녀는 골목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금방 올게요!’ 라고 외치며 종종걸음으로 골목 안쪽을 향해 뛰어갔다.

 

진정하자. 일단 머릿속을 차분히!’

 

툭툭-

 

허억?”

 

머리를 감싸 쥐며 마음을 다잡으려는 순간 누군가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렸고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나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받아라.”

 

깜짝 놀라 당황해하는 나에게 다짜고짜 무언가를 내밀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함께 있었던 그 여자애였다. 그사이 집에 다녀왔는지 옷이 바뀌어있는 그녀의 얼굴은 지금까지 본적이 없는 복잡 미묘한, 굳이 따지자면 너는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몰라?’ 라는 느낌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언제부터?”

내가 이곳에 도착한건 네가 저 여자와 손을 잡고 걷고 있는 부분부터라고 하면 될까? 물론, 네가 집에서 나올 때부터 우리 동료들이 계속 너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어째 다분히 오해적인 부분부터 목격해버렸다. 그건 그렇고 역시 감시당하고 있었던 것 인가.

 

시간이 없다. 일단 받아라.”

이건 뭐죠?”

네가 하는 말을 우리가 들을 수 있게 하는 장치다. 네 녀석이 저 여자에게 무슨 말을 할지 우리가 모르고 있을 수는 없지.”

 

좋게 말해서 그렇고 도청장치고, 나쁘게 말한다면 목줄인건가. 나는 그녀에게서 무전기 같이 생긴 작은 디바이스를 건네받아 주머니 속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말을 할 때는 고민을 하고.”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쳐 보이며 경고를 한 그녀는 나를 한번 째려보더니 몸을 휙 돌려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가버렸다.

머리를 식히기는커녕 더 복잡해져 버렸잖아......’

 

빠앙!

 

당겨오는 뒷목을 주무르고 있는 내 앞으로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가볍게 클랙슨을 울렸다. 자동차에 관심이 없는 내가 보기에도 고급스럽고 세련된 중형 세단이었다.

 

저에요! 타세요!”

 

짙게 선팅 된 창문이 내려지자 운전석에 앉은 아라세카이 히토미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앞좌석에 타야하나 뒷좌석에 타야하나하고 고민했지만 만약 뒷좌석에 앉을 경우, 대화를 할 때마다 백미러로 얼굴을 마주치는 타입이라고 생각되는 그녀의 성격을 고려하여 오히려 부담이 적을 것 같은 앞좌석을 선택했다.

 

“......”

 

내가 앞문을 열고 자리에 앉자 그녀가 살짝 긴장해 하는 것이 느껴졌다. 당황한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었다.

 

, 역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옆자리에 앉는 것은 조금 그렇지요?”

, 아니에요! 사실 이 차를 사고 나서 누군가를 태우는 것은 처음이라 서요. 동료들에게 권유해도 항상 거절을 하니까....... 괜찮아요. 앉으셔도 되요!”

 

활짝 웃으며 이야기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긴, 아는 사이라도 전 공안청장, 현 국회의원의 딸이 운전하는 차를 얻어 타는 것은 부담스럽겠지.

 

부우웅-

내가 안전벨트를 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부드럽게 차를 출발 시켰다. 작은 키 때문에 좌석을 바짝 앞으로 당겨 앉은 그녀는 의외로 능숙하게 운전을 했다. 조금 여유가 생겨 둘러본 차안은 외형과 마찬가지로 고급스러운 디자인이었고 출고 된지 얼마 안 되었는지 약하게 새 차 냄새가 남아있었다.

차까지 태워 주시고,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가자고 한 거니까 당연한걸요. 귀중한 시간 내주셔서 고마워요.”

 

주머니에서 떨어지는 먼지만큼 무가치하게 시간을 때우고 있던 사람이 듣기엔 좀 황송하네. 이런 미인에게 점심식사를 대접받는 것도 모자라 드라이브까지 받다니 오히려 내가 엎드려 절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조금 거리가 있으니까 편하게 있으세요.”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은 어느새 처음 보는 건물들로 바뀌어 있었다. 복잡한 길을 망설임 없이 운전하고 있는 그녀는 반도에 온지 얼마 안 되었을 것이 분명했지만, 20년이 넘도록 이곳에 살았던 나보다도 경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유복한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을 아가씨가 일본인이라면 누구든지 기피하는 지저분한 반도까지 와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이런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

 

살짝 고개를 돌리자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운전에 열중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많게 쳐줘야 대학생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그녀가 아이들이 울다가도 이야기만 들으면 뚝 그친다는 공안경찰이라니.

 

무언가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

 

이런, 너무 대놓고 바라봤나! 하지만 좋지 못한 도로사정 때문에 덜컹거리는 차의 진동에 맞춰 위아래로 리얼하게 흔들리고 있는 그녀의 가슴은 남자라면 누구든 시선을 뺏기지 않을 수가 없지!

 

,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미안해요. 빨리 가는 길을 생각해내려다 보니 그만 신경써드리지 못했네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 이제 다 왔어요!”

 

그녀의 말과 함께 차의 속도가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와 본적이 없는 동네였지만 나는 단번에 이곳이 어느 곳인지 알 수 있었다. 여느 경성 시내와는 달리 깔끔하고 쾌적한 길거리, 도로를 따라 쭉 늘어선 세련된 고층 빌딩, 하나같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게들과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들. 거주하고 있는 인구 중 상당수가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인들로 이루어진 일명 혼마찌, 명동이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일본인들 이외에도 자치정부나 재계의 주요 인사들이 대거 살고 있는 이곳은 경성 최대의 번화가였다.

 

레스토랑?”

 

차가 멈춘 곳은 주차장까지 완비되어 있는 고풍스런 유럽 양식의 2층짜리 건물이었다. 간판은 읽을 수 없는 필기체로 쓰여 있었지만 한눈에 레스토랑임을 알 수 있는 분위기의 가게였다. 적당한 위치에 주차를 한 뒤 차에서 내리자 눈에 들어오는 주차장에는 평소에 보기 힘든 고급 외제차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런 곳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나는 너무 순순히 따라왔음에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예약하신 분의 성함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드라마에서나 보던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외양과 마찬가지로 충실하게 유럽풍의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는 가게 안은 점심시간이 약간 지나서인지 드문드문 빈자리가 보였다.

 

예약을 해놓지는 않았습니다만.”

죄송하지만 그렇다면 본 점을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히토미의 대답을 들은 남자가 나를 한번 훑어보더니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의 말투에는 무언가 불친절한 느낌이 다분하게 묻어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럴 것이 청바지에 셔츠, 운동화 차림의 나는 정장을 빼어 입고 앉아있는 다른 손님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가요. 아쉽네요. 죄송해요 토우마씨. 제가 좀 더 알아보고 올 걸 그랬네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다른 가게를 찾아보도록 하죠!”

 

그녀의 얼굴엔 아쉬움과 미안함이 역력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보고 있으니 오늘 이런 가게에, 이런 미인과 함께 올 줄 알았다면 옷을 빌려서라도 차려입고 있었을 걸!’ 하고 오히려 내가 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 손님 잠시만!”

 

우리가 멋쩍게 돌아서서 나가려는 순간 뒤에서 직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손님, 본토에서 오셨습니까?”

 

조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그 직원은 조심스러운 말투로 히토미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만,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정말 죄송합니다. 신분증을 확인 할 수 있을까요?”

 

직원의 요청을 들은 히토미는 의아스럽다는 듯이 잠시 머뭇거렸지만 내가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 하고 곧바로 신분증을 꺼내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VIP회원분과 1급 신민증을 소지하신 분께서는 예약 없이 바로 이용이 가능하십니다. 물론 동반하신분도 이용 가능하십니다. 정말 실례했습니다. 바로 안내해 드리지요.”

 

히토미의 신분증을 확인한 직원은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한 뒤 한쪽 팔로 가게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와 히토미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직원을 따라 자리를 안내 받았다.

 

마음에 드시는 메뉴가 정해지시면 불러주십시오.”

 

우리는 직원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VIP회원과 본토인 전용 홀이라는 2층으로 안내 받았다. 2층은 1층과 달리 적은 수의 테이블들이 널찍하게 떨어져있어 훨씬 차분하고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1층과는 한눈에 비교되는 더욱 고급스러운 장식들과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곳곳에 배치된 직원들은 손님의 주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고 적혀 있는 것 인지 전혀 모르겠다!’

 

메뉴판을 집어 들고 이것저것 읽어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이런 가게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전무 한 내가 제대로 된 주문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나를 쳐다보는 직원들의 시선이 따가운데 주문까지 제대로 못하면 무슨 망신인가. 나는 어쩔 수 없이 조금 창피하지만 내 앞에 앉아있는 그녀에게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고개를 들어 바라본, 일말의 희망이었던 그녀는 나와 같은 표정을 한 채 메뉴판을 꼭 쥐고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아하하.”

하하.”

 

눈이 마주치자 우리는 서로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설마 했지만 그녀도 레스토랑이 처음이라니. 결국 우리는 직원의 도움을 받고서야 어찌어찌 코스요리 주문을 마칠 수 있었다. 민망해진 우리가 대화를 다시 시작 할 수 있었던 것은 요리 중 첫 번째인 스프가 나오고 난 후에서였다.

 

히토미씨라면 이런 곳에 자주 와본 적이 있을 것 같은데, 조금 의외네요.”

, 그런가요?”

 

아차, 조금 실례인가.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전혀 기회가 없었거든요. 부모님께서 양식을 별로 안 좋아하셔서 가족끼리 와볼 기회도 없었고, 학부생 때는 학업에 정신이 없어서....... 그래서 한번 쯤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해보는 것이 꿈이었어요. 나중에 혹시라도 애인이 생겨서 데이트를 할 때 경험이 없어 허둥댈 생각을 하니 조금 부끄럽기도 했고.”

 

그녀는 약간 빨개진 얼굴로 혀를 살짝 내밀며 말했다.

 

, 이렇게 말하니 왠지 토우마씨를 이용한 것 같은 느낌이네요. 기분 나빴다면 죄송해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애인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서 한번쯤은 와 봤어야 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서로 쌤쌤이네요!”

 

안심한 듯 활짝 웃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오늘 따라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그락-

 

우리가 주문한 런치 코스 요리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절한 속도로 계속 내어져 왔다. 우리는 새로운 코스가 나올 때 마다 먹는 방법이나 모양, 맛에 대해 품평하며 즐겁게 이야기했고 딱딱했던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져갔다. 때문에 나는 줄곧 궁금해 왔던 것을 어렵지 않게 물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히토미씨는 어쩌다 이런 일을 하게 된 건가요?”

 

나의 질문을 들은 그녀는 잠시 멈칫 하더니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하는 일과 반도에 대해 동경했었거든요.”

 

그녀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는 느낌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반도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공안경찰이셨고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집에 잘 계시지는 못했지만 집에 돌아올 때마다 반도의 이야기나 자신이 하시는 일에 대해 이야기해주시곤 하셨어요. 나쁜 사람들로부터 무고한 사람들의 안전을 지키는 아버지는 제 히어로 이셨어요.”

나쁜 사람들이라면.”

분리 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여러 가지 명칭 들이 있지만, 스스로 이야기 하는 바로는 독립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이야기 하는 것 이었지요.”

 

나는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내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히토미씨도 그 사람들을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나의 질문을 들은 그녀의 표정이 조금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너무 어리석은 질문을 한 것인가.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 나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줬건 간에 독립단체, 아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공안을 위협하는 범법자들을 감옥으로 보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지금 내가 한 질문은 그녀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굉장히 위험할 수도 있는 것 이었다.

 

그랬었지요.”

그렇군요.......?”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분명 히토미의 대답은 과거형이었다.

 

한때는 굉장히 미웠었어요. 어렸을 때 아버지께 들었던 이야기에서 그 사람들은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다치게 하는 악당들이었거든요. 연일 벌어지는 사건에 항상 불안에 떨어야 하는 반도의 사람들이 불쌍했고 도와주고 싶었어요. 반도가 평화로워지면 아버지도 더 이상 집을 떠나 있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어린 마음도 있었지요.”

 

그녀는 약간 부끄러운 이야기를 한다는 듯이 말 했다.

 

그 때부터 저는 공안경찰을 꿈으로 가지게 되었던 거죠. 하지만 조금씩 성장해 가면서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물론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육이나 언론들이 떠드는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여전히 정의의 편이셨어요. 하지만 반도의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은 꿈에 부풀어 올랐던 학창시절의 저는 반도에 관한 것이라면 모든 것을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미국과 중국의 문헌은 물론이고 러시아나 조선시대 때 남겨진 기록까지. 물론 처음에는 적을 알아야 제대로 이길 수 있다는 치기 어린 생각 이었지만요.”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외국의 입장에서 본 반도에 대한 시선은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지금까지 알아왔던 상식들과 전혀 반대되는 내용들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그리고 지금까지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반도에 대한 차별의 현실도요. 고리고 고민했지요. 어떻게 해야 정말로 반도의 사람들이 행복해 질 수 있을지.”

고민의 결과는......”

물론 보다시피 공안경찰이 되었어요. 제가 내린 결론에서 결국 그 사람들은....... 독립을 원했던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들이었던 것이죠. 반도에 사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을.”

 

나는 반박 할 수 없었다.

 

벌써 반도와 일본은 하나가 된지 100년을 넘겼고, 대다수의 반도인들은 더 이상 독립을 원하지 않게 되었어요. 아니, 그들의 머릿속에서 독립이라는 글자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부여받지 않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일본 국민이 될 수도 없었어요. 일본인들에 의한 차별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그 차별을 불러온 것은.”

독립단체라고 생각하는 군요,”

맞아요. 근 현대, 아니,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독립활동들은 매스컴을 통해 일본사람들에게 다수의 반도인들은 여전히 독립을 원하며 일본에 위협을 가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일본에게서 여러 가지 혜택을 받고 있는 이중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었어요. 오랜 시간동안 지속되어온 이런 상황은 뿌리 깊은 차별을 만들어 냈지요.”

 

새로운 요리가 테이블에 놓여 졌지만 우리는 식기를 들 생각도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반도인들이 더 이상 차별받지 않고 행복해 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제가 선택한 이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에요.”

 

어쩌면 아라세카이 히토미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 우리가 정말로 일본에 녹아든다면, 정말로 진정한 일본인이 되어서 차별받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독립이라는 단어를 잊어버린 반도인들이 행복해 질 수 있는 가장 편하고 빠른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많은 반도인들이 정말로 독립을 원한다고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보편적 이념은 다수결의 원리에 따른 민주주의에요. 라고 한다면 대답이 될까요?”

 

그녀는 확실한 대답을 하기에는 자신의 입장에서 조금 곤란한 질문이라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반도인들을 위해 반도의 독립활동을 하는 사람과 싸운다. 아이러니 하지만 이해할 수 없지 않은 이야기에 나는 입맛이 씁쓸해져 왔다.

 

지금 저를 조금 별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요? 하긴, 공안경찰이 되기 위해 직장까지 그만뒀으니 확실히 이상한 사람이기는 하네요.”

? 히토미씨는 이전에 다른 일을 했었나요?”

대학교까지는 아버지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와세다 법대를 졸업하고 운 좋게 처음 치른 사법고시에 합격해 검사에 임용 됐었어요. 공안경찰 특채 공고를 보고 곧바로 뛰쳐나왔지만! 그땐 정말 아버지한테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쿡쿡.”

 

말도 안 되는 엘리트였잖아! 나는 내 앞에서 천연스럽게 웃고 있는 그녀가 다른 의미로 새삼 다시 보였다.

 

저도 토우마씨 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요.”

, , 무엇이든지요.”

어젯밤, 함께 있던 그 여성과 아는 관계인가요?”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등줄기에 찌릿한 것이 스쳐지나 가는 느낌을 느꼈다.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 마땅한 대답을 생각해 놓고 있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 단신으로 폭력배들을 몇 명이나 쓰러뜨렸다고 하더군요. 증언으로는 토우마씨와 아는 관계인 것 같다고 하던데.”

 

나는 일단 최대한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어차피 어설픈 거짓말을 해 봤자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며칠 전 사소한 오해가 생겨서 알게 되었습니다. 아직 그 여자애의 이름도 모르지만요. 어제는 어쩌다보니 같이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면 연락처나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있나요?”

연락처는 없지만, 일하는 곳에서 가끔 마주칩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다만 조금 신경 쓰인다고 할까. 솔직히 건장한 남자들을 순식간에 때려눕히는 소녀라니 흔치않잖아요? 그리고......”

그리고?”

아니에요. 잊어주세요. 요리가 식어버렸네요. 다시 데워달라고 하죠.”

 

히토미가 그 여자애에 대해 물어 본 것은 생각보다 싱거운 내용이었다. 예정 외였던 이 레스토랑에 오지 않았었더라면 히토미와의 대화는 편의점 앞에서 금방 끝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마음 한 쪽 구석에서 이 대접의 대가로 뭔가 중요한 정보라도 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부담감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요리는 다시 데워져 나왔고 우리는 그 뒤로 별다른 이야기 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토우마씨, 혹시 잠시 동안 저와 일해 볼 생각은 없으신가요?”

 

이윽고 디저트인 케이크 조각이 우리 앞에 놓여 졌을 때 먼저 입을 뗀 것은 히토미였다.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생각지 못했던 그녀의 제안에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나는 재차 되물었다.

 

너무 말이 거창했나요. 그렇다면 조금 말을 바꾸어 보도록 하죠. 제 부탁을 조금 들어 주실 수 있나요? 사례는 확실히 약속드리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내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녀는 다시 밝은 표정을 되찾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제 직급에서는 현지 정보원을 고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제 정보원이 되 주셨으면 합니다.”

정보원이요?”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니니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되요. 그저 토우마씨가 알고 있는 것, 알게 된 것을 저에게 이야기 해 주시면 되는 일이니까요. 활동비 명목으로 소정의 사례금도 지급되니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니, 그보다 어째서 저를?”

어젯밤 같이 있었던 그 여성분에 대해 알아봐주셨으면 해요. 물론 정보를 모으려면 친분을 쌓거나 해야 하는 과정도 필요하니 단시간 내에 성과를 내야한다는 부담을 가지실 필요도 없고요.”

 

나는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독립군 다음은 공안인가. 내 인생에서 두 번은 없을 인기구만.

 

공안 쪽에서 공식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수사인가요?”

개인적인 수사 활동입니다. 따라서 토우마씨는 제 직속 정보원으로 고용 되는 것이고요. 따라서 타 공안요원이나 공안청과 직접적으로 연관될 일은 없기 때문에 편하실 거 에요.”

그렇군요.”

 

나는 복잡해진 머릿속 때문에 빠른 속도로 얼굴이 굳어져갔다. 하지만 나는 표정을 관리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 제 직속이 싫으시다.......면 정보팀 쪽 소속으로 돌려드릴 수 없는 것은 아닌데.......”

? 아뇨! 그런 것은 아니에요!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요.”

, 그런 가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일희일비 하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무슨 말이든 들어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나는 간신히 이성을 붙잡았다.

 

, 역시 지금 당장 정하시기에는 조금 경황이 없으실 지도 모르겠네요. 급한 것은 아니니 잘 생각해보고 결정되면 말해 주셔도 괜찮아요.”

, . 그럼......”

 

마지막 케이크 조각까지 없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안내 받은 카운터에서 내 월급의 절반이 넘는 돈이 순식간에 날아가는 것을 본 나는 나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을 감추려 황급히 하품 하는 척을 해야 했다. 가게를 나온 나는 히토미에게 혼자 돌아 갈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반강제적 수준으로 차에 태워져 다시 동네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쓰레기가 나뒹굴러 다니는 지저분한 길거리, 지어진지 몇 십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허름한 건물들, 여기저기 얽혀 마치 거미줄 같이 늘어져 있는 전깃줄, 생기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부산한 폐지 줍는 노인. 아까까지와는 너무나도 다른 풍경에 나는 부유한 외국에 있다가 귀국한 사람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전에 드렸던 명함, 아직 가지고 계시죠? 마음이 정해지시면 그 번호로 연락 주세요.”

알겠습니다.”

....... 볼 수 있다면 좋겠네요. 그럼.”

 

아까 만났었던 편의점 앞에 차를 세워 나를 내려 준 그녀는 다시 차를 몰아 어느새 저 멀리 사라졌다. 내 시야에서 그녀의 차가 사라진 후에도 나는 잠시 동안 그대로 서서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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짹짹- 짹

“으으 음.”

귓가에 시끄러이 들려오는 새소리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평소와 같다면 새소리조차 방음이 안 되는 낡은 집을 원망하며 다시 이불속으로 파고들었을 테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나는 밤새 웅크리고 있던 몸을 힘차게 뻗어 기지개를 폈지만 내 바로 옆에 그녀가 누워있었다는 걷을 깨닫고 재빨리 팔을 다시 움츠렸다. 나는 몸이 약간 긴장되어 오는 것을 느끼며 그녀가 누워있던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 일어난 거지?’

어젯밤 그녀가 누워있었던 자리엔 적당히 정리된 이불만이 놓여있을 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어 난지 한참 되었는지 매트 또한 식어있었다. 내 머릿속에 지난밤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처음엔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졌지만 조금씩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숨소리까지 생생하게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가더라도 이야기는 하고 가야 할 거 아냐.”

“뭐라고 구시렁대고 있는 거지?”

“헉!?”

돌아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느닷없이 머리맡에서 들려왔다. 나는 놀라다 못해 경기를 일으키며 벌떡 일어나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귀를 기점으로 뒤쪽의 긴 흑발은 한데 모아 끈으로 묶어 길게 늘어뜨리고 귀 앞쪽 양옆의 머리칼은 매끄러운 얼굴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내린, 일명 포니테일 스타일 헤어로 한층 활동적인 느낌을 주고 있는 그녀는 연신 집중하는 표정을 지으며 방 한쪽의 싱크대 겸 조리대 앞에서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아직 안 갔어요?”

“뭐야, 내가 빨리 나가 주길 바라는 건가?”

당황함이 묻어 있는 내 말에 그녀는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짐짓 화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보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보면 모르나?”

따다닥-!

치지지익-

달그락달그락-

레버를 돌려 가스레인지의 불을 켠 뒤 프라이팬을 올려놓은 그녀는 나무주걱으로 능숙하게 밥을 볶기 시작했다. 그제 서야 나는 그녀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즉석밥 껍데기와 케첩포장지, 달걀껍질 등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대체.”

“어제 내가 그렇게 얻어먹고 입 닦을 거라 생각했나? 흥, 그런 건 나도 찝찝하고 지저분한 기분이 들어서 싫다 이거다!”

너무나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나를 본 그녀는 한껏 우쭐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재료는 대체 어디서 난 거에요? 냉장고는 비어 있었을 텐데.”

“이 앞에 마트가 있기에 거기서 사왔다.”

“설마, 그 모습으로 갔다 온 겁니까!”

“응? 뭔가 문제라도?”

여전히 목 아래로 시선을 내릴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을 해줘야 하나하고 어제에 이어 다시 고민에 빠졌지만 어차피 늦은 일이라는 생각에 나는 그만 두기로 했다.

“돌아갈 때는 내 옷으로 다시 갈아입고 갈 테니 걱정마라. 냄새는 조금 나더라도 땀은 말랐을 테니 괜찮겠지. 빌렸던 옷은 세탁해서 돌려주도록 하겠다.”

“그런 문제는 아니지만, 어쨌든 알겠어요.”

“그리고 네 지갑은 책상에 올려놨으니 알고 있어라.”

“설마, 재료는 내 돈으로 산건가!”

텅 빈 지갑을 보며 반쯤 우는 표정이 된 나를 시크하게 무시한 그녀는 다시 프라이팬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달달하고 고소한 냄새가 집안에 풍기기 시작했다. 이 집에 살기 시작한 이후로 제대로 된 요리냄새가 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았다.

‘으음, 확실히 자고 일어나니까 확 티가 나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군데군데 파랗게 멍이 올라왔고 자잘한 상처들에는 딱지가 들어앉은 것이 보였다. 누가 봐도 거하게 얻어맞은 것으로 밖에 안보이겠군.

“그렇게 멍하게 있지 말고 쓰레기통이라도 비우고 오지? 가득차서 버릴 공간이 없잖아!”

“예이. 예.”

“음식 곧 다 되니까 빨리 갔다 와라!”

원래대로라면 주말동안에는 쓰레기를 수거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버리는 것을 건물주인에게 들키면 잔소리를 들을 것이 빤하지만, 그렇다고 집안에 쌓아두기도 뭐하니 어쩔 수 없지. 절대 저 여자애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다.

“읏차.”

나는 꽉 찬 쓰레기봉투를 밖으로 가지고 나와 지정된 수거 장소에 내려놓고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건물주인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내려왔던 계단을 다시 올랐다.

“이봐요! 방금 쓰레기 내다 버린 거 맞죠?”

“으헉! 놀래라!”

층계를 올라 복도 코너를 도는 순간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사람과 부딪힐 뻔한 나는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았다. 샛노랗게 물들인 금발, 깊게 파여 가슴골이 훤히 들어나는 브이넥 티셔츠와 두툼한 허벅지가 전부 드러나는 짧은 숏 팬츠. 마치 내가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서있는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옆집의 젊은 여자였다.

“주말에, 그것도 낮에는 쓰레기 버리면 안 되는 거 몰라요? 하루 종일 냄새라도 올라오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옆집여자는 엉망이 된 내 얼굴을 보고 멈칫 했지만 이내 잘 걸렸다는 듯이 비웃음을 띄우며 신난 듯 쏘아붙였다.

“제가 미처 미리 못 내놓아서, 앞으로 주의 할게요.”

나는 대충 무시하며 지나치려했지만 비좁은 복도는 그 여자가 버티고 서자 지나갈 공간이 없어졌다.

“아니,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묻고 있는 거거든요? 이웃 간에 지킬 건 지켜야 되는 거 아닌가?”

당신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거든!

“게다가 대체 어젯밤엔 무슨 짓을 했기에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며 시끄러웠던 거죠? 뭐, 그렇게 혼자 살다보면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이상한’ 취미가 한둘쯤 생길법도 하지만! 푸흡! 그 얼굴 꼬락서니의 원인도 설마? 우웩! 소름끼쳐!”

“으읏.”

옆집여자는 일부러 한 단어를 강조하여 말하며 노골적으로 가슴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안 그래도 훤히 보이던 가슴이 브이 넥 사이로 마구 삐져나올 것 같은 형상이 되었고 당황하며 시선을 돌리는 나를 본 여자는 폭소를 했다. 이 여자, 나를 놀리는 것에 맛을 들인 것이 분명했다.

“풋, 이래서 동정은 안 된다니까.”

“예? 이, 이봐요! 내가 도, 동정인지 아닌지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그거야 보면 알지! 만날 음침하게 혼자 집에서......!”

덜컹!

“내가 음식 곧 다 된다고 빨리 들어오라고 했잖아! 거기서서 뭐하고 있는 거야!”

“......어? 에? 엑?”

나와 옆집 여자의 높아지는 언성을 단박에 멈춘 것은 그녀였다. 갑작스런 상황에 옆집 여자는 깜짝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와 그녀를 빠르게 번갈아 볼 뿐 이었다.

“저, 저 호실은 분명, 아니! 어?”

늦은 주말 아침. 내 집 문을 벌컥 열고나온 여자가 묶어 올리긴 했지만 밤사이동안 헝클어진 것이 분명한 머리칼과 어떻게 봐도 내 옷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차림을 하고 열린 문틈 사이로 갓 만들어진 음식냄새를 흘리며 나를 부르고 있는 상황.

‘누가 봐도 이 장면은......!’

옆집여자는 입을 뻐끔거리며 나를 다그치고 있는 그녀를 연신 위아래로 훑어댔다. 하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는 못했다. 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얼굴을 드러낸 그녀는 누가 봐도 눈에 띄는 미소녀였기 때문에 흠을 잡을 생각이라면 포기하라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어, 어젯밤에 그 소란은 설마! 다, 당신! 저 애 아무리 봐도 미성년자잖아! 범죄라고! 알고 있어?”

결국 지적하는 것은 그 부분인건가!

“사생활은 신경 꺼 주시죠!”

나는 이때다 싶어 옆집 여자를 밀치고 문 앞에 서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안으로 떠밀고 들어가 문을 닫았다. 어찌 됐든 한방 먹인 거 같은 기분이 들지만 실상을 생각하면 조금 부끄럽네.

“저 여자는 대체 누군데 저러는 거지?”

“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요 그냥 옆집 사는 사람입니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온 사이, 어느새 방 한가운데에 놓인 탁상에는 노트북 대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계란볶음밥이 그릇에 담겨 올려져있었다. 반질반질하게 볶아진 계란볶음밥에서 풍겨오는 달달한 케첩냄새는 식욕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애도 혼자 살고 있다고 했던가. 혼자 살아도 착실히 요리를 해 먹는 타입인가보군.

“마, 마음에 안 들면 안 먹어도 된다.”

이크. 음식 앞에서 멀뚱멀뚱 있는 건 실례지.

“아닙니다! 굉장히 맛있어 보여서. 식기 전에 먹죠.”

“에그 스크램블과 밥에 케첩을 뿌려 함께 볶았을 뿐이다.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야.”

“그래도 직접 만든 요리라니 영광이네요.”

“사탕발린 말 따위는 필요 없다.”

칭찬을 해 줘도 삐딱하기는.

달그락 달그락-

항상 편의점에서 차가운 삼각 김밥 따위나 먹어 와서 그런 것 일까. 따듯한 온기가 올라오는 맛있다는 것 이상의 느낌이었다. 아니, 누군가 나를 위해 만든 음식을 함께 같이 먹는다는 것이 그런 느낌을 받게 한 것 일지도 모른다. 정신없이 그릇을 비우고 나서야 고개를 든 나는 그제야 그녀가 먹는 것도 멈춘 채 넋을 놓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 그렇게 배가 고팠으면 만들 때 말을 하지! 나도 다 먹었으니까 이건 마음대로 해라. 버리던지 먹든지.”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먹던 그릇을 내밀었다.

“아, 그럼 감사히 먹을게요.”

배가 이미 조금 불러왔지만 마음대로 하라 했다고 정말로 마음대로 한다면 이 다음 끼니는 씹어서 먹는 음식을 먹기 힘들게 되겠지.

“그럼 나는 이만 내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가도록 하겠다.”

내가 그녀의 그릇을 앞으로 가져와 남은 볶음밥을 입에 밀어 넣는 것을 흘끗 본 그녀는 약간 고개를 숙이고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퉁명스럽게 이야기했다. 나는 입에 가득 찬 볶음밥 덕분에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내가 남은 밥들을 먹는 사이 화장실에 들어가 어제 벗어놓았던 자신의 옷으로 다시 갈아입었다.

“빌렸던 옷은 세탁해서 돌려주도록 할 테니까.”

그녀는 내 옷을 작은 봉투에 담아 챙긴 뒤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물론, 네가 이 옷을 돌려받을 수 있는 판단을 한다면 말이지. 이제 기한은 내일까지다. 남은 하루 동안....... 제대로 생각하라고 바보야!”

찰칵- 끼이익-

쾅!

“......”

방금 전까지와 달라진 것 이라고는 단지 사람 한명이 줄어들었을 뿐인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떠들썩했던 것이 마치 완전히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무거운 적막감이 방안에 내려앉았다.

‘사람의 빈자리는 생기고 나서야 느낄 수 있다던가.’

설마 지금 나는 아쉬워하고 있는 건가? 아냐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이제 드디어 자유롭고 조용한 주말을 얻은 거야!

“......”

나는 지금까지 오랜 시간동안 이 집에서 혼자 살아왔지만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에 괜히 일부러 더욱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내며 식기들을 정리했다.

‘이제 하루 인가.’

독립군에 들어가든가 독립군 손에 죽든가 둘 중 하나라는 건가. 어느 쪽도 결국 죽는 미래밖에는 보이지 않는구만. 솔직히 아직도 내가 거절했을 때 저들에게 어떤 짓을 당하리라고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저들에게 나는 상당히 껄끄러운 존재임에 확실하다. 내가 만약 따르지 않았을 경우 나를 처리하는 것에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 이다.

‘그렇다고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 가담한다고 해도 문제란 말이지.’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내 인생은 이제 완전히 변해버릴 것이 분명했다. 만약 그때 바보 같은 오해만 하지 않았다면, 내 지루하도록 평범했던 일상은 지금까지와 변함없이 앞으로도 그대로 쭉 계속 되었을까. 지금으로선 이제 영영 알 수 없게 돼버렸다.

째깍째깍-

오랜만에 듣는 것 같은 시계소리가 조용한 방안을 울렸다. 시곗바늘은 어느새 낮 12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지금쯤에야 어기적어기적 일어나 대충 끼니를 때우고 노트북 앞에 눌러 붙었을 시간이지만 오늘은 전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나는 대신 매트위에 가만히 누워서 뒹굴 거려 보았지만 마음한쪽 구석에서 느껴지는 불편함과 초조함에 머릿속은 편치 않았다.

‘공안과 독립군 어느 쪽에도 관련되지 않고 끝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내가 이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잠수를 탄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제아무리 그런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민간인들이고 내가 마음먹고 지방으로 내려가 잠적한다면 찾아낼 방법이 없을 것 이다.

‘하지만 수중에 그럴 돈도, 능력도 없지.’

나는 복잡해진 머릿속과 뒤숭숭해진 기분을 견딜 수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대로 방안에서만 있기에는 뭔가 시간이 아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라면 주말 내내 집에서 한발자국도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끼이익- 덜컹.

일단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막상 갈 만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 오늘은 충분히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나는 일단 마음을 진정시키기로 했다.

‘익숙한 장소라면.’

나는 내가 일하고 있는 편의점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집밖에서 유일하게 익숙한 장소라고는 일터뿐이라니, 나는 조금 자조적인 기분이 되었지만 어차피 곧 점심을 사 먹어야하기도 했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지금은 미와코가 근무하고 있을 시간인가.’

나에게 조금 귀찮게 굴지도 모르지만 하루 종일 혼자서 일하다가 아는 사람이 매장에오면 신이 나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 뭐, 기분 전환 겸 조금 같이 놀아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딸랑-

‘주말에도 빠짐없이 이곳에 오게 될 줄이야.’

편의점 문을 열어젖히자 종소리가 울렸고 익숙한 매장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헉? 선배?”

카운터에서 들려온 미와코의 목소리는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뭐라고 할까 좀 더 기뻐하는 것을 기대했는데 말이지.

“야스무라군? 이 시간에 무슨 일로? 거기다 자네 얼굴은 왜 그래?”

“어? 점장님? 점장님이야 말로 아직 교대할 시간이 아닌데 왜 벌써 오셨어요?”

카운터에는 미와코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와코의 옆에는 원래대로라면 출근이 세 시간이나 남은 점장이 서류를 잔뜩 손에 쥔 채 허둥대고 있었다.

“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야스무라군! 옆에! 옆에!”

카운터 쪽으로 걸어온 나에게 점장은 한껏 목소리를 낮추더니 한쪽 얼굴을 찡그려서 옆을 가리켰다.

“예? 대체 무슨?”

나는 점장이 왜 이러는지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점장이 온 얼굴 힘을 다해 가리키고 있는 곳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흐음~.”

푸딩진열대 앞에서 한쪽 손으로는 턱을 받친 채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져있는 여성은, 그녀가 입고 있는 새까만 정장과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매력적인 가슴이 아니었더라면 누가 보더라도 식사 후에 먹을 간식을 사러 나온 여고생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앗!”

인기척에 진열대에서 고개를 들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작게 놀란 그녀는 다름 아닌 공안 조사관 아라세카이 히토미였다. 편의점에 들어왔을 때 매장에 그녀가 있는 것을 내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작은 키 덕분에 매장의 진열대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당황해하는 나를 본 그녀는 이내 예의 미소를 되찾으며 빠른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뭐, 뭐야? 너무 가까이 다가왔잖아!’

내 바로 앞에 바싹 붙어 선 그녀는 까치발까지 들고서 내 얼굴을 뚫어 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과 내 얼굴 사이의 거리는 몇 십 센티도 채 되지 않았고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내 얼굴을 훑으며 또르르 굴러다니는 것이 세세하게 보일정도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얼굴을 피할 생각도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턱선 부근까지밖에 오지 않을 정도로 짧지만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단발머리, 작은 얼굴에 비해 크고 시원시원하며 옅은 쌍꺼풀이진 눈, 작지만 오뚝한 코,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붉은 입술, 하얀 피부위에 살짝 내려앉은 것 같은 분홍색 뺨. 미인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시선이 계속 가슴으로 가는 바람에 지금껏 자세히 보지 못했던 그녀의 얼굴은 꽤, 아니 상당한 미인이었다.

“어젯밤, 그 사람들과 싸웠던 사람, 토우마씨 맞지요?

“예?”

넋을 넣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질문을 놓쳐버렸다. 초면은 아니지만 갑작스럽게 이름으로 불린 것도 당황스럽긴 했다. 처음 봤을 때 그녀 자신도 이름으로 불러달라고는 했지만, 그녀 스스로도 상대방을 부를 때 스스럼없이 먼저 이름으로 부르는 타입이었던 것 인가.

“그러니까 어제 밤 11시쯤 여기서 가까운 번화가에서 조직폭력배들과 싸웠던 것 말이에요. 그거 토우마씨 맞죠?”

당황해서 멀뚱히 있는 나를 본 그녀는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다시 친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예? 아니, 그건!”

“어떻게 알았냐고요? 음, 그 장소에 있었던 피해자 진술청취에서 당신의 인상착의를 들었어요. 혹시나 했지만, 역시, 지금 토우마씨의 얼굴을 보니 맞는 것 같네요!”

아니, 대체 어떤 진술이었기에 나라고 특정할 수 있는 거지. 나는 눈에 잘 안 띄는 흔한 인상이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내 인상착의를 말한 진술자의 설명력이 좋은 건지 단번에 나라고 생각한 히토미의 눈썰미가 좋은 건지 궁금하네.

“여기 서서 말하는 것도 그러니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죠!”

그녀는 편의점 밖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먼저 나가서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을 한 그녀는 푸딩진열대에서 푸딩 두 개를 가져와 계산을 한 뒤 뒤따라 편의점을 나왔다. 그 사이 대충 점장에게 전해들은 정황은 이러했다. 나를 찾기로 생각한 아라세카이 히토미가 내 소재지를 알아내기 위해 편의점을 방문 했고 미와코의 긴급전화를 받은 점장이 원래 출근보다 3시간이나 이른 시간임에도 쏜살같이 달려와 카운터 밑의 금고에서 직원 명부를 꺼내 뒤지는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내가 편의점에 들어왔다는 것 이었다. 나는 아라세카이 히토미가 내 집까지 찾아오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은 것에 안도해야 할지, 이곳에서 그녀와 마주친 것에 절망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어찌 됐든 그녀의 의식영역에서 조용히 사라지기에는 틀려먹은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딸랑-

편의점에서 나온 그녀는 그녀가 사온 푸딩 중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내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려하자 그녀는 한사코 만류했고 결국 포기한 내가 감사의 인사와 푸딩을 받자 그제 서야 그녀는 테이블 반대편에 앉았다.

“흐흐흥~”

푸딩을 한 숟가락 가득 떠 입안에 넣고 오물거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한가득 짓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나는 왠지 맥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피해자 측의 젊은 아가씨가 당신을 찾게 되면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 하더군요.”

젊은 아가씨라면 그 가게 주인의 딸인가. 아무래도 역시 그 아가씨가 나에 대해 이야기 한 것 같군.

“개인적으로라도 만나서 사례를 하고 싶으니, 괜찮다면 연락을 달라는 말도. 후훗.”

나에게 전화번호가 적혀있는 쪽지를 내민 그녀는 마치 소개팅을 주선하는 친구 같은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그 연락처로 연락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가 건네는 것을 거절하는 것도 껄끄럽기에 나는 그것을 조용히 받아 지갑에 넣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이었다고 할까요? 뭐, 몸을 던져 자신을 보호해준 남자라니! 누구라도 반할법하네요!”

“예? 컥, 켁켁!”

생각보다 직접적인 그녀의 말에 당황한 나는 먹고 있던 푸딩 때문에 사레에 들렸고 한참을 기침해야했다. 그 가게주인 딸의 머릿속에서 뭔가 나에 대해 굉장한 미화가 진행 된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그, 건달들은 어떻게 된 거죠?”

“체포된 사람들을 취조해서 현재 도망친 일당들을 쫓고 있어요. 단순 조직폭력사범은 우리 관할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은 사건을 지역 경찰서로 인계했지만요. 물론, 공안경찰에 대한 폭력행사 및 공안공무집행 방해는 공안사범으로 다룰 수 있지만,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여유까지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 건달들은!”

“토우마씨가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는 알아요. 우리가 직접 실시한 1차 조사 때 지역경찰서와 조직 간에 커넥션이 있는 것을 알게 됐어요. 조직의 실질적 주인인 본토인은 일본본토로 송환됐고 사건처리에 대한 보고서를 관할 경찰부서에서 전달 받고 있으니 안심해도 됩니다.”

“그, 그렇군요.”

일단 그렇다고 하니 다행이지만, 아까 처음 아라세카이 히토미와 마주쳤을 때부터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의문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계속 이런 겉도는 이야기를 해봤자 지치기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은 나는 직접적으로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일단 사건은 잘 진행이 되서 목격자의 진술은 더 이상 필요 없을 것 같고, 설마 아까 그 연락처를 전해 주려고 오신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뭐죠?”

나의 돌림 없는 말에 그녀는 약간 놀라는 얼굴이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슬슬 이야기 하려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이것도 사족이긴 하지만 토우마씨는 목격자가 아니라 피해자이지요. 피의자들에게서 보상을 원하거나 그들의 형벌을 더 높이고 싶다면 관할경찰서와 연결해 주도록 하겠어요. 아, 그리고 토우마씨가 건달들에게 맞았다는 진술을 들었을 때, 저도 꽤 걱정했다고요? 직접 보니 얼굴에 상처가 조금 나긴 했지만 소독이나 처치가 잘 되어있어서 흉이 지지는 않을 것 같네요. 치료는 직접 한 건가요?”

“아, 예, 뭐.”

괜히 그 여자애의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지. 그것보다 아까 나와 마주치자마자 얼굴을 들이밀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 이유가 폭행에 의한 상처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던 건가.

“흠, 평소에도 다치는 일이 많나요?”

“아뇨, 그건 아니지만.”

“그런가요. 음, 좋아요. 이제 제가 온 이유를 말씀 드리죠. 아, 그렇게 대단하거나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저 몇 가지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는 것 뿐 이니까요.”

수첩과 볼펜을 정장 안주머니에서 꺼내어 든 그녀는 일순 분위기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진지하고 사무적인 그녀의 표정과 위엄 있는 목소리에 나는 다시 긴장이 되는 것을 느꼈다.

“어제 같이 있던 또 한명의 피해자 여성분과 아는 관계인가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대화 속에서 이상하리만치 나오지 않았던 부분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것일 것이라고 마음속에서부터 생각했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무슨 대답을 하던지 그 대답이 나에게 어떤 상황이 되어 돌아올지 알 수 없었기에 여전히 머릿속에서는 마땅한 대답을 준비 못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건.......”

꼬르르륵-

내 대답보다 빠르게 튀어나온 것은 배꼽알람이었다. 무안해진 분위기에 나는 말을 멈추고 헛기침을 할 수 박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시간을 뺏어서 미안해요. 혹시 식사는 했나요?”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손목에 있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아, 아직 안 먹었습니다. 혹시 아라세....... 히토미씨는?”

“음, 아까 그 푸딩으로 적당히 때우려고 했지만, 저 때문에 토우마씨의 점심시간까지 방해할 수는 없죠.”

일단 시간을 벌 수 있는 기회인가!

“제가 토우마씨의 시간을 뺏는 것이기도 하니까 답례로 점심을 대접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에?”

나는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발언에 깜짝 놀랐고 입에서는 그저 ‘예?’ 라는 말뿐만 반복해서 나올 뿐 이었다.

“사실,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식사는 제대로 하자는 주의라서, 푸딩 하나만으로는 부족했거든요. 제가 알고 있는 가게가 있는데, 그쪽으로 괜찮을까요?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가게였는데 혼자서 가기에는 힘든 곳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었거든요! 자. 가요!”

“예? 엑? 자, 잠깐!”

방금 전까지 나를 긴장시켰던 분위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그녀는,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기 좋아하는 여느 또래의 여자들처럼 신이 나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이야기하면서 점점 흥분하던 그녀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더니 내 손을 덥석 잡고 끌기 시작했다. 요즘에 여자가 남자 손을 잡아끌고 다니는 것이 새로운 유행인건가. 예상치도 못한 전개에 내 머릿속엔 두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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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은 또 뭐야?”

 

건달들은 수많은 자신들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시발놈들이 다 같이 손잡고 장례식장 갔다 왔나 단체로 시꺼먼 옷 뒤집어 입고 지랄이야? 니들 어디 애들이냐? 여기 우리 구역인거 몰라? 뒤지고 싶어서 기어들어왔나?”

 

서있는 건달들 중 끗발이 있어 보이는 남자가 부하 서너 명을 데리고 연장을 휘휘 저으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마지막으로 경고하겠습니다. 무기를 당장 땅바닥에 내려놓으세요!”

 

하지만 그런 위협적인 건달들의 모습에도 아라세카이 히토미의 얼굴에는 전혀 긴장하거나 걱정하는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는 건달들을 움찔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런 썅년이 남자가 말하는데 어디서 윽박지르고 지랄이야!”

 

부하들이 주눅 드는 것을 눈치 챈 건달은 괜히 더욱 화를 내며 손에 들고 있던 연장을 들어 때리려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으억!”

 

아라세카이 히토미의 옆에 서있던 검은 정장의 남자가 번개같이 달려들어 그 건달의 팔을 꺾어 바닥에 찍어 누른 것 이었다. 한눈에 봐도 굉장히 단련된 솜씨였다.

 

, 이 새끼들이!”

 

그 모습을 본 부하들이 몇 명이 정신을 차리고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검은 정장의 사내들에게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건달들은 순식간에 제압당해 심음을 내뱉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공안입니다! 여러분들을 특수폭행 및 공무집행 방해죄로 체포하겠습니다!”

 

자신의 동료들이 힘도 못쓰고 제압당하는 것을 입을 벌린 채 보고 있는 건달들에게 아라세카이 히토미가 공안수첩을 내보이며 소리쳤다.

 

, 튀어!!!”

잡히면 인생 끝이다!”

시발! 하필 건든 게 공안이라니!”

 

일순간 정적이 흐른 뒤 누군가 외친 말에 건달들은 너도나도 뒤질세라 연장을 집어던지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멈추세요!!”

 

아라세카이 히토미가 당황해서 외쳤으나 서라고 한다고 설 리가 없었다.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황급히 달려 나가 닥치는 대로 붙잡았지만 숫자에서 역부족 이었다.

 

지금이다! 우리도 빠져나간다!”

 

상황을 지켜보던 여자애가 내 손을 붙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심하게 맞아서 인지 갑자기 일어서서 달리자 현기증이 느껴지고 다시 통증이 밀려왔지만 확실히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공안과 엮이는 것은 좋을 리가 없었다.

 

버스를 탈 수 있는 대로는 저쪽이에요!”

 

우리는 쉴 새 없이 달려서 대로까지 단숨에 도착했다. 때 마침 운 좋게 오늘의 마지막 버스가 도착했고 숨고를 틈 없이 우리는 몸을 실었다.

 

, 헉헉.”

 

의자에 쓰러지듯 몸을 기대자 거침 숨이 터져 나왔다. 버스 창문에 비친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피는 멈춘 것 같았지만 이미 내 코와 입 주변은 피범벅이 되 있었다. 상태를 확인하니 코와 입안이 더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멍한 귓속으로 시끄러운 버스의 엔진소리와 함께 통금 30분 전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뒤섞여 귀에 들려왔다.

 

눈치라도 좀 주지!’

 

미리 알려 줬다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괜히 원망스러워 져서 내 반대편에 앉아 있는 여자애를 바라보았다.

 

“......”

 

그 여자애는 내 모습을 보고 놀람과 당황이 뒤섞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역시 골목이 조금 어두웠던 탓에 내가 이런 상태였다는 것을 몰랐었던 것 같았다.

 

그러게 대체 믿는 구석도 없이 왜 끼어드는 거지? 바보 같긴!”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짐짓 성난 표정으로 소리치며 휙 고개를 돌렸다. 그래, 괜찮으냐고 물어보기라도 하길 기대한 내가 바보지.

 

후우, 집에 갈 때 까지만 참자. , 어차피 이제 곧 집에 도착하면 저 여자애도 돌아갈 테니 오늘은 더 이상 볼일 없겠지.’

 

나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고 예전 집을 나갈 때 할머니가 한사코 가져다준 구급상자를 어디에 뒀는지 떠올리려 애를 썼다.

 

?”

 

뭔가 이상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에서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젠장! 잘못 탔다!”

 

정신없이 급하게 버스를 타느라 방향이 잘못 됐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 이었다. 나는 황급히 일어서서 정차 버튼을 눌렀다.

 

뭐라고?”

방향을 잘못 탔다고요! 반대 방향으로 탔어야 했는데!”

바보 같기는!”

 

급한 마음과는 달리 버스는 한참을 더 달려 다음정류장에 도착해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다급히 반대편으로 건너가 버스정류장을 찾았지만 이미 막차시간은 지난 이후였다.

 

제길, 벌써 끊겼다니!”

 

걸어서 가지 못할 거리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관건은 통금시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 안에 빠듯한 거리였다.

 

어쩔 수 없지. 오늘 만큼은 도와주도록 하겠어!”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선 이어폰을 꽂고 있던 귀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까 승합차 봤지? 그걸로 집 앞까지 데려다 줄 테니 감사하도록 해라.”

 

퉁명스러운 말투로 그렇게 말한 그녀는 정류장의 의자에 털썩 앉아 팔짱을 끼고 시선을 돌렸다.

 

저기.”

뭐냐, 맘에 안 들면 여기서부터 뛰어서 가든가!”

그게 아니라 저기, 저게 그 차 아니에요? 조금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

 

나의 말에 그녀는 무슨 소릴 하냐는 말투로 대답하며 내가 말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위에에엥-

 

- “아아, 회색 봉고차. 봉고차! 멈추세요!”

 

이제 낯이 익은 봉고차가 반대편 차선에서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뒤에 바짝 붙어서 사이렌을 울리며 따라오고 있는 경찰차가 문제일 뿐.

 

쌔애앵-!

 

봉고차와 경찰차는 굉음을 내며 우리 앞을 순식간에 지나쳐 저 멀리 사라졌다. 그 모습을 멍하게 보고 있던 그녀는 다급히 무선으로 연락을 했지만 몇 마디가 채 오가기도 전에 미간을 감싸 쥐며 이어폰을 귀에서 뽑았다.

 

, 저기요?”

 

나는 불길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가자.”

?”

뛰어! 시간 없잖아!”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있는 나를 끌고 그녀는 우리가 온 방향을 거슬러 뛰기 시작했다.

 

아까 그 봉고차는!”

너도 눈이 있으면 봤잖아. 말할 시간 있으면 앞장서서 뛰어! 길은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녀는 내 말에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달리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확실히 방금 상황을 보면 그녀 동료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단념하고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헉헉, 이대로는 너무 아슬아슬 해요! 어제 밤에 그랬던 것처럼 지하통로를 이용 하는 것은?”

경성의 하수도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기 때문에 우리도 쓰는 통로가 아니면 모른다! 지금부터 도착할 때 까지 전력질주다!”

헉헉! 더는, 더는 한계에요! 잠깐!”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말할 시간에 뛰어라!”

 

다리가 점점 느려지는 나를 그녀는 질질 끌다시피 하며 뛰기 시작했다. 이제 통금시간이 임박하고 있다는 것에 증거같이 길거리에는 계도를 위한 경찰들이 속속 눈에 띄기 시작했다. 다리가 한없이 무거워지고 폐가 터질 것 같이 아파왔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헉헉, 여기서 오른쪽! 코너를 돌면 되요!”

 

마치 영겁의 시간동안 계속 뛰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쯤 우리는 익숙한 골목 어귀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침내 내가 살고 있는 원룸 건물의 문 앞에 도착하는 순간 자정 12시 통금을 알리는 기미가요가 확성기에서 흘러 나왔다. 나는 건물 계단 벽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비 오듯이 쏟아지는 땀을 닦았다.

 

하아, 하아, 그런데 그쪽은 이제 어떻게 돌아갈 건데요?”

이제 돌아가다니?”

 

그녀는 자신의 뺨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의아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니, 저는 이제 집에 들어 갈 건데 그쪽은 어떻게 돌아가시냐고......”

 

갑작스레 덮쳐오는 불안감에 나는 나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설마 아니겠지, 아니겠지 하며 진정하려 했지만 그녀의 대답은 가차 없이 내 기대를 부서뜨렸다.

 

밖에 경찰들 깔리는 거 봤잖아? 지금 이 상황에서 나보고 당당히 걸어서 돌아가라고?”

그 하수구라든지!”

말 하지 않았나? 우리도 아는 길이 아니면 사용 못한다고!”

아니 그래도 어떻게!”

 

남자 혼자 사는 집에 그렇게 당당하게 들어올 생각을 해요?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나는 뒷말을 꿀꺽 삼켰다. 어차피 또 자신이 무슨 상황을 벌이려하고 있는지 자각을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여자, 남녀 관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지금 일러주어 봤자 나 혼자 괜히 이상한생각을 하는 것으로 몰아붙일 것이 분명하겠지.’

 

어차피 이제 이 여자애가 내일 아침까지는 돌아갈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맞고 그렇다고 밖에 밤새 세워 둘 수도 없는 일이기는 했다. 일부로 들쑤시지 않고 상황에 대해 자각을 못하게 하면 자연스럽게 이 넘어갈 수 도 있을 것 같았다. 일찌감치 체념을 한 나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들어 계단을 올랐고 그녀는 당당한 걸음으로 내 뒤를 따라왔다.

 

철컥! 끼이익-!

 

딸칵!

 

문을 열고 불을 켜자 정겨운 내 방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 방에 들어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 될 줄이야. 나는 괜스레 입구에 서서 감격에 빠졌다. 하루 종일 방에서 뒹굴뒹굴하며 보냈던 지난 주말이 마치 몇 년은 된 것 같이 느껴졌다.

 

둘이 쓰기엔 좁군.”

 

그녀는 감상에 빠져있는 나를 제치고 들어오며 불만스럽다는 듯 이야기했다. 잠시 그녀를 현관에 그대로 서있게 한 나는 물건들을 최대한 밀어 붙여 공간을 만들었다. 나는 간신히 만든 자리에 그녀를 들어와 앉게 하고 화장실로 가서 지저분한 얼굴을 대충 닦았다.

 

그래도 일단 손님이니까.’

 

나는 찻장에서 언제 사용했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커피 잔을 꺼내어 간단히 씻은 뒤 물을 끓여 믹스 커피를 타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곳에 살기 시작한 이후로 누군가 이 방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였다.

 

“......”

“......”

 

성인 두 명이 자리를 잡고 앉자 좁은 방안은 금세 가득 들어찼다. 한밤중의 좁은 방안에선 그녀의 작은 숨소리조차도 선명히 들려왔고, 그녀가 살짝 움직일 때마다 땀으로 흠뻑 젖은 그녀의 몸에서 나는 체취가 방안에 퍼졌다.

 

?”

“......!”

! , 미안해요! , 이건 그런 뜻이 아니라!”

 

젠장! 다리가 불편해진 내가 앉은 자세를 고치려 손을 짚은 곳에 하필 그녀의 손이 놓여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무게 중심 때문에 내가 그녀의 손을 꼭 쥐는 형상이 된 이후였다.

 

얻어맞는다!’

 

나는 반사적으로 뻗었던 팔을 황급히 움츠리며 가드를 올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몇 초가 흘러도 예상했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떠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

 

당당히 방에 들어왔던 아까와는 달리, 그녀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긴장이 역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모자를 눌러쓰는 그녀는, 아무래도 자신이 자처한 것이 어떤 상황인지 깨달은 것 같았다.

 

꿀꺽-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괜히 나까지 긴장이 되어 오기 시작했다. 방안에는 걷잡을 수없이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그녀의 숨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를 의식하기 시작하자 방금 전까지는 알아채지 못 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보기만 해도 보드라움이 느껴지는 볼을 따라 촉촉이 젖어 달라붙어있었고,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는 티끌하나 없이 관능적인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슬쩍슬쩍 보이는 그녀의 가는 쇄골에는 땀방울이 촉촉하게 맺혀있었고 땀 때문에 몸에 달라붙은 후드 티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몸의 라인을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했다.

 

“......”

 

그녀는 나의 시선을 눈치 챘는지 안절부절 못 하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나는 더 이상 이런 분위기가 계속 됐다간 무슨 일이 벌어지든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일단 이 옷 빌려 줄 테니 먼저 씻어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나는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려서 떠오른 말을 갈라지는 목소리로 힘겹게 이야기 했다. 어서 땀투성이가 된 몸을 씻어 내고 싶기도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화가 진행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뭐라고?”

 

그녀는 내말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완전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듯이 이리저리 빠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

젠장! 그러고 보니 이 상황에서 이 말은 누가 들어도 빤하고 빤한 의미의 대사잖아! 급한 마음에 너무 두서없이 말을 내 뱉었다! 내 말이 충분히 오해할 만한 것인 것을 깨달은 나는 허둥지둥 팔을 휘저으며 필사적으로 해명했다.

 

, 아니! , 그러니까! 땀이 많이 나기도 했고! 이제 자려면 씻기도 해야 하고! , 이제 시간도 늦었으니까! 화장실이 많이 좁긴 해도 샤워는 할 수 있으니 쓰세요!”

, 그래! 마침 샤워가 하고 싶었던 참이다! 땀을 흘렸으니까! 흘린 땀은 씻어야 하니까! 그럼 먼저 실례하지!”

 

-!

 

내가 내민 옷을 받아든 그녀는 국어책을 읽는 것처럼 딱딱한 말투로 외치며 도망치듯 화장실로 들어갔다.

 

쏴아아-

 

잠시 후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그제 서야 한숨을 푹 쉬며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나는 갈아입을 옷을 정리해놓고 여자애가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시간을 때울 겸해서 노트북을 켠 뒤 인터넷 라디오를 틀었다.

 

요새 대체 이게 무슨 꼴 인거지.’

 

벽에 등을 기대고 힘을 풀자 피로가 몰려와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져 갔다.

 

- ‘금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였고.’

 

어느새 라디오에서 나오는 방송은 조금씩 귀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 ‘다음 차기 자유당 총재 유력후보들 중 한명으로 손꼽히는 아라세카이 의원이 오늘 기자 회견을 열고.......’

 

“!”

 

순간 몰려오던 잠이 확 달아나며 나도 모르게 눈이 번쩍 뜨인 나는 귀를 의심했다. 분명히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 ‘아라세카이 의원은 국내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조선반도의 문제에 대해 정부가 강력히 개입 할 것을 주문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야당에서는 조선반도의 자치권을 전면 부정하는 발언이라며......’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아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켜고 방금 들었던 이름을 검색을 했다.

 

[아라세카이 료지. 현 여당인 자유당 소속 중의원. 공안요원 출신인 그는 공안청 조사 제3부 부장, 공안청장 등 요직을 역임하였고 은퇴와 동시에 우익 보수정당인 자유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하였다. 자유당 내에서도 대표적으로 꼽히는 극우성향의 정치인이며 반도문제와 관련하여 강경한 발언으로 몇 차례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그는 슬하에 1녀를 두고 있으며......]

 

나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손을 더듬거리며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었다.

 

[공안청 조사 제3부 조사관. 아라세카이 히토미.]

 

흰 바탕의 명함에 검은색 글씨로 깔끔하게 쓰여 있는 이름의 성은 내 모니터에 띄워져 있는 이름의 성과 한자가 정확히 일치했다. 성이 3만개나 되는 일본에서는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아무리 조사관이 간부라고는 해도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공안요원들일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그렇게 까지 쩔쩔 맨 이유를 납득하기에 충분했다.

 

하마터면 진짜 인생 귀찮아질 뻔 했구나!’

 

등줄기가 서늘해진 나는 휴대폰이 고장 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쪽에서 내 말을 의심하지 않고 넘어가긴 했지만 아마 휴대폰이 멀쩡했다면 나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순순히 번호를 넘겼을 것이 분명했다. 어찌됐든 이런 사람과는 조금이라도 얽히지 않는 것이 일신에 좋은 것이다.

 

그건 그렇고 반나절 만에 또 마주치다니, 다행히 그쪽은 우리를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지만.’

 

나는 복잡해진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차피 이제 진짜로 마주칠 일은 없겠지. 그리고 며칠만 지나면 그쪽도 나에 대해선 금세 잊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한가한 사람도 아니니. 덕분에 잠이 확 깼다.

 

찰칵- 끼익-

 

화장실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열린 문틈 사이로 화장실 불빛과 함께 수중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 벗어 놓은 옷은 이 쇼핑백에 담아서 가져가세.......?”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긴 흑발, 만족스럽다는 듯이 살짝 감고 있는 눈, 살짝 상기 되어 있는 양 볼과 그것에 대조되어 더욱 희고 부드러워 보이는 피부, 굴곡지고 매끄럽게 떨어지는 몸의 라인, 강렬한 듯 은은한 듯 몸에서 풍겨오는 향기. 내가 빌려준 짧은 반바지와 흰색 반팔 티를 입고 나온 그녀는 남자라면 누구든지 충분히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볼 만 했다. 하지만 나를 놀라게 한 진짜 이유는 전혀 다른 것 이었다.

 

에이, 설마!’

 

나는 양손으로 눈을 비비며 속으로 내가 지금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아니면 요즘 욕구 불만이었던 것인가 하며 마음을 진정시킨 뒤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례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예의상이라는 느낌으로 인사를 한 그녀는 머리칼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기 위해 수건을 머리 위로 넘겨 올리며 어깨를 쭉 젖혔다. 그러자 상대적으로 앞으로 내밀어진 가슴은 얇은 티셔츠에 달라붙으며 도드라지는 그것의 윤곽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안한 거냐! 아니, 물론 땀에 푹 젖었을 테니 다시 하고 싶진 않았겠지!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행동에 경각심이란 것이 없는 거냐! 타인의 시선이란 걸 좀 의식해라! 이 여자야!’

 

내 두 눈을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했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뭐냐 그 태도는 얼굴까지 빨개져서. ? , 어이 너 코피가!”

 

주르륵- 뚝 뚝.

 

역시 아직 지혈이 잘 안됐던 건가. 일단 이걸로......”

, 잠깐만요! 그렇게 가까이 다가오면!”

?”

아니, 그러니까 이제 나도 씻으러 들어가야 하고, 괜찮으니까 알아서 하게요!”

 

-!

 

나의 갑작스런 태도에 당황해하는 그녀를 방에 남겨둔 채 나는 코를 부여잡고 도망치듯 화장실에 들어왔다. 한사람이 간신히 서 있을만한 작은 화장실 내부는 방금 전 그녀의 몸에서 나던 향기의 수증기로 가득 차있었다.

, 그러고 보니 방금 전까지 여기서 저 여자애가!’

 

후두둑!

 

거울에 비친 코에서 피가 더욱 맹렬하게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란 나는 급히 휴지를 뭉쳐 코를 막았다.

 

하아, 내가 무슨 사춘기 남자애도 아니고.’

그래, 저런 거에 일일이 의식하지 않으면 되잖아! 나는 훌륭 하.......지는 않지만 일단은 성인이다. 나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저런 신민증에 잉크도 안 마른 것 같은 애한테 내가? 웃기지 마라! 내 이상형은 쭉쭉 빵빵하고 농염한 누님이다!

 

그런데 잠깐, 위에 속옷을 안 입었다는 것은, 설마 마찬가지로 아래쪽도.’

“......”

 

나는 샤워를 다 마친 후에도 한참동안 가만히 서서 어릴 적 배웠던, 알고 있는 동요란 동요는 전부 한 번씩 마음속으로 열창한 후에야 간신히 화장실을 나올 수 있었다.

 

너무 늦잖아. 대체 얼마나 씻어 대는 거냐.”

아하하, 코피가 잘 멈추질 않아서요.”

 

내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방 한쪽에 앉아있던 그녀가 나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나는 황급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대충 변명을 했다. 지금 그녀를 봤다간 화장실에서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대참사가 벌어질 것 같았다.

 

빨리 와서 앉아라.”

 

잠시 말이 없던 그녀는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약간 망설이며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 찾아냈는지 그녀의 손에 구급상자가 들려있는 것이 보였다.

 

어서!”

 

내가 머뭇거리자 못 참겠다는 듯이 그녀가 소리쳤다. 거부할 수 없음을 느낀 나는 엉거주춤 그녀의 앞에 앉아 시선이 엄한 곳에 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능숙하게 구급상자에서 약품들을 꺼낸 그녀는 내 얼굴에 난 생채기를 소독하기 시작했다.

 

. 해라

입 안에 난 상처까지 굳이 소독 할 필요는.”

“......”

.”

 

나는 잠시 저 구급상자에 입안을 소독할 수 있는 약품이 있었던가에 대해 고민에 빠졌지만 약을 묻힌 솜을 집은 집게가 입안에 들어온 이후였다. 비릿하고 쓴 맛이 입안에 금세 퍼졌다.

 

아깐, ..............”

? 방긍 머하그요?”

, 그러니까 아까! 그 건달자식이 날 때리려던 것을 네가 대신 막아 줬던 것 말이다! 물론,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난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 , 나를 위해 용기를 낸 것에는 예의상이지만 감사인사 정도는 하지!”

? 그흐, 그건!”

 

이 여자, 뭔가 굉장한 오해를 하고 있잖아! 그렇다고 내가 몸을 날린 건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건달을 위해서였습니다!’ 라고는 절대 말 못 하지만! 설마 방에 들어와서부터 얼굴을 빨갛게 하고 꼼지락거린 이유가 이 말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냐!

 

, 그러니까 아까! , 고마....... , 에잇! 멍청아! 약해 빠진 주제에 앞뒤 안 가리고 끼어드니까 이런 꼴이나 당하지! 분수를 모르는 바보 같으니라고!”

끄하학! 그러케 세게 누흐면 아팟! 살사알!”

우당탕-! 쿵쾅!

와르르-!

 

한바탕 난리를 치는 바람에 치워놓았던 물건들이 쏟아져 내렸다. 다시 방을 정리하고 마침내 이불에 몸을 눕힐 수 있던 것은 깊은 새벽이 된 후에서였다.

 

너무 좁아서 조금만 뒤척여도 황천 행 티켓 예약이겠는데.’

 

사실 말이 이불이지 내가 원래 쓰던 매트와 이불은 손님이라는 핑계를 대며 그녀가 차지해버렸고 매트 위로 조금이라도 올라오면 내일 아침 해를 보는 일은 없을 테니 알아서해.’ 라는 그녀의 독설을 들으며 나는 안 입는 옷들을 바닥에 대충 깔고 누웠다. 한명이 누워도 넉넉하지 않은 공간에, 특히 매트가 깔려있는 부분 의외의 공간은 매우 협소했기에 나는 잔뜩 움츠린 포즈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불에서 네 냄새가 잔뜩 나잖아.”

이런 곳에 사는 사람에게 이불세탁은 사치입니다. 정 그렇게 불쾌하다면 이불은, 그럼 내가.”

, 불쾌한건.......! ,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그냥 써주도록 하지!”

 

그녀가 이불을 끌어안으며 눕는 것을 확인한 나는 전등을 끈 뒤 어둠속을 더듬거리며 어린아이도 자다가 가위눌릴 것 같은 좁은 면적에 간신히 몸을 눕혔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아주 조금만 팔을 뻗어도 닿을 거리에 누워있는 그녀의 실루엣이 보였다.

 

누군가의 곁에서 잠에 드는 것이 얼마만이거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할머니와 살았던 때는 내방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아마 아주 어렸던 시절이 마지막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생각을 떠올릴 수 없었다. 옆에서 새근새근 들려오는 조용하고 기분 좋은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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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의 과정은 험난했씁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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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고사 크리티컬로 이번주는 휴재합니다!

세이브원고는 없다!

 

 

 

 

---------------------------------------------------------------------------------------------------------

 

 

“......”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괜히 나까지 긴장이 되어 오기 시작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녀의 숨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21세기 경성 차회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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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레 테이블을 내려치는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주인공 말이야! 나쁜 보스의 딸이 아니라 함께 싸우던 그 동료를 돌아 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영화 쪽의 이야기 인가!’

 

아까 본 영화엔 대립하던 조직보스의 딸 의외에도 러브라인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함께 정의를 위해 싸우던 여자 동료였다. 그 여자동료는 주인공에게 고난이 닥쳤을 때 옆에서 함께 싸워나가며 주인공에게 연정을 쌓았고 조직보스의 딸과 대립하며 극중 긴장감을 높였다. 하지만 결국 주인공이 선택한 것은 아버지를 돕는 것을 그만 두고 사랑을 선택한 조직보스의 딸 이었다.

 

아니 어떻게 함께 동고동락 하면서 힘이 되어준 여자를 내팽겨 치고 딴 여자를 선택 할 수가 있지!”

, 좀 진정해요.”

? 네 놈도 같은 상황이 된다면 그럴 생각인 거냐? 너라면 누구를 선택할 건데!”

? 아니 그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이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요!”

오호라 그래서 너도 그 나쁜 조직보스의 딸을 선택하겠다 이거지! 이 의리 없는 자식!”

, 잠깐 이건 좀 놓고!”

 

영화를 보고난 후에 인물들에게 감정을 이입시키는 타입이었던 건가! 우리가 한바탕 우당탕 거리며 자리에서 들썩거리자 주변 테이블의 사람들의 사람들이 이쪽을 의식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붙잡힌 멱살을 간신히 풀고 젓가락을 대신 여자애의 손에 쥐어주었다.

 

우동 불으니까 빨리 먹기나 해요!”

 

그녀는 나를 쏘아보며 구시렁거리긴 했지만 주변을 의식했는지 곧 우동을 먹는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우롱하이에는 알코올이 많이 들어가지 않는 덕분인지 다행히 그렇게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또 오십시오!”

 

나보다 빠른 속도로 우동을 먹어치우는 그녀 덕분에 나는 우동을 먹는 둥 마는 둥 해치우고 가게를 나왔다. 그러고 보니 먹는 거라면 사양치 않고 잘도 먹어대는군. 길거리는 조금 한산해졌고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슬슬 돌아가야겠지.’

 

가게에서 나오면서 본 시간은 11시가 막 넘어가고 있었다. 통금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지만 아직은 되돌아가기에 충분히 시간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나는 서두르지 않고 머릿속으로 왔던 길을 되짚어 보았다.

 

전 이제 집에 갈 건데 어떻게 하실 거 에요?”

뭘 말이지?”

그러니까 언제까지 계속 이렇게 따라오실 생각입니까.”

네가 집에 들어가는 순간까지인 것이 당연 한 거 아닌가? 물론 네놈 집 안에도 이미 도청 장치가 설치되었으니 딴 마음먹을 생각은 접는 것이 좋다!”

 

이대로 물어보지 않고 모른 채 집으로 돌아가 집에서 동영상 감상이라도 했다면 큰일 날 뻔 했다. 집이 무단 침입당한 채 도청장치까지 설치되었다는 것보다 그쪽이 더 걱정이 되는 것은 남자라면 누구나 그렇겠지.

 

그래서 우리 집까지 갔다가 돌아가는 것은 괜찮은 겁니까.”

이동수단은 있으니 네가 걱정할 필요 없다.”

아 예, 그러시겠죠.”

 

나는 짧은 한숨을 쉬고 아까 왔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워낙에 낡은 건물이라 기술만 있으면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그렇다 쳐도 도청기는 대체 어디다 숨긴 거지 침대 밑? 아냐, 그럼 잘 들리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고 책상 밑은 너무 빤하니까 아닐 가능성이 크다. 젠장, 찾기 전엔 오늘 잠은 다 잤군. 근데 뭔가 주위가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

 

으억!”

 

우당탕!

 

으으! , 뭐야!”

 

이런 저런 잡생각을 하면서 걷는 도중 나는 옆에서 갑자기 날아온 누군가와 부딪혀 엉켜 길바닥을 나뒹굴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다시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누군가 내 위를 누르며 쓰러져있었다.

 

어이! 형씨 미안하게 됐구만 낄낄.”

그러니까 우리가 좋게 좋게 이야기할 때 좀 이야기 좀 들으쇼. 지나가는 사람한테 피해까지 주면서 이게 뭐요. ?”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니 누가 봐도 건달로 보이는 양복을 입은 남성 두 명이 서 있었다.

 

으으

 

내 위에 쓰러져 있던 남성이 신음을 내며 몸을 일으켜 세웠고 나도 얼얼한 팔꿈치를 주무르며 일어섰다.

 

여보!”

아빠!”

 

건달들이 서있는 너머로 셔터가 반쯤 내려진 가게가 보였다. 그리고 그 입구에 중년의 여성과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딸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었다.

 

여기서 장사를 하려면 제대로 세금을 내시라니까아.”

나는 제대로 국가에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한테 왜 돈을 줘야 한단 말입니까.”

국가? 푸하핫! 국가라고? 이 땅에 대체 어떤 국가가 세워져 있다는 말이지? 말해봐! 주인 양반! 자네가 세금을 내고 있는 국가는 대체 무슨 국가야? 난 평생 살면서 들어 본 적이 없어!”

, 계속 이러시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하아, 이래서 가게 주인이 바뀌면 귀찮다니까. 말귀를 못 알아먹어. 주인 양반. 어제도 봤잖아? 경찰이 와서 결국 뭘 해줬는데? 우리가 모시는 사람이 누군지 몰라서 그래? 병신 같은 반도의 경찰은 손댈 권한도 없는 본토의 일본인인데다가 이곳 관할 서장과는 이야기가 끝난 사이라 이거야! 여기선 우리가 뭘 하든 제지할 사람은 없다고!”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파악이 된다. 인터넷에선 많이 봤던 상황이지만 직접 보니 새삼 신기하네.

 

어이 형씨, 뭘 그렇게 쳐다봐? 볼일 없으면 꺼져!”

 

내가 엉거주춤 선채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 건달 한명이 내게 소리쳤다.

 

, 예 실례했습니다.”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내가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건 단순히 내가 힘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근본적인 이야기다. 정치인이 비리를 저지르고 기업은 소비자를 우롱하고 경찰과 범죄자가 손을 잡고. 이러한 일들이 이제는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는 이 땅에선 불의를 못 본 척 피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일이 된 것이다. 남을 도우려다 내가 입는 피해는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도 보상해주지도 않는다.

 

주인장. 좀 주위를 둘러 봐봐. 다른 가게들을 좀 보라고. 다들 이 곳의 룰에 적응해서 불평불만 없이 살아가잖아. 당신 같은 사람들은 우리들이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 하지만 가게를 내느라 통장에는 빛뿐이고 지금 내고 있는 세금만으로도 굉장한 부담이라 생활이 어려워서 직원도 못 두고 딸아이까지 일을 하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퍼억-!

 

가게주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건달 한명이 가게주인의 배를 걷어찼다. 가게주인은 다시 길바닥을 굴렀고 신음소리를 내며 이번엔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우리 아빠한테 무슨 짓이야!”

어어! 이년이!”

 

자신의 아버지가 얻어맞는 것을 본 딸이 건달에게 달려들었지만 오히려 화만 돋울 뿐 이었다. 황급히 같이 있던 가게주인의 아내가 딸을 말렸지만 늦었다.

 

찌지익-!

 

건달은 자신에게 달려든 가게주인의 딸을 밀쳐냈지만 딸이 잡고 있던 양복의 주머니가 함께 찢어졌다.

 

이 썅년이 봐줬더니!”

 

짜악!

 

자신의 양복이 찢어진 것을 본 건달은 손을 들어 힘껏 가게주인 딸의 뺨을 후려쳤다. 가게주인 딸의 얼굴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고 코피가 흘렀다. 가게주인의 아내가 건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며 매달렸지만 건달의 힘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건달은 쓰러져 있는 가게주인 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다시 뺨을 후리기 위해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잠깐! 그만두세요!”

 

나는 나도 모르게 건달의 팔을 붙잡았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분명 방금 전까지 나는 일개 관망자이자 여기서 벌어지는 일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에 몸을 던져 끼어들었다. 어째서지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인데.

 

씨바 넌 뭐냐? 죽으려고 환장했나.”

 

건달은 고개를 천천히 내 쪽으로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건달의 눈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건달은 잡고 있던 멱살을 놓고 주먹을 말아 쥐어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나는 완전히 얼어붙은 채 입술만 뻐금 거렸다.

 

허리 숙여!”

 

그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자동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내 머리위로 묵직한 주먹이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직후 누가 내 허리를 짚고 뛰어오르는 느낌이 났고 고개를 다시 든 내가 본 것은 주먹을 휘두른 건달의 안면에 무릎이 꽂히고 있는 장면이었다.

 

뻐억!

 

엄청난 소리와 함께 건달이 저 멀리 나가 떨어져 뒹굴었다. 그리고 동시에 굉장히 높은 높이까지 도약했던 것이 분명한 그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검은 고양이처럼 사뿐 착지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긴 흑발이 몸동작에 맞추어 찰랑거렸다.

 

, 넌 또 뭐야!”

 

자신의 동료가 맥없이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본 다른 건달은 놀란 표정으로 멀뚱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허리춤에서 급히 무언가를 꺼내어 들었다. 그것은 성인 손가락 길이 정도의 날이 달린 나이프였다.

 

이 새끼들 가만 안 둔다!”

 

나이프를 집어든 건달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내가 신경 쓰이는 것은 건달이 들고 있는 나이프가 아니라 칼을 보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그녀 쪽 이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천천히 긴 흑발을 질끈 묶었다.

 

이야아!”

 

건달이 직선으로 나이프를 찌르며 달려들었지만 그녀는 가볍게 옆으로 비켜 피했다. 건달은 다시 자세를 고쳐 잡고 나이프를 머리위로 들어 올려 아래로 휘둘렀지만 그녀의 다리가 반 박자 빠르게 나이프를 쥔 손을 정확히 걷어 차 올렸고 건달은 비명과 함께 나이프를 놓쳐버렸다.

 

으으! 이년이!”

 

나이프를 놓친 건달은 욕을 해대며 멈추지 않고 주먹을 마구 휘둘렀지만 그녀는 능숙하게 경쾌한 스탭을 밟으며 좌우로 몸을 비틀며 숙여 피했고 주먹은 허공을 가를 뿐 이었다.

 

시발! 이 좆만 한 년이!”

 

당황한 건달이 다시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 순간 그녀는 왼쪽 앞으로 몸을 숙이며 오른팔을 뻗어 정확히 건달의 턱에 꽂아 넣었다. 완벽한 크로스 카운터였다.

 

따악!

 

크고 찰진 소리와 함께 턱이 돌아간 건달의 눈이 뒤집어 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나무자루가 쓰러지듯 앞으로 고꾸라졌다.

 

으으으-.”

 

순식간에 건장한 남성 두 명이 길바닥을 나뒹굴었다. 나는 그저 입을 벌린 채 감탄 할 수박에 없었다. 설마 이정도일 줄이야. 솔직히 상상 이상이었다. 나는 괜스레 오늘 하루 동안 내가 뭔가 그녀에게 잘못한 것은 없었는가 하고 생각했다.

 

저기.”

 

가게주인의 목소리였다. 가게주인은 걷어차인 곳이 조금은 괜찮아 졌는지 아내와 딸의 부축을 받으면서 서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니 오히려 표정은 더욱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자신들에게 수금하러온 건달 둘을 자신들과 관계가 있는 사이든 아니든 저렇게 만들어 놨으니 어떤 식으로든지 불똥이 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저런 눈빛을 보내는 것이 당연하다. 감사의 인사를 받으려고 한 행동은 아니지만 입맛이 씁쓸했다.

 

이건 우리가 이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발생한 문제니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쓰러져 있는 건달들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우리라니, 나를 같이 엮지 마라.”

이건 제가 이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발생한 문제니 신경 쓰지 마세요.”

 

팔짱을 낀 채 퉁명스럽게 이야기하는 그녀를 나는 한번 슥 바라보고 다시 말을 정정했다. 어쨌든 휘말린 원인은 나 때문이고 부끄럽지만 도움까지 받았으니 할 말이 없다. 그래, 믿는 구석도 없이 오지랖 부린 제가 잘못했습니다.

 

낄낄 시발새끼들 니들 이제 다 뒤졌어. 으윽. 우리가 손수 장사 접게 해줄게! 낄낄.”

 

어느새 정신을 차렸는지 안면에 무릎을 받았던 건달이 일어나 앉아 한손으로는 터져 나오는 피를 막고 한손으로는 화면이 켜져 있는 휴대폰을 흔들어 보이면서 웃어댔다.

 

, 저기 저 사람들 저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방금 들으셨잖아요! 이건 저 사람들이 맘대로 한 짓이지 저희는 관계없습니다!”

 

가게주인은 깜짝 놀라 사정하며 이야기했지만 건달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저씨! 일단 가게 닫고 돌아가요! 여기 계속 있다간 정말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나는 가게주인에게 다급하게 이야기했다. 일단 자리를 뜨는 것이 급선무였다. 곧 저 건달들의 동료들이 달려올 것이 분명했다.

 

, 너 이 자식 왜 남의 일에 끼어들어서 난리야!”

! , 이게 무슨!”

네놈들이 상관 말고 지나갔으면 이렇게 까지 되진 않았잖아!”

 

내 말을 들은 가게주인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지더니 갑자기 달려들어 내 멱살을 조르며 고함을 질렀다.

 

, 잠깐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요!”

 

아니, 오히려 이 가게주인의 선택은 가게주인에게 옳을 수도 있다. 이대로 나를 붙잡고 있으면 건달의 동료들이 도착했을 때 이 상황에 대한 변명거리로 쓸 수 있고 오히려 우리가 건달들을 건드리고 도망치려는 것을 가게 주인이 붙잡고 있어준 상황이 되는 것 이다. 그럼 건달들은 복수의 대상이 명확해질 것이고 잘 되면 가게주인은 피해 없이 이번 일을 지나갈 수도 있겠지. 나는 실소가 나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이 가게주인을 비난 할 수 없었다. 이 가게주인이 잘못된 것이 아니니까. 나는 멱살을 잡힌 것과는 관계없이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봐! 그거 놓지 못해!”

낄낄 이미 늦었어!”

 

상황을 알아차린 그녀가 다급히 가게주인을 팔을 잡고 말렸지만 이미 너무 늦고 말았다. 시끄러운 발소리와 함께 각양각색의 양복을 입은 이십여 명의 사내들이 우르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손에는 갖가지 연장들이 들려있었고 순식간에 우리를 빙 둘러쌌다. 하지만 그들은 곧바로 덮쳐오지 않았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했다.

 

저벅저벅

 

이윽고 발소리와 함께 우리를 둘러싼 건달들의 일부가 물이 갈라지듯 비켜서자 비열한 인상의 사내가 담배를 꼬나물고 나타났다. 그는 이미 한잔 했는지 거나하게 취한 모습이었다.

 

씨바, 누가 우리 애들 건드렸냐?”

, 형님! , 저년 입니다!”

넌 씨바 쪽팔리게 쳐 맞았으면 닥치고 있어 새끼야. 그리고 뭐? 저 여자애한테 맞았다고? 구라를 쳐도 시발 어휴 이 새끼가.”

 

건달들 중 두목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던 건달을 마구 걷어찼다.

 

! ! 아니, 형님 진짜입니다!”

그게 진짜면 시발 넌 더 맞아야 돼.”

 

그 남자는 더욱 사정없이 부하 건달을 걷어차다가 그만 두고선 불현듯 이 쪽을 돌아봤다.

 

, 너 그러고 보니까 와꾸 좀 괜찮다?”

 

그 남자는 발을 돌려 부하가 가리킨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선 찬찬히 그녀의 얼굴과 몸을 위아래로 끈적끈적하게 훑어보며 입맛을 다셨다.

 

몇 살이야? 아직 어린 것 같은데. 오빠가 재밌게 해줄게 오빠랑 놀래? , 가게 연락해서 보스 모르게 룸 하나 비워 놓으라고 해라.”

 

그 남자는 그녀의 가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곁에 있던 부하에게 손을 까딱 거리며 명령했다. 그 남자의 눈빛과 행동을 본 그녀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져갔다.

 

야 씨, 오빠가 너랑 놀려고 노력 하는 거 보이지? 오늘 밤새 재밌게 해 줄게.”

 

그 남자는 천천히 그녀에게 걸어가 손으로 그녀의 턱 끝을 잡고 얼굴을 이리저리 돌렸다.

 

이열, 이렇게 보니까 생각보다 더 반반한데? 이 답답한 모자 좀 벗고 다니지 그래? 얼굴 아깝게 시리.”

형님 너무 어린 거 아닙니까? 하하하. 아직 애지 말입니다.”

형님 어린 여자 너무 좋아 하십니다. 그러다 철컹철컹 하십니다.”

에이, 개새끼들 말을 해도 꼭 이쁘게들 한다. 형님 잡혀 들어가는 거 그렇게 보고 싶냐. 하하하.”

 

분위기를 띄우려는 것인지 부하들이 농담을 걸자 그 남자는 즐거워 졌는지 건들거리며 웃어 제겼다.

 

놔라, 죽는다.”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고 조용히 말했다.

 

뭐라고?”

오오오-.”

그년 성깔 있지 말입니다 형님. 하하하.”

 

그녀의 말을 들은 건달들은 휘파람과 함께 박수를 치며 웃었다.

 

앙칼진 얼굴이 매력이 있네! 이런 센 척 하는 년들이 의외로 또 남자한테 거칠게 당하는 걸 좋아한다니까!”

형님 아직 애인데 너무 그러지 마십쇼. 하하! 전에 이런 식으로 데려온 그년도 형님 때문에 완전히 망가졌잖습니까!”

형님 너무 악취미 이십니다!”

 

부하 건달들은 남자의 비위를 맞추며 그녀에게 온갖 음담패설을 던졌다.

 

이 손 다시는 못쓰게 불구로 만들어 줄 수도 있으니까 놓으라고 했다.”

 

그녀는 인내가 한계에 달했는지 이를 악물고 다시 이야기했다. 건달들은 다시 한바탕 웃어댔지만 두목으로 보이는 남자는 기분이 상했는지 얼굴이 굳어져갔다. 부하들도 들도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곧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이 시발년이 이쁘다 이쁘다 해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그 남자는 그녀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대로 팔을 치켜 올렸다. 위험하다! 그녀 쪽이 아니라 저 남자 쪽이 위험하다! 저걸 그녀가 그대로 맞아줄 리가 없다. 내 머릿속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녀의 주먹이 저 남자의 턱에 작렬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그리고 두목이 나뒹구는 것을 본 건달들은 달려들겠지. 제 아무리 그녀라고 하지만 이 많은, 그것도 연장을 든 건달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 잠깐!”

, ? 이 새끼는 또 뭐야?”

 

나는 거의 몸을 날리다 시피해서 남자의 팔을 붙들었다. 하루에 두 번이나 여자가 뺨을 맞으려는 것을 막아서다니 정의의 사도라도 된 기분이다.

 

저 건달들은 제가 그렇게 만든 겁니다. 이 여자애와는 관계없는 일이니 그만 보내 주세요.”

 

뒤는 생각하지 않고 뛰어들었기 때문에 내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고 앞으로 5년간은 매일 밤 이불을 걷어 찰 수밖에 없게 만드는 진부한 대사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 너 이 새끼 뭐, 저 여자애의 이거라도 되는 거냐?”

남자는 새끼손가락을 까딱이면서 씩 웃었다.

 

,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퍼억-!

 

갑자기 아랫배에 묵직한 느낌이 전해졌고 곧바로 배가 뒤틀리는 것 같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방금 가게에서 먹었던 우동이 목구멍으로 솟구쳤다.

 

! !”

 

처음 맛보는 엄청난 고통에 나는 소리조차 제대로 못 지르고 배를 감싼 채 꺽꺽 대는 소리를 내었다. 창자가 마디마디 끊기는 것 같은, 내장이 들어내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 새끼가 어디서 본건 있어가지고 시발 니가 뭐 백마 탄 왕자냐 이 새끼야?”

 

남자는 내 멱살을 붙잡고 주먹으로 내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세 대가 넘어갈 쯤부터 내 코에서 나오는 것인지 입에서 나오는 것인지 모를 피가 후드득 후드득 아스팔트에 흩뿌려졌다.

 

, -.”

 

나를 때리던 남자가 내 멱살을 놓자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굴은 이미 감각이 없고 코와 입에서 흘러나온 피가 뚝뚝 떨어지며 바닥을 적셨다. 머릿속은 멍하고 입에서는 비릿한 맛이 났다. 나를 두들겨 패던 남자는 조금 분이 풀렸는지 손목을 흔들면서 욕지거리를 하며 나에게서 돌아섰다.

 

후우, 후우, 이 새끼가 사람 빡치......”

 

쩌억-!

 

하지만 그 남자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그 남자가 돌아서는 순간 얼굴에 그녀의 다리가 굉장한 소리와 함께 작렬한 것 이었다. 가볍게 뛰어올라 공중에서 540도를 턴하여 발로 안면을 가격하는 완벽한 뒤 후리기였다. 그 남자의 입에서 이빨로 보이는 것 몇 개가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건달들은 쓰러져있는 두목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다만 아까 도움을 요청했던 건달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 뿐 이었다.

 

이 개년이!”

 

정신을 차린 건달들이 일제히 연장을 치켜들고 달려들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녀는 건달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고개를 연신 이리저리 돌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나는 잊고 있던 것을 그제 서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가 바라본 건물의 옥상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까 낮에 본 편의점 앞 건물 옥상의 그것과 같은 형상이었다. 그리고 골목 한쪽에 마찬가지로 본적이 있는 봉고차가 주차 되어 있는 것도 눈치 챌 수 있었다. 시간을 끌려고 계속 참고 있었던 건가!

 

제기랄!’

 

그녀가 천천히 등허리로 손을 가져가는 것이 보였다. 혹시나 하긴 했지만 역시 총 가지고 있었던 거냐! 나는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한쪽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가게주인과 그 가족들에게도 빨리 엎드리라고 손짓을 했다.

 

이야아아!”

 

일순 건달들이 연장을 휘두르며 달려들기 시작했고 그녀 또한 빠르게 총을 뽑는 동작을 취했다. 하지만 건달들을 멈추게 한 것은 그녀나 그녀의 동료들이 쏜 총이 아닌 전혀 의외의 것 이었다.

 

당장 멈추세요!”

 

단호한 목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는 전혀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함부로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들어 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으엑!’

 

짧지만 생기있는 단발머리, 네온 사인 간판의 불빛에 맞춰 반짝거리고 있는 큰 눈동자, 자신감 있는 미소를 한껏 머금고 있는 입술, 몸에 딱들어 맞는 새까만 정장과 흰색 블라우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큰 가슴 덕분에 두드러지는 몸매 라인.

 

꼼짝 말고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으세요!”

 

당당하게 양손을 허리에 올린 채 호령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공안 조사관 아라세카이 히토미였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녀의 주위에는 새까만 정장을 입은 험악한 인상의 건장한 사내 5명이 위압감 있게 둘러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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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 연재는  휴재 가능성이 강력한 것으로......

 

중간고사 1주일 남았쪙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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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럭 부스럭-

 

나는 익숙한 편의점 로고가 그려진 비닐봉투에서 삼각 김밥을 꺼냈다. 삼각 김밥을 손에 든채 괜스레 올려다 본 하늘은 흰색 뭉게구름이 새파란 하늘을 도화지삼아 드문드문 그려져 마치 멈춰있는 듯 했다.

 

“......”

“......”

 

내가....... 아니, 우리가 앉아 있는 곳은 편의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원의 벤치였다. 말이 좋아 공원이지 옹졸하다 싶을 정도의 크기에 한참은 관리 되지 않은 채 방치 되어 있는 미끄럼틀과 그네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공원 이라고 하기에도, 놀이터라고 하기에도 힘든 이름조차 없는 쉼터였다. 그나마 동네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덕분에 삭막한 분위기까지는 아닌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감시하겠다고는 했지만 딱히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옆에 붙어 있을 뿐이라 나는 일단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을 가질 적당한 장소로 생각한 곳이 이곳 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욱 어색한 공기는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여전히 무더운 날씨 덕에 금방 상할 것이 분명한 삼각 김밥을 나는 일단 먹기로 생각하고 포장을 벗긴 뒤 입에 넣어 우물거렸지만 도통 목구멍으로 넘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나 드실래요?”

“......”

 

당연하다는 듯이 가볍게 무시하는군. 아까 전, 내가 공원에 도착해 적당한 벤치에 앉자 같이 따라온 그녀 또한 내가 앉은 벤치에 앉았다. 하지만 일행이라기엔 약간 떨어진,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엔 또 가까운, 애매하게 거리감 있는 자리를 유지했고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이고 무서울 정도로 정면을 쏘아보고 있었다.

 

정말 계속 그러고 있을 거 에요? 뭐 계획이라도 없습니까.”

“......”

 

여전히 대답을 하지는 않고 있었지만 내 말을 듣자 일순 빠르게 복잡한 표정이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것을 숨기지는 못했다.

 

설마 자기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라는 것인가.’

 

역시 원래라면 계속 내가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미행하는 것이 계획 이었지만 도중에 급작스럽게 계획을 수정하기로 결정하였고 나를 직접 감시할 역할로 내 옆에 앉아 있는 이 여자애가 선정 되었다는 것이겠지. , 어찌 됐든 내가 관계되어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에는 이 여자애가 원인인 것이 분명하니까 책임이라는 것 인가. 나는 다 먹은 삼각 김밥의 포장지를 봉투에 다시 넣으며 쓰레기통을 찾는 척 공원 내부와 밖을 두리번 거려봤지만 이 여자애가 속해있는 조직이라고 의심 될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거나 아니면 근처에서 무선연락만 받고 있는 것인가.’

 

사아아아-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흔들리고 부딪히며 시원한 소리를 냈다. 함께 실려 온 시원한 공기가 무겁게 깔려있던 더운 공기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바람 때문인지는 몰라도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방금 전보다 조금 더 빠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햇빛이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 마다 그 사이로 잘게 부서지며 쏟아져 내렸다.

 

그러고 보니 이런 게 얼마만이지.’

 

최근 몇 년간 집 밖으로 나온 것 이라곤 편의점에 출근하거나 뭔가 몇 번 볼일이 있어 외출 했던 것 외에는 전혀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심지어 생필품조차도 편의점에서 출근 겸 해결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주말이 되면 집에 틀어박혀서 하루 종일 노트북으로 인터넷만 해대기 바빴다.

 

와아-

 

아이들이 뛰노는 함성 소리가 조금 멀리서 바람소리에 섞여 은은하게 들려왔다. 나는 벤치에 등을 기대고 힘을 풀자 지금까지 잔뜩 들어있던 긴장도 함께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상황에서 여유라니.’

 

조금 아이러니 했지만 살랑거리는 햇빛에 시원한 바람, 거기다 배에서 적당히 느껴지는 포만감이 기분 좋은 나른함을 느끼게 했다. 방금 전까지 아프도록 복잡하게 돌아가던 머리도 이미 생각을 그만둔 채 멈추어 있었다.

 

눈이......’

 

조금씩 천천히 깜빡 거리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져 견딜 수 없게 느껴졌다. 방금 전 까지 눈에 들어오던 공원의 풍경은 어느새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함성소리도 점점 불규칙적으로 끊기며 들려왔다. 몸이 젖은 솜처럼 무겁고 목 뒷덜미가 나른했다.

좋은 향기......’

 

분명 어디선가 맡아 본적 있는 향기였다. 그것도 최근에. 나는 힘겹게 무거워진 머리를 굴려보았다. 어디서 맡아 본 것일까. 하지만 목과 뺨에 느껴지는 기분 좋고 따듯한 포근함에 이내 다시 나도 모르게 다시 생각이 멈추었다.

 

까르륵 깔깔! 하하하-!

 

다시 나를 의식하게 한 것은 귓가를 울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였다. 아까와는 달리 바로 앞에서 시끌시끌하게 들려왔고 그와 함께 무거웠던 내 머릿속도 조금씩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귓가에 들려오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명확히 구분이 될 정도로 정신이 들자 나는 내가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어느새 잠들어 버린 것인가. 하지만 굉장히 편안하게 잠들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은 더 이 좋은 기분의 여운을 만끽하고 싶었지만 주변의 웅성거림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떴다 떴다!”

일어났다~!”

우우우우~!”

 

눈에 들어온 것은 어느새 노을 진 하늘과 아까까지만 해도 멀리서 뛰어놀고 있던 아이들이 모두 모여 벤치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 둘러싼 채 나를 쳐다보면서 자기들 끼리 웃고 떠드는 광경이었다. 충분히 이상한 광경이었지만 이것보다 더 이상한 것은 아이들이 서 있는 각도였다.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내 눈에 비친 세상의 각도였다. 마치 삐딱하게 기운 것이 고개를 옆으로 꺾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각도였다. 게다가 아까부터 계속 내 뺨과 목덜미에서 느껴지고 있는 이 따듯한 포근함은.......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엄청난 속도로 같은 말을 주문 외우듯이 외쳤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바로 세웠고 내 뺨은 얼마나 따듯하게 덥혀져 있었는지 뺨을 스치는 바람이 차갑게까지 느껴졌다. 나는 차마 돌아가지 않는 목을 억지로 돌려 내가 방금 전까지 내가 기대고 있던 곳을 바라봤다.

 

“......”

 

온 세상을 빨갛게 물들이며 비치고 있는 석양 속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달아오른 얼굴, 찡그리지도 뜨지도 못한 채 부들부들 거리며 눈물이 조금 맺혀있는 눈, 얼마나 잘근 잘근 씹었는지 자국이 나려고 하는 빨간 입술. 꽉 쥐고 있는 주먹과 달리 꼿꼿이 펴고 있는 허리.

 

죽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머리가 생각을 멈췄다.

 

커플이다 커플!”

이런데서 저런 짓 하면 경찰아저씨가 잡아간댔어!”

우우~ 얼레리꼴레리!”

 

내가 상황을 파악하자 구경하고 있던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놀려대기 시작했고 당황한 나는 엉거주춤 일어서서 아이들과 옆에 앉아있는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가 꽉 쥐고 있는 주먹이 미세하게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고 나는 정신이 확 들었다.

이 녀석들! 그만 하지 못해!”

와하하하!”

우우우!”

 

내가 짐짓 화난 듯 달려드는 척 하자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도망갔다. 하지만 금새다시 멀찌감치 모여서 이쪽을 바라보며 웃어댔다.

 

“......?”

, ?”

언제 까지 이런데 계속 앉아 있을 생각이냐고!”

 

버럭 지르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솔직히 주먹이 날아오리라 생각했지만 다행히 아이들이 보이는 앞이라 그런 것인지 주먹대신 엄청나게 무서운 눈빛이 날아왔다.

 

, 시간도 그렇고 그럼 이만 갈까요.”

 

그녀는 당연하다는 소리를 한다는 듯이 다시 한 번 나를 쏘아보고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우리 둘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등 뒤로 한 채 빠른 걸음으로 공원에서 빠져나왔다.

 

일단 걷고는 있지만 이제 대체 뭘 하면 좋지?’

 

공원에 도착할 때 까지만 해도 나와 나란히 걷던 여자애는 이제 완전히 뒤에 떨어져서 걷고 있었고 내 등은 따가운 시선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떻게든 시간을 보낼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고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며 걷고 있던 그 때 눈앞에 여러 가지 건물 들이 줄지어 서있는 대로가 눈에 들어왔다.

 

시계가 없어 정확한 시간을 알 길이 없지만 슬슬 해가 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6~7시 쯤 된 것 같은데. 일단 뭐든 할 게 있겠지. 슬슬 저녁식사 시간이기도 하고.’

 

이 동네에 살게 된 이후로 오며가며 보기만 했던 곳이기 때문에 정확히 뭐가 있을지 몰랐지만 아무 대책 없이 길을 걷는 것보단 나아보였다. 일단 내가 걷는 대로 그 여자애는 따라오고 있었고 딱히 별 말을 하지는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 나는 그대로 대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생각 보다 괜찮잖아.’

 

번화가는 대로를 따라 2~300m 정도 이어져 있었고 건물들에는 쇼핑몰이나 할인마트, 가전용품전문점 등은 물론 건물 뒤쪽 골목길엔 술집이나 유흥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나는 북적이는 사람들을 헤치고 대로 쪽을 걸으며 시간을 때울 적당한 장소가 있는지 물색 했다.

 

국내 최대 통신사 Nofe 텔레콤 경품추첨 행사입니다! 부담가지지 말고 한 번씩 해 보세요~! 1등은 무려 환상의 섬 오키나와 23일 여행권입니다!”

 

길거리는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과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까지 몰려서 혼잡했다. 내 뒤를 따라오는 그 여자애도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인 것 같았다.

 

자자! 부담가지지 마시고 한 번씩들 해보세요!”

어차피 당첨이 된다고 해도 말도 안 되는 약정 같은 게 있겠지.’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대형통신사인 Nofe 텔레콤은 한 기업이 시장을 독점하는 것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기업 이었다. 실질적으로 사회생활에 필수불가결인 휴대전화 통신서비스를 폭리에 가까운 수준으로 제공하고 있었지만 마땅히 대체할 통신사가 없는 사람들로선 울며 겨자 먹기로 사용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사실 이 반도라는 땅 위에 제대로 된 기업이란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지만.

거기 젊은 오빠! 이벤트 참여하고 가세요!”

, ?”

 

젠장. 나도 모르게 눈을 마주쳤고 통신사 티셔츠를 입고 호객행위를 하던 여성 직원이 나에게 달라붙었다.

 

, 잠깐 팔짱은!”

자자! 오키나와 여행권이 기다리고 있다구요~ 2인 동반이니까 혹시라도 당첨되면 저를 잊지 마세요?”

저기, 알았으니까 이것 좀!”

“......뭘 알았다고?”

 

흠칫.

 

뒤에서 나지막이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머, 여자친구분이 계셨나요? 그것도 모르고 실례했네요!”

?”

, 그런 사이 아니......!”

자자, 남자친구 분은 어서 이쪽으로!”

 

이 직원 얼마나 마이페이스인 거냐! 일단 덕분에 넘어가긴 했지만.

 

, 이 다트를 던져서 돌아가는 돌림판을 맞추면 됩니다! 기회는 단 한번!”

 

돌림판엔 갖가지 경품들이 적혀있었다. 물론 꽝이라고 적혀있는 칸이 제일 크고 오키나와는 알림판이 돌아가기 시작하자마자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작았지만. 그래도 막상 던지려고 하니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와 약간의 긴장감이 들어왔다. 나는 살짝 쉼 호흡을 하고 오른손에 다트를 쥔 채 앞뒤로 천천히 흔들다 타이밍에 맞춰 돌림판을 향해 다트를 힘껏 던졌다.

 

!

 

~ 아쉽지만 꽝이네요! 하지만 참가상이 있으니 너무 아쉬워하지는 마시고요! 여기 이 종이에 간단한 설문조사와 핸드폰 번호를 적어주시고 밑에 정보제공 동의서에 꼭! 싸인 해 주세요!”

 

내가 던진 다트는 너무나 정직하게도 꽝이라는 글씨 한가운데를 정확히 맞추었고 직원의 국어책을 읽는 것 같은 위로와 함께 설문조사지라고 적혀있는 종이와 참가 상 스티커가 붙어있는 막대사탕을 건 내 받았다.

 

,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일순간의 도박과 같은 설렘에 내 개인정보를 팔아 치운 셈 인건가. 물론 순순히 넘겨줄 생각은 없지. 나도 전혀 모르는 휴대폰 번호를 적어주마!’

뒤에 계신 여성분도 한번 해보세요!”

 

내가 대충 휘갈겨 쓴 설문지를 건 내 받자 직원은 태세가 돌변하듯 나에게서 그 여자애에게로 달라붙었다.

 

저기, !”

어차피 무료니까 부담 가지지 마시고!”

 

능숙한 직원의 손에 이끌려 돌림판 앞에선 그 여자애의 손에는 어느새 다트가 들려있었다.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긴 하지만 거절 하지 않은 것을 보니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구만.

 

~! 갑니다!”

 

돌림판이 돌아가기 시작했고 그녀는 다트를 든손을 들어 돌림판을 조준했다. 다트에 올바른 자세가 어떤 것 인지 나는 잘 알지는 못하지만 돌림판을 노려보고 있는 그녀는 뭔가 굉장히 안정적이고 익숙하다는 느낌이었다.

 

-!

!

 

다트는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돌림판에 정확히 꽂혔다. 돌림판이 점점 속도를 잃고 서서히 멈추어 가자 다트가 꽂혀있는 칸이 보였다.

 

축하드립니다! 2등 당첨! 입니다! 2등 상품은~ 영화 관람권 2매 입니다!”

 

다트는 오키나와가 상품인 1등 칸과 몇 센티 떨어진 2등 칸에 정확히 꽂혀있었다.

 

정말로 오키나와를 맞출 생각이었던 건가.’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 보면서 나는 살짝 소름끼쳤다.

 

! 여기 설문조사지와 영화 관람권 두 장입니다! , ! 정말 죄송하지만 영화 관람권에 살짝 문제가 있는데요......!”

 

-! 빠앙!

 

어느새 해가 완전히 저물었고 대로는 라이트를 켠 자동차들로 가득 찼다. 가로등에는 불이 들어왔고 번화가는 주말 밤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더 불어난 느낌이었다.

 

“......”

“......”

 

그녀와 나는 커다란 영화 광고가 걸린 영화관을 올려다보며 수많은 인파 속에서 멀뚱히 서있었다.

 

이게 무슨 살짝 문제냐!’

 

경품으로 건 내 받은 영화 관람권은 영화가 지정되어있었고 그 영화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Nofe 텔레콤에서 투자하는 영화였다. 이것 까지는 별 상관없지만 진짜 문제는 이 관람권의 기한이 오늘 자정까지라는 것 이었고 통금시간 덕분에 실제적으로 시간상 지금 당장 사용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 이었다.

거기다 멜로 영화라니.’

 

관람권에 적혀져 있는 영화는 최근 개봉한 전형적인 멜로 영화였고 나름 유명한 배우들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 영화였다. 하지만 최근 반도의 영화시장이 그렇듯 영화는 부진한 흥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영화산업은 소수의 부유한 구매자들만으로도 시장이 돌아가는 사치품과 달리 구매자의 절대다수인 일반시민들의 구매가 없으면 수익을 내기 힘들다. 하지만 반도에 살고 있는 절대다수는 영화와 같은 문화생활에 지출을 할 여유 따위는 없었으며 설사 여윳돈이 생기더라도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음주가무 따위에나 돈을 쏟을 뿐 이었다.

 

어떻게든 홍보해 보려고 티켓을 푼 건가.’

 

나는 극장 전광판에 흘러나오는 영화 시간을 체크했다. 관람권에 적힌 영화는 곧 상영 시작이었다.

 

정말 볼 겁니까.”

“......”

이 영화 그렇게 재미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무엇보다 멜로영화라니......”

버리면....... 잖아.”

?”

아깝잖아! 버리면!”

, 그렇긴 하죠. 그럼 들어갈까요.”

 

버럭 지르는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대답을 했다. 정말로 아까부터 계속 그렇게 갑자기 소리를 질러대면 진짜 언젠가는 심장이 멈출지도 모를 일이다.

 

우웅- 우우웅-

 

[본 영화 관람에 앞서- 비상 대피통로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영화관 안은 생각은 했지만 주말과 어울리지 않게 한산했다. 드문드문 젊은 커플들이 앉아 있을 뿐이었고 덕분에 상영 직전에 들어왔지만 나쁘지 않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와삭 와삭-

 

내 옆자리에 앉은 그녀는 카라멜 팝콘이 마음에 들었는지 팝콘 통을 아예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열심히 손으로 집어서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산 건데 같이 먹자고 말이라도 해주지.’

 

우리는 영화관으로 들어와 영화 관람권을 티켓으로 바꾼 뒤 잠시 앉아 상영시간을 기다렸었고 마침 맞은 편에 있던 매점의 팝콘기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을 나는 차마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쪼르륵-

 

나는 애꿎은 콜라만 들이켰지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게 그녀는 이미 나는 안중에도 없이 영화관의 스크린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영화관에 들어온 이후로 그녀는 더욱 말 수가 줄어들어있었다. 아니, 줄어들었다고 하기 보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마치 영화관에 처음 와 본 사람 같이 두리번거리며 나를 졸졸 따라올 뿐이었다. 덕분에 티케팅부터 상영관과 좌석을 찾는 것 까지 전부 내가 해결해야 했다.

나도 중학생 때 이후로 영화관은 처음이지만.’

 

광고가 끝나고 암전과 함께 영화가 시작했다. 영화의 내용은 평범한 남자 주인공이 우연히 정의로운 사람들과 악의 조직의 싸움에 휘말리게 되어 정의로운 사람들과 함께 싸우던 도중 악의 조직 보스의 딸과 사랑을 하게 되고 우여 곡절 끝에 헤어지게 되지만 결국엔 다시 재회하여 사랑을 이루는 내용이었다.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던 거냐.’

 

문득 영화 상영 중간에 바라본 옆자리의 그녀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차갑고 날선 표정이 아닌 여느 또래의 소녀와 같은 얼굴이었다.

 

나가시는 문은 이쪽입니다!”

 

이윽고 영화가 끝이 나고 엔딩 크레딧과 함께 영화관 안에 불이 켜졌다. 내가 일어서자 아직 여운이 남았는지 머뭇거리던 그녀는 따라 일어서서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꼬르륵-

 

생각보다 꽤 늦은 시간이 돼버렸다.

 

조금 늦었지만 저녁식사라도 할 생각인데 먹을 겁니까.”

“......”

 

먹겠다는 뜻이군. 일단 음식점을 찾는 것이 급선무이다. 식사 하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조금 지체된다면 통금시간이 문제가 될 것 같았다.

 

생각보다 안보이네.’

 

영화관 뒤쪽 골목은 술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지만 식사만 해결 할 수 있을 것 같은 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점점 촉박해 졌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적당히 저렴해 보이는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선술집은 사람이 가득 차 있었지만 다행히도 구석진 곳에 작은 테이블이 비어있어 앉을 수 있었다. 가게는 이미 취한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우롱하이와 우롱차 한잔씩, 그리고 닭 꼬치 두 개, 샐러드 한 접시랑 우동 둘로 주세요.”

 

영화관에서 나온 그녀는 어느새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어차피 뭘 먹을 거냐고 물어봐도 대답할 것 같지는 않아 나는 적당히 메뉴를 주문했다. 앞으로 한 달간 절대절약이 확정되는 순간이군.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우동을 제외한 나머지 음식과 음료가 먼저 나왔다. 슬슬 허기졌던 나는 샐러드를 내 접시에 조금 덜어놓고 닭 꼬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닭 꼬치는 적절하게 소금간이 되어 짭짤하면서도 담백했다. 나는 젓가락으로 남은 닭고기를 꼬치에서 빼내면서 내일 일에 대해 고민했다. 일단 오늘 하루는 넘겼다고 해도 내일 하루와 결정의 날인 월요일이 남아있었다. 어떻게든 이 사람들과 더 이상 엮이지 않으면서도 나에게 피해가 오지 않을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오늘은 그래도 어떻게든 보내긴 했군.’

 

앞으로 조금만 더 있으면 그리운 내 이불위에 누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위안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한일들을 생각 해 보니까 이거, 마치 데이......’

주문하신 우동 나왔습니다!”

 

나는 점원이 외치는 소리에 놀라 살짝 어깨를 떨었다.

 

바보 같은 생각을 할 뻔 했다! 3년간 이불 팡팡 감이 될 뻔 했어!’

 

점원이 들고 온 우동이 김을 모락모락 내며 테이블에 놓여졌다. 방금 짠 꼬치고기를 먹어서인지 목이마른 나는 주문했던 우롱하이 잔을 집었다.

 

?”

 

다르다. 맛이 다르다. 다르다고 하기 보다는 맛이 빠져있다. 아주 명확한 알코올 맛이. 내가 마신 것은 우롱차에 술을 탄 우롱하이가 아닌 우롱차 그 자체였다.

 

설마!’

 

나는 내 손에 들고 있던 잔에서 시선을 돌려 맞은편 앉은 그녀의 앞에 놓여 진 잔을 보았다. 이미 잔은 깨끗이 비워져 있었고 아직 채 녹지 못한 얼음만 달그락 거리고 있었다.

 

카라멜 팝콘을 그렇게 먹어대더니!’

 

영화상영 내내 팝콘을 먹은 그녀는 갈증이 났던 것이 틀림없었고 음료가 나오자마자 벌컥 벌컥 마셔대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술을 먹어본 적이 없었던 것인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대로 전부 마셔버린 것 이 분명했다. 그녀의 볼에 홍조가 돌기 시작한 것을 보자 나는 굳이 더 확인할 필요성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

 

“......”

“......”

 

나는 방금 전까지 즐거운 식사의 장이었던 테이블이 살얼음판으로 바뀌는 마법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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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조절 실패의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세이브 원고가 없는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표지는 가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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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웅-

적막 속에서 낡은 에어컨이 매장 안을 울리는 소리만이 내 귀를 때렸다. 점장과 미와코가 카운터에 꼿꼿이 서서 완전히 굳은 표정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손에 있는 명함과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자신을 공안 조사관이라고 소개한 여성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 그건 드리는 것이니 받으셔도 돼요.”

검은 정장의 여성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아, 예, 그럼.”

나는 뒷주머니에 있던 내 지갑을 꺼내 손에 들고 있던 명함을 조심스럽게 꽂아 넣었다.

“시간을 많이 뺏을 생각은 아니니 몇 가지 묻는 것에 편하게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검은 정장의 여자가 주머니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내며 이야기했다.

“어젯밤 10시 30분경 이 편의점에 들어왔던 젊은 여성을 기억 하고 있습니까?”

“아, 예. 그렇습니다.”

“그 여성은 어제 자치정부청사에서 반도자치위원장 주재로 이루어진 히사히토 왕자님의 생신 축하 저녁 만찬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정부청사 연회장 근처에서 수상한 거동을 보이고 있는 것을 우리 측 요원들이 포착하고 뒤를 밟았으나 이 편의점에서 나온 후 본격적으로 도주하기 시작했고 결국 일행인 것으로 보이는 남성과 추적을 빠져나갔습니다.”

나는 순간 가슴 한쪽이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이 뜨끔하였으나 일단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아선 내가 그 남성인지는 모르는 눈치 인 것 같았다. 나는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표정을 관리하려 최대한 애를 썼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그 여자가 무언가 범죄를 저질렀나요?”

“직접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연회장 근처에서 보인 수상한 행동이나 우리 요원들의 추적을 뿌리치고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빠져나가는 등 충분히 수상한 점들이 있고 범죄와의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검은 정장의 여자는 내 질문에 처음에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당황해 했으나 곧 다시 밝고 자신에 찬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무엇보다 잘못한 것이 없으면 그렇게 도망갈 필요는 없겠지요?”

뭐, 그게 맞는 말이긴 하지만 아까 같은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뒤를 쫓아오면 잘못한 것이 없어도 도망치고 싶겠다.

“신민의 안전에 관련된 것이라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수사하는 것이야 말로 경찰의 본분인 것이죠!”

내가 알고 있던 공안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것 같은 기분이.......

“그래서, 아라세카이씨는 저에게 어떤 것을 물어보고 싶으신 건가요?”

“히토미라고 불러도 괜찮습니다!”

“아, 예. 그래도 초면이고, 갑작스레 이름으로 부르라고 하셔도-.”

“히토미라고 불러주세요!”

“.......”

“제가 성으로 불리는 것을 별로 좋아 하지 않기 때문에. 부탁합니다.”

나는 손으로 내 이마의 미간 사이를 주물렀다. 진지한 얼굴을 보아하니 농담은 아닌 것 같았지만 방금 처음 만난, 제 아무리 본인이 허락했다고 해도 공안 조사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에는 굉장한 부담감이 몰아쳤다.

“.......히토미씨는 그래서 제게 무었을 물어보고 싶으신 거죠?”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일단 어제 그 여성의 인상착의부터 시작하죠!”

검은 정장의 여자는 내가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것저것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얼굴의 생김새나 키, 목소리나 특징 등을 물어보았지만 나는 자세히 보지 못했으므로 그다지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는 식으로 대답하였다. 검은 정장의 여성은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가 나오지 않자 조금 곤란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라면 일단은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을 것 같군.’

대화가 진행될수록 나는 마음 한구석에서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 측 보고서에 따르면 어제 그 여성이 편의점을 뛰쳐나가는 순간 편의점 직원, 즉 야스무라씨도 편의점에서 나와서 그 여성을 뒤 쫒았다고 되어있는데 사실입니까?”

역시 내가 그 여자를 뒤 쫒아갔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지. 왜 이 이야기가 안 나오는 것인가 생각하고 있던 참 이었다. 아까 점장과 미와코에게 말했듯이 변명할 거리는 충분히 머릿속에 들어있다. 침착하게 대답하면 되는 것 이다.

“아, 그게 사실은 그 여성을 도둑이라고 오해했었습니다. 그래서 편의점을 뛰쳐나갈 때 뒤 쫒은 것 이었습니다. 결국 붙잡긴 했지만, 도둑질한 것이 아니라는 오해가 풀렸고 통금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저는 곧장 집으로 귀가했습니다. 물론 인상착의 등에 대해서는 어두운 골목에서 본 것이기 때문에 자세히 볼 수 없었습니다.”

나는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이야기 하였다. 다행히도 혀가 꼬이는 불상사는 없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흐음.”

검은 정장의 여성은 한 쪽 손으로 턱을 받히고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가늘게 실눈을 뜬 채 촉촉해 보이는 빨간 입술을 살짝 깨물고 고개를 무의식적으로 갸우뚱 거릴 때 마다 짧은 단발 머리카락이 보기만 해도 부드럽고 말랑말랑해 보이는 흰 뺨을 스쳤다. 역시 미인은 무슨 표정을 지어도 미인이라는 건가 세상 참 불공평 하다

‘좋아, 이 분위기대로 가면 더 이상 진행할 이야기도 없고 이 사람들과 다시 엮이는 일은 없을 지도.’

“그렇다면, 다시 한 번 그 여성을 보게 되면 그 때 그 여성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나요?”

“예?”

“야스무라씨는 이번 수사에 중요 참고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을 대비해서 그 쪽 연락처를 알고 싶은데요?”

나는 다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저 그게 지금 휴대폰이 고장 중이라, 개인 사정상 언제 수리가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거짓말은 아니다. 일단 월요일에 수리 센터에 가보긴 하겠지만 수리비가 높게 나온다면 당분간은 주머니 사정상 무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휴대폰을 수리하게 되면 제가 드린 명함의 번호로 연락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다. 게다가 어차피 며칠 후면 나 같은 일개 편의점 직원에 대해선 새까맣게 잊어버리겠지.

“그럼 시간 뺏어서 미안합니다.”

말을 마친 후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 그녀는 그대로 뒤돌아 당당한 발걸음으로 편의점 문을 열고 나갔다. 유리 너머로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에스코트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나지막이 긴 한숨을 쉬었다.

“허어어어.”

“흐아아앙.”

점장과 미와코가 쓰러지듯이 카운터에 기대어 쓰러졌다. 나도 나지막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야스무라! 자네가 어제 뒤 쫒아간 그 여자의 정체가 대체 뭐야?”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행히 어제의 그 사람과는 이제 더 이상 마주치거나 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조심해요 선배!”

음음, 역시 미와코는 좋은 아이구나. 나도 더 이상은 그런 수상하고 무례하고 붙임성 없는 여자랑은 엮이고 싶지 않다.

딸랑-!

적어도 오늘 만큼은 말이다. 오늘은 그만 좀 쉬고 싶다. 어제부터 휘둘릴 만큼 휘둘렸다고!

“앗! 손님! 어서오세~”

“생각보다 멍청하지는 않은가 보군.”

깊게 눌러쓴 검은색 모자, 허벅지까지 늘어지는 긴 검정 반팔 후드 티, 하얀 발목을 드러내며 다리의 굴곡을 따라 달라붙고 있는 9부 진청바지, 그리고 가벼워 보이는 운동화. 허리까지 오는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

‘범인은 범죄 현장에 다시 돌아온다는 그것인가. 뭐, 편의점에서는 딱히 저지른 범죄는 없었지만.’

검은 정장의 사람들이 자리를 뜨자마자 이번엔 사태의 원흉 등장인가. 하지만 간이 큰 것도 유분수지! 방금 전까지 이곳엔 자신을 잡으려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던 곳인데, 아무리 자리를 떴다고는 해도 저렇게 당당하게 돌아다녀도 괜찮은 것인가.

“바보 같은 얼굴을 보니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군. 할 이야기가 있다. 밖으로 나와.”

이제는 독심술까지 하는 건가! 아니, 지금은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더 이상 휘둘렸다간 내 소중한 주말이, 5일 근무 2일 휴일 이라는 내 삶의 사이클에서 유일하게 마음 편히 놀 수 있는 황금 같은 토요일이 이 여자 때문에 몽땅 날아갈 수 도 있다!

“에? 선배 아는 사람인가요?”

아는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아는 사람은 맞지. 아직 이름도 모르지만.

“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편의점에 볼일도 좀 있고, 무엇보다 그쪽하고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예상치도 못한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자 내 머릿속은 과부하였고 내가 무슨 말을 내뱉는지 조차 내뱉은 후에야 깨달았다.

“너에게 거부할만한 권리 따위는 없다고 생각 되는데?”

눌러쓴 모자 밑으로 한 쪽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윽, 자, 잠깐만!”

머릿속에서 다시 새로운 변명이 만들어지는 것 보다 상대방의 행동이 빨랐다. 멍하게 서있던 내게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내 손을 덥석 잡고선 끌고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알았으니까 잠깐만 기다리라고!”

나는 매장을 가로질러 반쯤 질질 끌려가다가 잡힌 손을 힘을 주어 간신히 뿌리쳤다. 그리곤 틈을 주지 않으려고 재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그, 그러니까 이거 계산이라도 하고 나갈 테니까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정말 어제 밤부터 계속 굶고 있었단 말입니다!”

나는 진열된 삼각 김밥을 가리켰다.

“......빨리 나와라.”

딸랑-

어차피 편의점 출입문도 하나뿐이라 내가 도망갈 생각은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에에-! 선배! 저 미소녀는 누구에요! 예? 설마 아는 사이에요? 아니 그보다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손까지 잡고!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던데! 에엑-! 선배 어느새 저런 여자를 만나고 있던 거 에요! 선배만큼은 평생 집구석에서 인터넷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기분 나쁜 오타쿠, 솔로라고 생각했는데! 미와코 선배에게 실망입니다!”

“엥? 그렇게나 미인이었어? 시꺼먼 모자를 눌러쓴 통에 나는 얼굴은 하나도 못 봤구만!”

“점장님. 여자는 여자를 알아보는 법입니다! 저렇게 입고 있어서 그렇지 얼굴도 굉장한 미인에 조금만 꾸미면 엄청난 포텐셜이 엿 보이는 사람이었어요! 한마디로 선배에게는 눈곱만큼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구요!”

“뭐, 그나저나 야스무라군이 교류하는 사람이 있다니 기쁜 일이구만. 우리 가게에서 성실히 일해 주는 야스무라군이 점장은 좋긴 하지만 사람이란 게 말이야 좀 가끔은 야외 활동도 하고 사람들이랑 좀 어울리면서~”

평소 나에 대한 평판이 어떤지 어림짐작 하고는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역시 꽤 가혹하구나.

“빨리 이거나 계산해 주세요.”

나는 대충 집은 삼각 김밥 몇 개를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어차피 여기서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저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들어줄리 만무하다. 차라리 빨리 벗어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 빨리 말 해봐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입니까! 아니 그보다 어떻게 선배 같은 히키코모리가 저런 미인과 평범하게 대화 할 수 있는 것 입니까!”

“미와코 말이 너무 심하잖아. 점장이 생각할 때 야스무라군은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 한다고? 야스무라군에게도 장점이 있을 수 있잖니!”

있을 수도 있는 겁니까. 나는 전혀 계산을 해줄 생각이 없는 이 사람들 대신 능숙하게 삼각 김밥의 바코드를 찍고 모니터에 띄워진 금액대로 돈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도망치듯 가게를 나왔다.

“점장님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미와코 주말 간 고생해.”

딸랑-

“선배! 파이팅 입니다! 미와코 응원할게요!”

나는 미와코에게 대충 손 인사를 하며 고개를 돌려 모든 일의 원흉인 여자애를 찾았다. 그 여자애는 편의점에서 조금 떨어진 도로 변의 가로수에 기대어 서 있었고 편의점 문 밖까지 따라 나와 소리치고 있는 미와코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무슨 일인 겁니까. 아니, 그보다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지금 편의점에 있는 것을 알고서 공안들이 자리를 뜨자마자 쳐들어왔다는 것에 당연히 정답은 하나 밖에 없지만 일단은 물어 보는 것이 좋겠지.

“우린 너에게 시간을 준다고 했지 믿는다고는 하지 않았다. 뭐, 그래도 방금은 생각보단 현명하게 대처를 하더군. 네가 일하던 편의점에는 수 시간 전에 이미 도청 장치를 설치해 뒀다. 만약 공안에게 한마디라도 허튼 소리를 벙긋 했다면 네놈은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여전히 나무에 기대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던 그녀는 고갯짓으로 편의점 앞에 주차 되어있던 봉고차와 길 건너 맞은편 건물의 옥상을 가리켰다. 봉고차는 어둡게 선팅이 되어있어서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맞은편 건물 옥상에 누군가가 검은 막대기를 편의점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용건이 뭐죠?”

그래, 그렇게 나를 순순히 풀어 줄 리가 없지.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비록 방금은 공안과 별 문제 없이 넘어 갔지만 어느 순간 또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거나 네놈의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 지금 부터는 계속 동행 하도록 하겠다.”

요컨대 밀착 감시라는 것인가. 아까까지와 마찬가지로 내가 모르도록 계속 미행하는 것도 저쪽 입장에서는 상당히 수고스러운 것일 테니 나를 감시하려면 이 방법이 제일 편하긴 할 것이다.

“앞으로 월요일까지 하루 하고 반나절 남았다.”

말을 마친 그녀는 한쪽 손을 들어 무언가 짧은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주차되어 있던 봉고차에 시동이 걸리는가 싶더니 쏜살같이 내달려 길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옥상위에 있던 사람도 어느 순간 소리 없이 기척을 감추었다. 마치 영화 같은 장면이었다.

“그래서, 누가 저랑.......?”

일련의 장면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던 나는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었다.

“네 눈앞에 있는 사람 말고 여기에 또 누가 있지?”

그녀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아까보다 더욱 퉁명스럽게 대답을 했다.

“아니, 그래도 나는 남자인데 여자 혼자 남자 옆에 붙어서 감시한다니, 그 쪽 사람들 뭔가 경각심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닙니까!”

“네가 날 어떻게 할 자신이 있으면 한번 해 보던지.”

윽, 정곡이긴 하지만 이대로 질 수는 없지!

“흠흠, 아까 편의점에서 남자 손을 덥석 잡는 것도 그렇고 지금의 대사도 다른 사람이 들으면 꽤나 오해할 만한 말인데, 여자라면 조금은 수치심이라는 것을 가지고 언행을......”

후웅-!

퍽!

“커흑!”

훌륭한 바디 블로우다! 뱃속의 창자가 요동치는 통증 덮쳐왔다. 다리에 힘이 쭉 빠지고 나도 모르게 입에선 침이 한 방울이 흘렀다. 나는 배를 움켜쥐고 쓰러지듯 쪼그려 앉았다.

“아까는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이 보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거다! 그리고 방금 한 말도 네놈이 그런 식으로 먼저 이야기를 하니까 그런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그런 변명을 해봤자 효과가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평소에도 자각하고 다녀주세요. 라고 말해봤자 더 맞을게 빤하니 관두도록 하자. 물론 지금은 배를 후비는 통증에 신음을 내뱉느라 그런 말을 할 겨를도 없지만.

“그리고 나 혼자라고 한 적은 없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찰랑거리는 긴 흑발을 손으로 쓸어 넘겨 고리로 귀에 고정된 이어폰을 보여주었다. 이 녀석 부끄러움을 느끼면 귀 끝도 빨개지는 타입이었군.

‘근처에서 언제든지 달려올 수 있도록 대기 중 이라는 건가’

만약 내가 월요일에, 혹은 그 이전에 독립군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거부한다거나 도망친다거나 했을 때 이 사람들은 정말로 나를 어떻게 하려는 생각일까. 최악의 경우라면 역시 드럼통에 시멘트와 함께 넣어져 앞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겠지. 나는 새삼 이 사람들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들인 것인지 느꼈다.

“어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 인거냐 그만 엄살 부리고 일어나라.”

머리칼을 정리한 그녀는 발끝으로 나를 툭툭 차며 이야기했다. 이 여자애도 그렇고 아침에 나를 깨웠던 그 중년의 남성도 그렇고, 겉모습만 보면 그렇게 흉악한 사람들일 거라는 생각이 안 든단 말이지. 하지만 사람은 겉모습만 봐서는 모르는 법이다.

“끄윽.”

나는 통증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배를 붙잡고 힘겹게 일어섰다. 왠지 그대로 계속 앉아있다가는 또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를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래서 뭘 하면 되는 겁니까.”

“딱히 뭔가 할 필요는 없다. 내가 널 감시하는 것 뿐 이니.”

한마디로 졸졸 따라 다니겠다는 말이군. 나는 차마 겉으로는 내뱉지 못하는 한숨을 속으로 깊게 내쉬었다. 이제 겨우 주말은 토요일 한낮을 막 지나가고 있을 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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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 개강!개강! 낄낄릮ㄲㄲ끾낄ㄲ끼릮ㄹ낄

 

다음주부터는 분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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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위를 잘 둘러봐도 전혀 와 본적이 없는 동네였다. 나는 일단 길가로 나가기로 생각했고 조금 걷자 예상했던 것 보다 금방 도로가 나왔다. 이정표를 보니 역시 와 본적은 없는 동네지만 들어본 적은 있는 곳이었다. 일단 버스를 탈 요량으로 길가에 있는 가까운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노선표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돌아갈 길을 알 길이 없었다. 핸드폰도 작동이 안 되는 지금은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노선표에서 고개를 돌리자 때 마침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오고 있는, 정장을 입은 30대 초반의 회사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사람이 정류장에 다다를 때 까지 조금 뜸을 들이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말을 걸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길 좀 묻겠습니다.”

내가 말을 걸자 그 남자는 살짝 놀라는 눈치였다. 뭐, 물론 누구라도 다 늘어난 커다란 티셔츠에 헐렁한 츄리닝 바지, 마찬가지로 사이즈가 맞지 않는 슬리퍼를 신고 한손엔 푹 절어 보이는 옷가지가 든 쓰레기봉투를 들고 있는 성인 남자가 갑자기 말을 걸어온다면 경계하는 것이 당연하겠지.

“아, 예, 어떤 것 때문에 그러시죠.”

나는 상대방을 의식하며 최대한 공손하게 목적지를 설명했다. 그러자 그 남자도 경계심이 풀리는지 경로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버스가 올 때 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 관계로 내가 정류장 의자에 앉자 그 남자도 내 옆에 앉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끝에 어색함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그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곳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건가요?”

“아, 사실 그 곳이 제가 사는 곳이거든요. 이 동네는 어젯밤에 처음으로 와 보았습니다.”

“그렇군요. 어젯밤에는 무슨 일로?”

“하하. 이런 저런 일이 있었죠.”

“아, 괜히 곤란한 것을 물어 봤나보군요.”

별로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어느새 버스가 오는 것이 보였다. 그 남자도 나와 같은 버스를 타는 모양이었다.

“......”

“......”

공교롭게도 버스 안에는 유일하게 두 자리가 나란히 비어 있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그 남자에게 물었다.

“어디 까지 가시나요?”

나는 내가 먼저 내리게 되면 통로 쪽에 앉을 생각으로 그 남자에게 행선지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 남자는 멋쩍게 웃으며 아까 내가 말했던 곳이라 대답 하였다. 의자에서 더 가까운 것은 나였기 때문에 내가 창가 쪽으로 먼 저 들어가 앉았다. 곧 이어 그 남자도 내 옆에 앉았다.

“거긴 무슨 일로 가시는 건가요?”

대충 남자가 자리를 잡자 내가 물어보았다.

“아, 예, 오늘은 토요일이라 회사가 일찍 끝나 주말마다 부업을 하는 곳에 가려고 했는데, 먼저 그쪽에서 연락이 오더군요. 오늘은 제가 가봐야 할 곳이 있다면서. 출장 같은 거죠. 그래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한 번도 가본적은 없는 동네지만.”

남자는 약간 피곤하다는 듯이 웃어보였다. 정류장에 앉아 있을 때는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이런 동네에서는 보기 드문 말쑥한 이미지의 선한 인상이었다.

“대단하시네요. 주중에는 회사, 주말에는 부업.”

“사실 부업이라고 하기 힘든 것이, 특별히 받는 수입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미래를 위한 투자랄까.”

그렇게 말한 남자는 씁쓸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대화는 잠시 멈추었고 나는 의자에 기대어 버스 창밖을 내다보았다. 모르는 건물, 모르는 사람들이 창문 밖에 영화 필름이 흐르듯이 스쳐지나갔다. 버스는 길을 이리저리 내달려 이윽고 큰 도로로 나왔다. 길가를 따라 광장 같은 곳이 있었고 그곳에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노동법 개정을 위한 시위로군요.”

남자가 시위 하는 사람들을 보더니 뭔가 아는 듯 이야기 하였다.

“말도 안 돼는 부당한 비정규직 법률과 몇 년째 제자리인 최저임금. 뉴스에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 시위이죠.”

남자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곤 이야기를 이어갔다.

“직장의 대다수가 어제 잘려나가도 문제없는 비정규직으로 채워지고 모든 이익은 기업이, 그리고 그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고 그것을 비호하는 정부. 어느 부분부터 잘못 된 것일까요. 기업? 정부?”

시위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남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기업을 감시해야하는 정부는 유권자의 투표를 두려워해야 하지만 대다수 유권자들은 각박한 삶속에 정치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죠. 그나마 의식 있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표출 하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순간 공안사범으로 몰려 공안경찰의 무지막지한 대접을 받죠.”

이 남자의 말대로 정당한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로는 비슷했다. 공안경찰은 일반 반도자치경찰이나 일본 경찰과는 전혀 달랐다. 60~70년대 일본내 좌익세력이나 전공투, 반도 무장독립운동 등 사회 공안문제가 극에달하자 일본 정부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정보기관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80년대 초, 경찰청과 법무성 등에 흩어져 있던 공안조직들을 통폐합하여 내각 직속의 독립된 조직으로 개편창설 된 일본 공안청은 일본 국내외의 첩보와 공안업무를 담당하는 조직이었다. 필연적으로 독립단체와 피 튀기는 전쟁을 치러 온 이 조직은 독립군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지독하리만큼 악랄하기로 유명했다. 이들의 활약은 세간에 악명과 명성을 동시에 드높였고 국방을 제외한 대부분의 행정이 조선 자치정부에 이양된 후에도 반도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일본 정부기관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 땅에서는 독립 분리주의자다! 이 말 한마디면 어떤 사람이든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한순간입니다. 멀쩡한 사람도 순식간에 공안사범으로 몰려 쥐도 새도 모르게 공안청 지하실로 사라지는 땅에서 노동인권 개선?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입니다."

"......."

그 남자는 내가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꼈는지 황급히 밝은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하하, 쓸데없는 소리를 했네요.”

말을 마친 남자와 나는 말없이 조용히 앉아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우리 둘은 버스에서 내렸다.

“혹시 찾는 곳이 있으면 제가 알려드릴까요.”

“아, 감사합니다만, 일행이 근처에 있어서 괜찮습니다.”

나는 가벼운 목례를 하고 그 남자를 뒤로한 채 익숙한 골목 어귀에 들어섰다. 낯익은 건물과 길을 보니 마음이 조금은 놓이는 것 같았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정류장에서 10분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20년이 훌쩍 넘은 원룸건물이었다. 말이 좋아 원룸이지 불법으로 3층 주택을 불법으로 개조해서 만든 건물로 거의 방의 크기는 고시원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고 매우 낡은 건물이었다. 하지만 할머니 밑에서 자라 성인이 되자마자 아무준비 없이 집을 뛰쳐나온 내가 이런 곳이라도 좋은 조건에 구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나 다름없었다.

찰칵-

문을 열자 약간 퀴퀴하고 습기 찬 냄새가 흘러나왔다. 이 단칸짜리 집에는 옷장과 조그마한 냉장고, 노트북이 있는 작은 책상, 한명이 간신히 누울만한 침대가 놓여있을 뿐 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발 디딜 틈이 부족 했다. 나는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날려 축 늘어졌다. 하지만 배에서 꼬르륵 소리와 함께 밀려온 공복감에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어제 밤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지.’

나는 빌려 입고 온 옷을 갈아입었다. 세탁해서 돌려주는 것이 도리겠지. 나는 문득 만일 내가 월요일에 다시 거기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고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 여자애는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을 알고 있다. 내가 출근하지 않고 잠적하더라도 결국은 여기 살고 있는 것을 알아낼 것 이다. 그렇다고 이 원룸에서까지 나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다. 나는 일단 해야 할 일을 하기로 생각했다. 우선 세탁이 먼저였다. 이 원룸의 주인도 이 작은 방과 화장실에 세탁기를 놓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층마다 세탁실을 복도 끝에 마련해 동전을 넣고 사용할 수 있는 세탁기를 구비해 놓고 있었다.

‘세탁기를 사야할 필요성은 없어졌지만, 세탁기 사용까지 유료라니.’

나는 빌려온 옷과 내 옷이 담긴 쓰레기봉투를 들고 다시 복도로 나와 세탁실로 걸어갔다. 세탁기에 세탁물을 쏟아놓고 세제를 담고 있을 때였다.

“어머! 이게 무슨 냄새야!”

고막을 찌르는 듯한 고주파의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봤다. 팬티인지 반바지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짧은데다가 몸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며 달라붙는 타이즈와 마찬가지로 일부로 작은 사이즈를 샀는지 가슴 부위가 터질 것 같은 흰색 민소매 티, 염색을 했는지 금발의 모습을 하고있는 젊은 여자가 코를 막은 채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 거 죄송하게 됐슴다. 옆에 거 쓰세요.”

나는 황급히 시선을 다시 세탁기로 돌리며 태연한척 말했다. 내 뒤에 서있던 사람은 20대 중반의 옆집 여자였다. 이름도 제대로 모를 정도로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종종 트러블이 생겨 몇 번 서로 언성을 높인 적이 있었다. 뭐, 주로 내 쪽에서 항의한 것 이지만. 이 옆집 여자는 수시로 집에 끌고 오는 남자가 바뀌었다. 그리고 남자를 데리고 오는 날은 십중팔구는 늦은 새벽까지 방음이라곤 눈곱만큼도 안 되는 벽 너머로 소리를 질러대 다음날 일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 한번은 며칠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새 들려오는 소리에 참다못한 내가 반정신이 나간 상태로 항의했지만 이 여자는 코웃음 치면서 사생활간섭이라며 나를 가소롭다는 듯이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뒤로 이 여자와 종종 마주칠 때마다 나와 그 여자 사이엔 냉기류가 흘렀다.

“대화는 사람을 보고 얘기 해야지요?”

그 여자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내가 당황해 하는 것을 느꼈는지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시비를 걸어왔다.

“아, 제가 좀 바빠서.”

나는 온힘과 정신을 집중해 최대한의 무표정을 지으며 그 여자를 돌아보고 대답했다. 그 여자는 내 얼굴을 보더니 입 꼬리가 굳어지며 재미없다는 표정을 짓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흥, 그거 냄새 배기면 책임 질 거 에요?”

“그 땐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나는 세탁기를 작동시키고 딱 잘라 대답하며 그 여자 옆을 지나쳐 세탁실을 나왔다.

“냄새야! 뭐 어디서 여자랑 시궁창에서 뒹굴기라도 했나? 뭐 어울려 줄 여자 수준은 안 봐도 빤하지만!”

마치 들으라는 듯이 외치는 옆집 여자의 혼잣말이 세탁실을 삐져나오는 것을 나는 애써 무시하며 내 호실로 돌아갔다.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니까!

‘으으으......’

탁!

아무리 냉장고를 열고 있어 봐도 텅 빈 냉장고에서 음식이 생겨날리 만무했다. 세탁물을 걷어서 침대 위에 펴놓은 건조대에 널고 나니 저심시간은 이미 훌쩍 넘긴 뒤였고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댔다.

‘어차피 밖에 나가야겠지.’

일단 가장 급선무인 편의점에 들려 점주에게 어젯밤 일에 대해 이야기해야 했다. 물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 할 생각은 없지만. 그리고 겸사겸사 편의점에서 주말동안 먹을 식료품을 사기로 했다.

‘핸드폰 수리 센터는 주말이라 닫았을 거고.’

지친 몸을 이끌고 나는 집에서 나왔다. 핸드폰 수리 센터는 편의점과 반대방향이었지만 평일 이외에는 열지 않을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주말동안은 놔두기로 했다. 딱히 연락할 사람은 없지만. 어쨌든 지금은 편의점에 갔다가 돌아와서 아무생각 없이 푹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점장은 인건비를 아끼려 주말 오후 파트에 직접 근무를 했다. 아마 지금 쯤 편의점에 있을 것이다. 점장에게 어젯밤 일에 대해 이야기 할 변명을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눈앞에 편의점이 보였다.

딸랑-

“오! 오랜만이에요 선배!”

“야! 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서기 무섭게 카운터에서 두 명의 목소리가 앞 다퉈 들려왔다.

“너, 어제 갑자......”

“선배! 점장님한테 들었어요! 어제 마감 직전에 갑자기 웬 여자를 쫓아 뛰어 나갔다면서요! 무슨 일 인거에요!”

점장을 가로막으면서 쉴 새 없이 말을 내뱉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주말 오전 파트 아르바이트생인 타케시 미와코였다. 미와코는 근처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고생으로 반년 전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 했을 때 내가 2주 동안 책임지고 교육한 뒤로 나를 볼 때면 선배라고 부르는 아이였다. 저번에 주말 오후 대타 출근했을 때 본 것이 마지막이니까 거의 한 달 만인가.

“가게도 내팽개치고 첫 눈에 빠진 여자를 쫓아가다니! 드디어 선배가 사랑에 빠진 건가! 선배가 그렇게 저돌적인 사람인 줄 몰랐어요! 꺄악-!”

음, 이 뭔가 굉장히 여고생 같은 느낌. 오랜만이군. 2주간 교육을 맡았을 때 적응하느라 고생했었지.

“그렇게 뒤 쫓아 가서 어두운 골목에서 그녀를 붙잡고! 벽에 딱! 거칠게 밀쳐서! 막! 첫눈에 반했어요! 하고! 막 고백을! 아, 아니면 설마 선배! 그 이상 나쁜 짓을.......!”

“어이 야스무라 난 자네가 나쁜 짓을 할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만약 정말로 그렇게 했다면 그건 범죄야! 평소에 조용한 사람이 한번 어긋나면 폭주한다던데 그게 자네 일 줄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적어도 하고 있는 말이 끝날 때 까지는 그렇게 생각해 주세요. 마지막에 가선 결국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기정사실화 하고 있잖습니까.

“벽으로 몰아친 그녀에게 거칠게 키츄으으윽, 아파파팟! 선배 아파요오옷!”

나는 조용히 한쪽 손으로 미와코의 머리를 지압하듯이 꾹꾹 눌러댔다. 교육 1주차가 끝나 갈 때 쯤 터득한 ‘폭주 상태’의 미와코를 제압하는 방법이었다.

“어제 밤엔 그러니까.......”

나는 어제 일에 대해 대충 그 여자애를 도둑으로 잘못 오해해 뒤쫓아 갔고 결국 오해는 풀렸지만 쫓던 도중 실수로 핸드폰을 떨어뜨려 고장이 난데다가 통금시간이 가까워져 가게로 돌아 올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곧장 집으로 간 것 이라고 설명했다.

“뭐 큰일은 아니라 다행이지만 또 이런 일이 없도록 조심해. 어제 덕분에 마감 정리가 늦어져서 나까지 통금 시간에 걸릴 뻔 했다고! 마음 같아선 어제 그 시간만큼 시급에서 깎고 싶지만 봐주는 줄 알아!”

“네, 조심할게요.”

“에이- 겨우 그런 거라니. 선배 이제야 좀 남자다워 지나 했더니.”

일단은 어떻게든 무난하게 넘어 간 것 같았다. 그 후로 별로 시답지 않은 잡담을 나누다가 미와코와 점장은 다시 인수인계를 시작했고 나는 식료품 코너로 발걸음을 막 옮기려는 참이었다.

딸랑-

“어서 오십.......시오.”

등 뒤에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점장의 인사가 반사적으로 나오다가 뭔가 시원찮게 끝맺는 것이 이상해 뒤를 돌아보자 카운터 앞에 덩치가 좋고 검은색 정장을 빼어 입은 두 명의 남자가 위압적으로 서있는 것이 보였다.

“묻고 싶은 것이 조금 있어서 왔습니다. 어제 밤에 여기서 근무하던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예? 아, 저 어디서 오신 분들이신지.......”

“묻는 것에만 대답하시오!”

검은 정장의 남자가 일갈하자 점장은 새하얗게 질려서 내 얼굴과 그 남자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미와코도 잔뜩 겁에 질려 한마디도 못하고 있었다.

“저, 무슨 일로 찾는 것인지 말씀을 해주셔야......”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일단 당신, 우리랑 함께 가야겠소.”

말을 마친 남자는 거칠게 카운터 문을 열었다. 점장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고 미와코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제가 어제 밤에 근무했던 사람입니다. 무슨 일 이신가요.”

나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놀라 간신히 입을 열어서 말했다. 내가 어제 근무했던 사람이라고 밝히지 않았다간 점장에게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자네 이름은?”

점장에게 향했던 시선이 빠르게 내 쪽으로 돌아왔다.

“야스무라 토우마입니다.”

나는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내가 그쪽으로 가지 않으면 그 남자들이 내 쪽으로 올 것 같았다.

“어제 밤 열시 반 경 당신이 여기서 근무하고 있을 때 들어왔던 여성을 기억 하고 있겠지?”

“아, 예 그렇습니다만.”

‘역시나’가 역시나이다. 분명 어제 그 여자애 혹은 그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다.

“어제 그 여자에 대해 좀 듣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이야. 우리와 좀 동행해 주실까.”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여자와 전 아는 사이도 아니고 어제 여기에 들어왔을 때 처음 본 사람입니다.”

등에서 어느새 땀이 나기 시작했다. 손끝이 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글쎄, 그건 우리랑 가서 천천히 이야기 해 보고 일단 밖으로 나가지?”

“뭐 하시는 분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당신들을 따라가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저 사람들은 어제 일에 대해 내가 어떻게 관련 돼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일단은 침착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예예, 우리 직원이랑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일단 이야기를 좀-.”

“맞아요! 여기서 계속 이러시면 경찰을 부를 거 에요!”

점장과 미와코도 덜덜 떨면서 거들었다.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남자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명이 안주머니에서 꺼낸 막대기를 휘두르자 촤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쇠로된 삼단봉이 펼쳐졌다.

“으윽!”

“꺄악-!”

점장은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 수화기를 들다가 팔이 꺾여 제지당했고 미와코는 비명을 질렀다. 삼단봉을 든 다른 한명은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지만 얼마가지 못해 나는 벽 쪽으로 몰렸다. 내 앞에선 검은 점장의 남자가 삼단 봉을 든 팔을 높이 쳐드는 것이 보였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멈추세요!”

갑자기 들려온 젊은 여자의 외침에 나는 눈을 떴다. 편의점 안에 있던 사람들의 주목이 모두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돌아갔다.

“우리는 단지 필요한 정보를 들으러 온 것이지 범죄자를 잡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명백히 불법입니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편의점 문 쪽 이었고 편의점문은 어느새 열려져있었다. 문에 달려있던 종이 딸랑 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검은색 정장상의와 치마, 안에는 흰색 블라우스를 입은 단발머리의 여자가 서있었다.

“아, 아가씨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잠시-.”

“제가 그렇게 부르지 말아달라고 했을 텐데요.”

“아, 죄송합니다. 조사관님. 하지만 현장일 까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어느새 뒤따라 들어온, 마찬가지로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던 남성이 쩔쩔매며 말을 했다.

“아무리 공안사건 관련 용의자라고 해도 현행범이나 지명수배 받고 있지 않는 한 영장 없이 강제로 연행 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저들은 무고한 시민이지 않습니까. 당장 그만 두도록 하세요. 여기는 제가 맡겠습니다.”

뒤 따라 들어온 남성은 조금 멈칫거리더니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편의점 안에 있던 남자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저희는 그럼 이 앞에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부르십시오.”

딸랑 딸랑-

그 남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나머지 두 명을 데리고 편의점을 나갔다. 편의점은 안은 갑작스럽게 정적에 휩싸였다.

“흠흠, 대충 이야기는 밖에서 들었습니다. 그 쪽에 계신 남자 분이 어제 밤에 여기서 근무를 하셨던 분이시죠?”

그 젊은 여자는 내 쪽으로 걸어오면 이야기 했다. 작은 얼굴에 잘 어울리는 짧은 단발머리, 진한 눈썹에 큰 눈, 생기 있는 눈동자, 작지만 오뚝한 코, 입술에 머금고 있는 자신감 있는 미소. 가까이서 보니 생각 보다 엄청나게 젊은 여자였다. 아니, 젊다기보다는 나랑 몇 살 차이 안나 보일 정도로 어려 보였다. 굽이 낮은 구두를 신고 있기는 했지만 키도 내 가슴팍보다 작은 듯 했다. 하지만 옷 위로 두드러지는 가슴만큼은 그녀가 더 이상 말할 것 없이 훌륭한 성인인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영양분이 그쪽으로만 간 것인가!’

“흠흠!”

젠장, 나도 모르게 멍 때렸다.

“아, 예, 예! 제가 어제 밤에 근무했던 직원입니다.”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 제 소개부터 하죠.”

그녀는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한 장 뽑아 나에게 건넸고 나는 그 명함을 공손하게 받아서 들여다보았다.

“공안.......”

“공안청 조사 제3부 소속 조사관. 아라세카이 히토미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순간 반짝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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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에 올린다 그랬는데 1시간 늦었땅!

다음주는 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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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우웅-

얼마나 잠들었던 것 일까. 귀를 울리는 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환한 조명에 눈이 부셨다.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보니 인쇄기들이 소리를 내며 진동하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이제 막 열한 시 반을 넘어 가고 있었다.

“오, 이제 일어났는가.”

소파 뒤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자세를 고쳐 잡고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키가 그리 커 보이지는 않지만 운동으로 다져져 탄탄해 보이는 몸을 가진, 인자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 책상에 앉아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어제 말한 여기서 지내는 사람들 중 한명인가. 뭔가 범죄 조직원 같은 이미지를 연상했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이미지였다.

“아, 예, 실례 했습니다.”

“잘 자고 있는데 깨워서 미안하네. 오랜만에 들어온 일거리라서 말이야 인쇄기 예열을 해줘야 하거든. 뭐 어차피 슬슬 일어날 시간이기도 하고, 조금만 기다리고 있게”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이야기하던 그 중년의 남성은 잠시간 글씨를 끄적이다가 툭툭 쳐 정리하고 내 맞은 편 소파에 와서 앉았다.

“그래, 우리 아이와는 무슨 관계지?”

“예?”

그 남성은 소파 앞에 놓여있는 탁상에 손을 깍지 껴 올려놓고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대화가 출발했다는 것이 한 번에 와 닿는 첫 마디였다. 어제 그 난리를 친 여자애와 보통관계가 아닐 수가 없는, 수상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직접 관리 하는듯한 지하 건물에서 처음 받은 질문이 ‘이곳이나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영원히 입을 닫아 줄 수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안전은 보장 못 하네’ 와 같은 무거운 이야기가 아니라 무언가 굉장히 근본적으로 고민하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그, 무슨 관계냐고 물으셔도......”

“어허! 남자가 소신이 있어야지! 설마 그런 생각도 없이 여자를 만나고 그런 것은 아니지? 남자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해! 물론 어젯밤 사이에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다면 자네랑 곱게 이야기 할 생각은 없네만, 모습을 보아하니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아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걸세.”

역시 생각대로 대화는 전혀 종잡을 수 없이 흐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신다면 뭐, 평범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그보다 설마 이 남자는 그 여자애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는 것인가? 일단 이 남자에 대해 알아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저, 혹시 그, 아버님 되십니까?”

내가 잠자코 듣고만 있을 거라고 생각 했는지 잔뜩 무게 잡으며 이야기하던 남성의 얼굴에 잠깐

당황한 기색이 흘렀다.

“음, 아, 그건 아닐세, 하지만 그 아이의 부모 되는 사람과 절친한 사이였지. 그리고 사정이 생겨 어렸을 때부터 내가 친 딸처럼 키웠다네.”

중년 남성은 다시 의기양양한 듯 이야기를 하였다. 일단은 보호자라는 건가.

“우리 아이도 얼마큼 장성했고,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네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남자를 데리고 이곳으로 올 줄은 몰랐네. 적어도 사람의 예의라는 것이 있고 절차가 있으니까 말 일세. 그 아이의 불찰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자네는 이곳에 왔다는 것은 사정을 들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거 아닌가. 자네 쪽이 조금 더 연상인 것도 같고. 그, 사람의 첫 인사란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 이야!”

“저, 말씀 중에 실례지만 그 여자애는......”

“아까 아침 일찍 집으로 돌아갔네. 어렸을 때는 여기서 지냈지만, 지금은 장하게도 혼자 생활 하고 있지. 자네, 또 이 말을 듣고 질 나쁜 생각을 하면 좋지 않을 걸세!”

비약이 심하십니다. 저는 아직 그 여자애의 이름도 모릅니다. 라고 말했다간 지금 상황에선 어떤 말이 돌아올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겠지.

“말씀 중에 거듭 죄송합니다만, 혹시 저에 대해 이야기 들으신 것은 없으십니까.”

“자세한건 자네가 일어나면 물어보라고 했네만.”

관자놀이 언저리가 지끈 거렸다. 일단, 타인과 이렇게 대화 하는 것이 굉장히 오랜만인데다가 그 내용이 도저히 평범한 내용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 어디서부터 대화의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 마시고 어제 밤, 처음 여자애와 만났을 때부터 오늘 아침 눈을 뜨기 까지 있었던 일을 할 수 있는 한 상세하게 설명했다. 파스 붙여준 이야기만 빼고.

“......”

내 이야기를 듣던 중년 남성의 표정은 처음엔 놀라는가 싶더니 당혹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윽고 내가 이야기를 마치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 녀서억- 떠넘긴 거냐아- 내 잘못도 있지만 서도-.”

눈앞에 앉은 중년의 남성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들릴까 말까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오해해서 미안하네,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하지.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방금 전 이야기처럼 가볍게 듣고 말 이야기가 아니네.”

방금 전 이야기도 충분히 무거웠습니다.

“자네가 어제 겪은 일도 있고, 나이도 젊으니 이해가 빠르리라고 생각하네만, 이야기를 듣고 자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따라 여러 가지로 자네의 상황이 변할 수 있으니 주의해서 들어주게.”

일순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방금 전 까지 딸 걱정하는 아버지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확실히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어제의 사건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면 분명 이 사람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범죄 쪽으로 연관이 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들의 얼굴은 물론 근거지까지 알고 있다. 입막음 당하려 드럼통 속에 들어가 저수지에 던져져도 이상하지 않으나 아직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것은 뭔가 나에게 이용가치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고 순응하는 척 해서 이곳을 빠져 나간 뒤 신고를 하든지 하는 것으로 생각이 정리되자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

“우리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활동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군 일세.”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앞에 앉은 중년 남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혀 농담을 하거나 하는 표정이 아닌, 진지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단어는 생소했지만 자주독립, 독립군 같은 단어는 들어본 적이 있는 단어였다.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후 생겨난 반 정부주의, 과격민족주의 테러집단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단어 중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독립군’ 이었으며 그들이 ‘독립운동’ 이란 것을 하며 외치는 구호가 ‘자주독립’ 이었다. 물론 이 단어들이 단 한 번도 신문이나 정부기관의 공식적인 서류에 등장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의 활동은 무정부주의 테러리스트 집단 따위와 같은 자들의 소행으로 보도될 뿐이었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집중적인 토벌작전으로 사그라드는가 싶었지만 지속적인 생명력으로 암암리에 세력을 불려나가다 1985년 5월 18일 광화문을 중심으로 기습적인 무장봉기를 시도하며 시민들의 2차 봉기를 유도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출동한 무장경찰, 군 헌병대와 3일 가까이 시가지에서 총격전을 벌인 끝에 일망타진되어 그 명맥이 끊기다시피 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민간인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고 분노한 일본 정부의 후속 조치로 인해 엄청난 사회적 파장이 몰아 닥쳤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람들은 독립군이나 독립운동에 대한 거부감,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일종의 광신 종교집단 같이 보는듯한 인식과 혐오감이 팽배했고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조선의 자주독립과 같은 이야기는 사회에 적응 못한 망상가들, 혹은 나이들은 노인들이 중얼거리는 현실적이지 못한 노망쯤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후에도 현재까지 간간히 독립을 주장하며 정부요인이 살해 되거나 소규모 사제 폭탄테러 같은 사건이 종종 벌어졌지만 사회 부적응자에 의한 개인적 범죄 행위 쯤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당치도 않은 곳과 관련돼 버렸다!’

등에서 땀이 흘렀다. 어쨌거나 이들은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범죄자들로 규정되어 있으며 일본 정부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행정 권한이 자치정부로 이양된 후에도 특별형법인 파괴활동방지법을 강화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이들에 대한 직접적인, 통상의 범죄자들과는 전혀 다른 사법처리 절차를 거치는 특별관리 대상으로 지정된 사람들이다. 만약 어제 그 남자들에게 잡혔더라면 아무리 결백을 주장해도 최소 반년은 지하실에 갇혀 바깥 공기는 마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잘못 휘말리면 평생 교도소 천장을 바라보며 잠들 수 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리와 함께 일했으면 좋겠네.”

역시나 이다. 확실히 입막음으로 이것 보다 확실한 방법이 없다. 공범이 되면 입을 열고 싶어도 열 수 없게 된다.

“자네가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우리가 서로 간에 믿을 수 있는 방법이 이것 밖에 없는 것을 이해해 주게. 내 목숨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사가 달려있는 것이니.”

진퇴양난이다. 어떻게 해야 할 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이대로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미안하네. 원래라면 이런 식으로 권유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 방법이 잘못 된 것이 마음이 아프군. 조금 이야기를 바꾸어 보겠네. 자네, 살면서 자네가 누구인지 고민해 본적이 있나?”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기에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대답하기 이상한 질문 이었나? 흠, 좀 더 구체적인 질문으로 바꾸어 보겠네. 자네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사회의 부조리나 모순에 부당함을 느껴 본 적이 있나?”

나는 여전히 대답 할 수가 없었다.

“우리 민족이 이미 일본의 지배를 받은 지 1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네. 자치정부는 일본 정부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지. 이제 우리가 자주적인 하나의 국가로서 존재해 왔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던 사람은 이제 이 땅에 단 한명도 남아있지 않네. 일본인으로 태어나서 일본인으로 죽어가지.”

한자로 쓰여 지는 일본식 이름. 그리고 그것이 적혀있는 황국신민증. 여권 국가 란에 적혀있는 EMPIRE OF JAPAN. 어느 누가 봐도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반도인들.

“그렇다면 자네는 일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우는 노래는 기미가요이며 일본어로 쓰여 진 교과서로 일본의 역사를 배우며 자란, 우리 스스로도 일본인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자들은 바로 일본 본토의 ‘진짜 일본인’들 이었다. 세계적으로 친절하고 예의바르다는 일본인들도 반도인들 앞에서는 표정이 달라졌다. 설사 겉으로는 표현 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반도인 들을 의식의 깊은 곳에서부터 멸시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반도는 일본제국에 빌붙어 먹는 기생충쯤 이었다. 인터넷에서는 자신들의 혈세가 반도인 들에게 혜택으로 돌아간다는 불만을 표출하는 글이나 이와 관련된 시위대의 사진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일본인들의 세금이 반도에 쓰인 부분은 반도를 관리하기 위한 정부행정기관이나 군대의 비용으로 쓰이거나 일본 기업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인프라 사업이 대부분이었고 자치정부가 세워진 이후로는 오히려 상황이 역전되어 자치정부가 반도에서 거둬들인 세금으로 반도에 주둔중인 일본 군 시설에 방위비라는 명목으로 제출하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경제 부문에서는 반도에서 소비되는 거의 모든 소비재들은 일본 기업에 의한 폭리수준의 독점형태로 일본 기업은 막대한 이익을 올렸고 일본 내부에서 유통되는 저렴한 가격의 물품들은 일본 기업들이 반도에 세운 공장에서 헐값의 인력으로 생산된 물품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세계적인 일본의 삶의 질 수준에 한 몫 하였다. 하지만 정부나 언론에서 사실그대로 이런 부분들을 언급 할리는 만무했다. 오히려 통계 수치에 반도를 교묘하게 끌어들여 일본의 성장에 반도가 방해하는 듯한 기사를 써냈고 정치인들은 이를 이용해 사회적 불만이나 관심을 반도를 향해 표출 시키도록 했다.

“자네는 본토에 가 본적이 있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금전적인 문제로 인해 일본 본토뿐 아니라 국외로의 여행은 일반인들에게는 사치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일본 본토 방문에 발목을 잡는 것은 절차였다. 황국신민증은 두 가지로 나뉘어졌다. 본토인이 지급받는 1급 신민증과 반도인이 지급받는 2급 신민증. 본토인들은 항공기나 선박티켓에 신상정보만 기입하면 반도에 문제없이 자유롭게 왕래 할 수 있지만 반도인이 본토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최소 3개월 전 관련기관에 신고 후 허가가 떨어지면 상세한 일정정보와 연락처, 숙박하는 곳의 정보 및 여행 중 정기적으로 관련기관에 신고를 해야 하며 장기체류의 경우 절차는 더욱 복잡해졌다. 2급 신민증을 가진 반도인이 본토에서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현대에 들어서 국제 사회적으로 신민증이나 기타 반도인에 대한 차별에 대해 인권 문제가 제기 되었을 때 자치정부가 나서서 일본 정부를 감싸는 모습을 보이자 외국의 인권단체들은 반도의 문제에 대해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어렸을 적 우연찮은 기회로 부모님과 함께 본토에 갈 기회가 생겼었지. 여행을 가서 느낀 것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굉장한 충격이었다네. 나나 부모님이 일본사람에게 말을 건넬 때 그 사람들의 표정이란 말로 형용하기 힘들었어. 뭐, 지금이야 워낙 세월이 흐르고 미디어 매체의 발전으로 이제는 반도인이나 일본인이나 말을 하는데 있어 발음이나 억양 차이가 없어 구별하기 힘들지만 그 시절에 배웠던 일본어에는 아직 조선말의 억양이 묻어나왔던 걸세. 호텔에 가도, 식당에 가도, 우리가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면 하나같이 같은 얼굴을 하더군. 그 때 처음으로 느꼈네.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다시 반도에 들어왔을 때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네. 필사적으로 일본어를 공부하고 일본문학을 공부하고 일본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 어떻게든 출세해보려 힘 있는 일본인들 앞에 줄을 서는 어른들. 성공해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반도를 떠나는 것이 최종적 목표인 민족이 사는 곳이었지.”

출세해 일본 본토에서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 그렇다 2급 신민증자가 일본 본토에서 거주 할 수는 없어도 1급 신민증을 발급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는 고위 공직자가 되거나 박사학위를 취득해 그 분야에 영향력 있는 연구 결과나 논문을 발표 한다 던지, 예술이나 체육 분야에서 국제적인 실력을 가지고 확약을 한다 던지 일본 공기업이나 국가 선정 기업에 일정 금액 이상을 투자 하거나 1급 신민증을 지닌 일본인과 결혼을 하는 등의 방법이 있었다. 반도에서 성공한 삶은 곧 1급 신민증을 가지고 반도를 떠나 본토에서 진짜 일본인처럼 사는 것을 말했다. 그리고 반도인 들은 두 가지 무리로 분류 되었다. 어떻게든 성공해보려 힘을 다해 발버둥치는 사람들, 그리고 이미 경쟁에서 도태되어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문제인 사람들. 물론 개중에는 부모덕으로 수월하게 꿈을 이루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루하루 성공하기 위해, 먹고살기 위해 모든 힘을 탈진한 사람들은, 사회에 어째서 이런 부조리함과 차별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나도 언젠가는 성공한 사람들처럼 이 사회에 올라서서 아랫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심에 이런 체제를 거부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이었다. 마치 일본의 메이지 유신 시절 신분제 폐지 정책을 천민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반대했던 평민들처럼.

“능력 있는 인재들은 이 땅을 떠나가고, 떠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저 지배당하는 악순환이 끊어지지 않고 반복되고 있는 걸세. 그럼, 우리는 이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정말 할 수 있는 일은 없는가?”

잠시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일단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줌세.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지. 뭐, 자네가 거부한다면....... 어떻게 상황이 변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말이야.”

결국은 협박으로 끝나는 것인가.

“일단 돌아가 보도록 하게. 그렇다고 자네를 믿는 건 아닐세. 자네가 이곳에서 나가서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모르는 것이니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행동을 취할 것이네. 부디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그렇다. 지금 여기서 내 대답을 듣고 나에 대한 처분을 결정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비록 1:1의 상황이지만 저 사람이면 나 정도는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주머니 어딘가에 무기가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나를 풀어주며 생각할 시간을 주는 이유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은 스스로 바라는 소원이 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지 협박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부디 짧은 시간이나마 생각을 정리하며 자네가 진심으로 민족을 위해 일 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램일세. 시간은 이번 주말 정도면 충분 하겠지.”

말을 마친 중년의 사내가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만. 일단 그 옷은 빌려 줄 테니 다시 여기에 왔을 때 돌려주도록 하게. 이제 슬슬 우리 식구들도 올 시간이고, 식구들과 마주치면 또 귀찮은 일이 생길 수 있으니 그만 빨리 돌아가 보게.”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함께 있는 중년의 남성만으로도 충분히 심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중에 다른 사람들까지 더 늘어나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이 중년의 남성이 이곳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배려해 주는 것으로 보면 이 사람과는 달리 거친 사람들 일 수도 있는데다가 나를 여기서 내보내주는 것에 반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마음이 급해졌다. 중년 남성이 자리를 비켜주자 나도 자리를 일어나 내 옷이 담겨있는 쓰레기봉투를 챙기고 있을 때였다.

쿵쿵쿵쿵

현관문 넘어 철제 계단이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벌써 돌아온 것인가!

나는 봉투를 챙기던 손을 멈추고 잔뜩 긴장한 채 문을 바라보았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철커덩-!

계단을 내려오던 사람은 이윽고 큰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들어왔고 나는 그 사람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응? 자넨 누구? 손님인가? 후욱, 후욱! 뭐, 신경쓸 때까 아니지! 아! 사장 돌아왔습니다!”

170 후반대의 키, 약간 살집 있는 몸 얼굴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의 옷차림새를 제외 한다면. 그가 입은 상의 한가운데는 수명의 미소녀와 애니메이션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어깨에는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미소녀들이 잔뜩 그려져 있는 보자기를 걸치고 있었고 양손에 들려있는 쇼핑백에서는 미소녀 포스터가 꽂혀 있었다.

“전쟁이다 전쟁! 감히 다음 라이브 일정을 겹치게 하다닛! 폭도 놈들 P들에 대한 도전이닷! 지금 당장 이 일에 대해 인터넷 실황 게시판에서 이 일을 P들과 의논해야!”

기세 좋게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나를 거들 떠 보지도 않은 채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쿵쿵쿵쿵

숨 돌릴 틈도 없이 또 다시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려오는 소리는 혼자인데 말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전화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철커덩!

“오오! 그게 정말이오? 다음 밀리 페스티발 스태프라니! 대단하오! 꼭 가겠소! 역시 다음 페스티발 때는 타미야 사에서 출시한 타이거 전차의 후기형을 꼭 사야겠소! 물론 2차 대전 타입도 좋지만 역시 현대 기갑 장비 중 러시아의 T80U나 T90도 멋있으니 여의치 않다면 그쪽이라도!”

평범한 체형에 적당히 큰 키의 그는 얼룩덜룩한 밀리터리무늬의 군모를 쓰고 양손에는 프라모델로 보이는 상자를 잔뜩 들고 있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그는 아예 내 쪽은 신경 쓰지도 않고 통화를 이어나가며 아까 사장이라 불린 중년의 남성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신경 쓰지 말고, 돌아가도 괜찮네.”

중년의 남성은 눈을 감고 손으로 자신의 미간을 비비며 힘겹게 말했다. 이곳 사람들과 마주쳐서 곤란 한 것은 내 쪽이 아니었던 것인가.......

“그럼, 실례 했습니다.”

사무를 보던 책상으로 돌아가 의자에 털썩 앉는 중년의 남성을 뒤로하고 나는 방금 사람들이 열고 들어온 문을 열고 나가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끝에 올라서자 눈부시게 밝은 햇살과 9월 초 더위의 후끈한 열기가 몸을 휘감았다. 방금 전까지 저 아래 지하에서 중년 남성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마치 없었던 일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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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는 작가 사정상 화요일에 업뎃 됩니다! =분량시망

다다음주는 작가 사정상 휴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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