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럭 부스럭-

 

나는 익숙한 편의점 로고가 그려진 비닐봉투에서 삼각 김밥을 꺼냈다. 삼각 김밥을 손에 든채 괜스레 올려다 본 하늘은 흰색 뭉게구름이 새파란 하늘을 도화지삼아 드문드문 그려져 마치 멈춰있는 듯 했다.

 

“......”

“......”

 

내가....... 아니, 우리가 앉아 있는 곳은 편의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원의 벤치였다. 말이 좋아 공원이지 옹졸하다 싶을 정도의 크기에 한참은 관리 되지 않은 채 방치 되어 있는 미끄럼틀과 그네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공원 이라고 하기에도, 놀이터라고 하기에도 힘든 이름조차 없는 쉼터였다. 그나마 동네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덕분에 삭막한 분위기까지는 아닌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감시하겠다고는 했지만 딱히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옆에 붙어 있을 뿐이라 나는 일단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을 가질 적당한 장소로 생각한 곳이 이곳 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욱 어색한 공기는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여전히 무더운 날씨 덕에 금방 상할 것이 분명한 삼각 김밥을 나는 일단 먹기로 생각하고 포장을 벗긴 뒤 입에 넣어 우물거렸지만 도통 목구멍으로 넘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나 드실래요?”

“......”

 

당연하다는 듯이 가볍게 무시하는군. 아까 전, 내가 공원에 도착해 적당한 벤치에 앉자 같이 따라온 그녀 또한 내가 앉은 벤치에 앉았다. 하지만 일행이라기엔 약간 떨어진,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엔 또 가까운, 애매하게 거리감 있는 자리를 유지했고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이고 무서울 정도로 정면을 쏘아보고 있었다.

 

정말 계속 그러고 있을 거 에요? 뭐 계획이라도 없습니까.”

“......”

 

여전히 대답을 하지는 않고 있었지만 내 말을 듣자 일순 빠르게 복잡한 표정이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것을 숨기지는 못했다.

 

설마 자기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라는 것인가.’

 

역시 원래라면 계속 내가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미행하는 것이 계획 이었지만 도중에 급작스럽게 계획을 수정하기로 결정하였고 나를 직접 감시할 역할로 내 옆에 앉아 있는 이 여자애가 선정 되었다는 것이겠지. , 어찌 됐든 내가 관계되어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에는 이 여자애가 원인인 것이 분명하니까 책임이라는 것 인가. 나는 다 먹은 삼각 김밥의 포장지를 봉투에 다시 넣으며 쓰레기통을 찾는 척 공원 내부와 밖을 두리번 거려봤지만 이 여자애가 속해있는 조직이라고 의심 될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거나 아니면 근처에서 무선연락만 받고 있는 것인가.’

 

사아아아-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흔들리고 부딪히며 시원한 소리를 냈다. 함께 실려 온 시원한 공기가 무겁게 깔려있던 더운 공기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바람 때문인지는 몰라도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방금 전보다 조금 더 빠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햇빛이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 마다 그 사이로 잘게 부서지며 쏟아져 내렸다.

 

그러고 보니 이런 게 얼마만이지.’

 

최근 몇 년간 집 밖으로 나온 것 이라곤 편의점에 출근하거나 뭔가 몇 번 볼일이 있어 외출 했던 것 외에는 전혀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심지어 생필품조차도 편의점에서 출근 겸 해결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주말이 되면 집에 틀어박혀서 하루 종일 노트북으로 인터넷만 해대기 바빴다.

 

와아-

 

아이들이 뛰노는 함성 소리가 조금 멀리서 바람소리에 섞여 은은하게 들려왔다. 나는 벤치에 등을 기대고 힘을 풀자 지금까지 잔뜩 들어있던 긴장도 함께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상황에서 여유라니.’

 

조금 아이러니 했지만 살랑거리는 햇빛에 시원한 바람, 거기다 배에서 적당히 느껴지는 포만감이 기분 좋은 나른함을 느끼게 했다. 방금 전까지 아프도록 복잡하게 돌아가던 머리도 이미 생각을 그만둔 채 멈추어 있었다.

 

눈이......’

 

조금씩 천천히 깜빡 거리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져 견딜 수 없게 느껴졌다. 방금 전 까지 눈에 들어오던 공원의 풍경은 어느새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함성소리도 점점 불규칙적으로 끊기며 들려왔다. 몸이 젖은 솜처럼 무겁고 목 뒷덜미가 나른했다.

좋은 향기......’

 

분명 어디선가 맡아 본적 있는 향기였다. 그것도 최근에. 나는 힘겹게 무거워진 머리를 굴려보았다. 어디서 맡아 본 것일까. 하지만 목과 뺨에 느껴지는 기분 좋고 따듯한 포근함에 이내 다시 나도 모르게 다시 생각이 멈추었다.

 

까르륵 깔깔! 하하하-!

 

다시 나를 의식하게 한 것은 귓가를 울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였다. 아까와는 달리 바로 앞에서 시끌시끌하게 들려왔고 그와 함께 무거웠던 내 머릿속도 조금씩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귓가에 들려오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명확히 구분이 될 정도로 정신이 들자 나는 내가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어느새 잠들어 버린 것인가. 하지만 굉장히 편안하게 잠들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은 더 이 좋은 기분의 여운을 만끽하고 싶었지만 주변의 웅성거림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떴다 떴다!”

일어났다~!”

우우우우~!”

 

눈에 들어온 것은 어느새 노을 진 하늘과 아까까지만 해도 멀리서 뛰어놀고 있던 아이들이 모두 모여 벤치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 둘러싼 채 나를 쳐다보면서 자기들 끼리 웃고 떠드는 광경이었다. 충분히 이상한 광경이었지만 이것보다 더 이상한 것은 아이들이 서 있는 각도였다.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내 눈에 비친 세상의 각도였다. 마치 삐딱하게 기운 것이 고개를 옆으로 꺾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각도였다. 게다가 아까부터 계속 내 뺨과 목덜미에서 느껴지고 있는 이 따듯한 포근함은.......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엄청난 속도로 같은 말을 주문 외우듯이 외쳤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바로 세웠고 내 뺨은 얼마나 따듯하게 덥혀져 있었는지 뺨을 스치는 바람이 차갑게까지 느껴졌다. 나는 차마 돌아가지 않는 목을 억지로 돌려 내가 방금 전까지 내가 기대고 있던 곳을 바라봤다.

 

“......”

 

온 세상을 빨갛게 물들이며 비치고 있는 석양 속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달아오른 얼굴, 찡그리지도 뜨지도 못한 채 부들부들 거리며 눈물이 조금 맺혀있는 눈, 얼마나 잘근 잘근 씹었는지 자국이 나려고 하는 빨간 입술. 꽉 쥐고 있는 주먹과 달리 꼿꼿이 펴고 있는 허리.

 

죽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머리가 생각을 멈췄다.

 

커플이다 커플!”

이런데서 저런 짓 하면 경찰아저씨가 잡아간댔어!”

우우~ 얼레리꼴레리!”

 

내가 상황을 파악하자 구경하고 있던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놀려대기 시작했고 당황한 나는 엉거주춤 일어서서 아이들과 옆에 앉아있는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가 꽉 쥐고 있는 주먹이 미세하게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고 나는 정신이 확 들었다.

이 녀석들! 그만 하지 못해!”

와하하하!”

우우우!”

 

내가 짐짓 화난 듯 달려드는 척 하자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도망갔다. 하지만 금새다시 멀찌감치 모여서 이쪽을 바라보며 웃어댔다.

 

“......?”

, ?”

언제 까지 이런데 계속 앉아 있을 생각이냐고!”

 

버럭 지르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솔직히 주먹이 날아오리라 생각했지만 다행히 아이들이 보이는 앞이라 그런 것인지 주먹대신 엄청나게 무서운 눈빛이 날아왔다.

 

, 시간도 그렇고 그럼 이만 갈까요.”

 

그녀는 당연하다는 소리를 한다는 듯이 다시 한 번 나를 쏘아보고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우리 둘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등 뒤로 한 채 빠른 걸음으로 공원에서 빠져나왔다.

 

일단 걷고는 있지만 이제 대체 뭘 하면 좋지?’

 

공원에 도착할 때 까지만 해도 나와 나란히 걷던 여자애는 이제 완전히 뒤에 떨어져서 걷고 있었고 내 등은 따가운 시선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떻게든 시간을 보낼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고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며 걷고 있던 그 때 눈앞에 여러 가지 건물 들이 줄지어 서있는 대로가 눈에 들어왔다.

 

시계가 없어 정확한 시간을 알 길이 없지만 슬슬 해가 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6~7시 쯤 된 것 같은데. 일단 뭐든 할 게 있겠지. 슬슬 저녁식사 시간이기도 하고.’

 

이 동네에 살게 된 이후로 오며가며 보기만 했던 곳이기 때문에 정확히 뭐가 있을지 몰랐지만 아무 대책 없이 길을 걷는 것보단 나아보였다. 일단 내가 걷는 대로 그 여자애는 따라오고 있었고 딱히 별 말을 하지는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 나는 그대로 대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생각 보다 괜찮잖아.’

 

번화가는 대로를 따라 2~300m 정도 이어져 있었고 건물들에는 쇼핑몰이나 할인마트, 가전용품전문점 등은 물론 건물 뒤쪽 골목길엔 술집이나 유흥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나는 북적이는 사람들을 헤치고 대로 쪽을 걸으며 시간을 때울 적당한 장소가 있는지 물색 했다.

 

국내 최대 통신사 Nofe 텔레콤 경품추첨 행사입니다! 부담가지지 말고 한 번씩 해 보세요~! 1등은 무려 환상의 섬 오키나와 23일 여행권입니다!”

 

길거리는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과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까지 몰려서 혼잡했다. 내 뒤를 따라오는 그 여자애도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인 것 같았다.

 

자자! 부담가지지 마시고 한 번씩들 해보세요!”

어차피 당첨이 된다고 해도 말도 안 되는 약정 같은 게 있겠지.’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대형통신사인 Nofe 텔레콤은 한 기업이 시장을 독점하는 것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기업 이었다. 실질적으로 사회생활에 필수불가결인 휴대전화 통신서비스를 폭리에 가까운 수준으로 제공하고 있었지만 마땅히 대체할 통신사가 없는 사람들로선 울며 겨자 먹기로 사용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사실 이 반도라는 땅 위에 제대로 된 기업이란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지만.

거기 젊은 오빠! 이벤트 참여하고 가세요!”

, ?”

 

젠장. 나도 모르게 눈을 마주쳤고 통신사 티셔츠를 입고 호객행위를 하던 여성 직원이 나에게 달라붙었다.

 

, 잠깐 팔짱은!”

자자! 오키나와 여행권이 기다리고 있다구요~ 2인 동반이니까 혹시라도 당첨되면 저를 잊지 마세요?”

저기, 알았으니까 이것 좀!”

“......뭘 알았다고?”

 

흠칫.

 

뒤에서 나지막이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머, 여자친구분이 계셨나요? 그것도 모르고 실례했네요!”

?”

, 그런 사이 아니......!”

자자, 남자친구 분은 어서 이쪽으로!”

 

이 직원 얼마나 마이페이스인 거냐! 일단 덕분에 넘어가긴 했지만.

 

, 이 다트를 던져서 돌아가는 돌림판을 맞추면 됩니다! 기회는 단 한번!”

 

돌림판엔 갖가지 경품들이 적혀있었다. 물론 꽝이라고 적혀있는 칸이 제일 크고 오키나와는 알림판이 돌아가기 시작하자마자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작았지만. 그래도 막상 던지려고 하니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와 약간의 긴장감이 들어왔다. 나는 살짝 쉼 호흡을 하고 오른손에 다트를 쥔 채 앞뒤로 천천히 흔들다 타이밍에 맞춰 돌림판을 향해 다트를 힘껏 던졌다.

 

!

 

~ 아쉽지만 꽝이네요! 하지만 참가상이 있으니 너무 아쉬워하지는 마시고요! 여기 이 종이에 간단한 설문조사와 핸드폰 번호를 적어주시고 밑에 정보제공 동의서에 꼭! 싸인 해 주세요!”

 

내가 던진 다트는 너무나 정직하게도 꽝이라는 글씨 한가운데를 정확히 맞추었고 직원의 국어책을 읽는 것 같은 위로와 함께 설문조사지라고 적혀있는 종이와 참가 상 스티커가 붙어있는 막대사탕을 건 내 받았다.

 

,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일순간의 도박과 같은 설렘에 내 개인정보를 팔아 치운 셈 인건가. 물론 순순히 넘겨줄 생각은 없지. 나도 전혀 모르는 휴대폰 번호를 적어주마!’

뒤에 계신 여성분도 한번 해보세요!”

 

내가 대충 휘갈겨 쓴 설문지를 건 내 받자 직원은 태세가 돌변하듯 나에게서 그 여자애에게로 달라붙었다.

 

저기, !”

어차피 무료니까 부담 가지지 마시고!”

 

능숙한 직원의 손에 이끌려 돌림판 앞에선 그 여자애의 손에는 어느새 다트가 들려있었다.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긴 하지만 거절 하지 않은 것을 보니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구만.

 

~! 갑니다!”

 

돌림판이 돌아가기 시작했고 그녀는 다트를 든손을 들어 돌림판을 조준했다. 다트에 올바른 자세가 어떤 것 인지 나는 잘 알지는 못하지만 돌림판을 노려보고 있는 그녀는 뭔가 굉장히 안정적이고 익숙하다는 느낌이었다.

 

-!

!

 

다트는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돌림판에 정확히 꽂혔다. 돌림판이 점점 속도를 잃고 서서히 멈추어 가자 다트가 꽂혀있는 칸이 보였다.

 

축하드립니다! 2등 당첨! 입니다! 2등 상품은~ 영화 관람권 2매 입니다!”

 

다트는 오키나와가 상품인 1등 칸과 몇 센티 떨어진 2등 칸에 정확히 꽂혀있었다.

 

정말로 오키나와를 맞출 생각이었던 건가.’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 보면서 나는 살짝 소름끼쳤다.

 

! 여기 설문조사지와 영화 관람권 두 장입니다! , ! 정말 죄송하지만 영화 관람권에 살짝 문제가 있는데요......!”

 

-! 빠앙!

 

어느새 해가 완전히 저물었고 대로는 라이트를 켠 자동차들로 가득 찼다. 가로등에는 불이 들어왔고 번화가는 주말 밤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더 불어난 느낌이었다.

 

“......”

“......”

 

그녀와 나는 커다란 영화 광고가 걸린 영화관을 올려다보며 수많은 인파 속에서 멀뚱히 서있었다.

 

이게 무슨 살짝 문제냐!’

 

경품으로 건 내 받은 영화 관람권은 영화가 지정되어있었고 그 영화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Nofe 텔레콤에서 투자하는 영화였다. 이것 까지는 별 상관없지만 진짜 문제는 이 관람권의 기한이 오늘 자정까지라는 것 이었고 통금시간 덕분에 실제적으로 시간상 지금 당장 사용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 이었다.

거기다 멜로 영화라니.’

 

관람권에 적혀져 있는 영화는 최근 개봉한 전형적인 멜로 영화였고 나름 유명한 배우들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 영화였다. 하지만 최근 반도의 영화시장이 그렇듯 영화는 부진한 흥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영화산업은 소수의 부유한 구매자들만으로도 시장이 돌아가는 사치품과 달리 구매자의 절대다수인 일반시민들의 구매가 없으면 수익을 내기 힘들다. 하지만 반도에 살고 있는 절대다수는 영화와 같은 문화생활에 지출을 할 여유 따위는 없었으며 설사 여윳돈이 생기더라도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음주가무 따위에나 돈을 쏟을 뿐 이었다.

 

어떻게든 홍보해 보려고 티켓을 푼 건가.’

 

나는 극장 전광판에 흘러나오는 영화 시간을 체크했다. 관람권에 적힌 영화는 곧 상영 시작이었다.

 

정말 볼 겁니까.”

“......”

이 영화 그렇게 재미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무엇보다 멜로영화라니......”

버리면....... 잖아.”

?”

아깝잖아! 버리면!”

, 그렇긴 하죠. 그럼 들어갈까요.”

 

버럭 지르는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대답을 했다. 정말로 아까부터 계속 그렇게 갑자기 소리를 질러대면 진짜 언젠가는 심장이 멈출지도 모를 일이다.

 

우웅- 우우웅-

 

[본 영화 관람에 앞서- 비상 대피통로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영화관 안은 생각은 했지만 주말과 어울리지 않게 한산했다. 드문드문 젊은 커플들이 앉아 있을 뿐이었고 덕분에 상영 직전에 들어왔지만 나쁘지 않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와삭 와삭-

 

내 옆자리에 앉은 그녀는 카라멜 팝콘이 마음에 들었는지 팝콘 통을 아예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열심히 손으로 집어서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산 건데 같이 먹자고 말이라도 해주지.’

 

우리는 영화관으로 들어와 영화 관람권을 티켓으로 바꾼 뒤 잠시 앉아 상영시간을 기다렸었고 마침 맞은 편에 있던 매점의 팝콘기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을 나는 차마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쪼르륵-

 

나는 애꿎은 콜라만 들이켰지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게 그녀는 이미 나는 안중에도 없이 영화관의 스크린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영화관에 들어온 이후로 그녀는 더욱 말 수가 줄어들어있었다. 아니, 줄어들었다고 하기 보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마치 영화관에 처음 와 본 사람 같이 두리번거리며 나를 졸졸 따라올 뿐이었다. 덕분에 티케팅부터 상영관과 좌석을 찾는 것 까지 전부 내가 해결해야 했다.

나도 중학생 때 이후로 영화관은 처음이지만.’

 

광고가 끝나고 암전과 함께 영화가 시작했다. 영화의 내용은 평범한 남자 주인공이 우연히 정의로운 사람들과 악의 조직의 싸움에 휘말리게 되어 정의로운 사람들과 함께 싸우던 도중 악의 조직 보스의 딸과 사랑을 하게 되고 우여 곡절 끝에 헤어지게 되지만 결국엔 다시 재회하여 사랑을 이루는 내용이었다.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던 거냐.’

 

문득 영화 상영 중간에 바라본 옆자리의 그녀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차갑고 날선 표정이 아닌 여느 또래의 소녀와 같은 얼굴이었다.

 

나가시는 문은 이쪽입니다!”

 

이윽고 영화가 끝이 나고 엔딩 크레딧과 함께 영화관 안에 불이 켜졌다. 내가 일어서자 아직 여운이 남았는지 머뭇거리던 그녀는 따라 일어서서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꼬르륵-

 

생각보다 꽤 늦은 시간이 돼버렸다.

 

조금 늦었지만 저녁식사라도 할 생각인데 먹을 겁니까.”

“......”

 

먹겠다는 뜻이군. 일단 음식점을 찾는 것이 급선무이다. 식사 하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조금 지체된다면 통금시간이 문제가 될 것 같았다.

 

생각보다 안보이네.’

 

영화관 뒤쪽 골목은 술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지만 식사만 해결 할 수 있을 것 같은 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점점 촉박해 졌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적당히 저렴해 보이는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선술집은 사람이 가득 차 있었지만 다행히도 구석진 곳에 작은 테이블이 비어있어 앉을 수 있었다. 가게는 이미 취한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우롱하이와 우롱차 한잔씩, 그리고 닭 꼬치 두 개, 샐러드 한 접시랑 우동 둘로 주세요.”

 

영화관에서 나온 그녀는 어느새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어차피 뭘 먹을 거냐고 물어봐도 대답할 것 같지는 않아 나는 적당히 메뉴를 주문했다. 앞으로 한 달간 절대절약이 확정되는 순간이군.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우동을 제외한 나머지 음식과 음료가 먼저 나왔다. 슬슬 허기졌던 나는 샐러드를 내 접시에 조금 덜어놓고 닭 꼬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닭 꼬치는 적절하게 소금간이 되어 짭짤하면서도 담백했다. 나는 젓가락으로 남은 닭고기를 꼬치에서 빼내면서 내일 일에 대해 고민했다. 일단 오늘 하루는 넘겼다고 해도 내일 하루와 결정의 날인 월요일이 남아있었다. 어떻게든 이 사람들과 더 이상 엮이지 않으면서도 나에게 피해가 오지 않을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오늘은 그래도 어떻게든 보내긴 했군.’

 

앞으로 조금만 더 있으면 그리운 내 이불위에 누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위안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한일들을 생각 해 보니까 이거, 마치 데이......’

주문하신 우동 나왔습니다!”

 

나는 점원이 외치는 소리에 놀라 살짝 어깨를 떨었다.

 

바보 같은 생각을 할 뻔 했다! 3년간 이불 팡팡 감이 될 뻔 했어!’

 

점원이 들고 온 우동이 김을 모락모락 내며 테이블에 놓여졌다. 방금 짠 꼬치고기를 먹어서인지 목이마른 나는 주문했던 우롱하이 잔을 집었다.

 

?”

 

다르다. 맛이 다르다. 다르다고 하기 보다는 맛이 빠져있다. 아주 명확한 알코올 맛이. 내가 마신 것은 우롱차에 술을 탄 우롱하이가 아닌 우롱차 그 자체였다.

 

설마!’

 

나는 내 손에 들고 있던 잔에서 시선을 돌려 맞은편 앉은 그녀의 앞에 놓여 진 잔을 보았다. 이미 잔은 깨끗이 비워져 있었고 아직 채 녹지 못한 얼음만 달그락 거리고 있었다.

 

카라멜 팝콘을 그렇게 먹어대더니!’

 

영화상영 내내 팝콘을 먹은 그녀는 갈증이 났던 것이 틀림없었고 음료가 나오자마자 벌컥 벌컥 마셔대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술을 먹어본 적이 없었던 것인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대로 전부 마셔버린 것 이 분명했다. 그녀의 볼에 홍조가 돌기 시작한 것을 보자 나는 굳이 더 확인할 필요성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

 

“......”

“......”

 

나는 방금 전까지 즐거운 식사의 장이었던 테이블이 살얼음판으로 바뀌는 마법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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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조절 실패의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세이브 원고가 없는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표지는 가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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