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우우웅-

얼마나 잠들었던 것 일까. 귀를 울리는 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환한 조명에 눈이 부셨다.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보니 인쇄기들이 소리를 내며 진동하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이제 막 열한 시 반을 넘어 가고 있었다.

“오, 이제 일어났는가.”

소파 뒤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자세를 고쳐 잡고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키가 그리 커 보이지는 않지만 운동으로 다져져 탄탄해 보이는 몸을 가진, 인자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 책상에 앉아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어제 말한 여기서 지내는 사람들 중 한명인가. 뭔가 범죄 조직원 같은 이미지를 연상했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이미지였다.

“아, 예, 실례 했습니다.”

“잘 자고 있는데 깨워서 미안하네. 오랜만에 들어온 일거리라서 말이야 인쇄기 예열을 해줘야 하거든. 뭐 어차피 슬슬 일어날 시간이기도 하고, 조금만 기다리고 있게”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이야기하던 그 중년의 남성은 잠시간 글씨를 끄적이다가 툭툭 쳐 정리하고 내 맞은 편 소파에 와서 앉았다.

“그래, 우리 아이와는 무슨 관계지?”

“예?”

그 남성은 소파 앞에 놓여있는 탁상에 손을 깍지 껴 올려놓고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대화가 출발했다는 것이 한 번에 와 닿는 첫 마디였다. 어제 그 난리를 친 여자애와 보통관계가 아닐 수가 없는, 수상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직접 관리 하는듯한 지하 건물에서 처음 받은 질문이 ‘이곳이나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영원히 입을 닫아 줄 수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안전은 보장 못 하네’ 와 같은 무거운 이야기가 아니라 무언가 굉장히 근본적으로 고민하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그, 무슨 관계냐고 물으셔도......”

“어허! 남자가 소신이 있어야지! 설마 그런 생각도 없이 여자를 만나고 그런 것은 아니지? 남자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해! 물론 어젯밤 사이에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다면 자네랑 곱게 이야기 할 생각은 없네만, 모습을 보아하니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아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걸세.”

역시 생각대로 대화는 전혀 종잡을 수 없이 흐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신다면 뭐, 평범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그보다 설마 이 남자는 그 여자애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는 것인가? 일단 이 남자에 대해 알아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저, 혹시 그, 아버님 되십니까?”

내가 잠자코 듣고만 있을 거라고 생각 했는지 잔뜩 무게 잡으며 이야기하던 남성의 얼굴에 잠깐

당황한 기색이 흘렀다.

“음, 아, 그건 아닐세, 하지만 그 아이의 부모 되는 사람과 절친한 사이였지. 그리고 사정이 생겨 어렸을 때부터 내가 친 딸처럼 키웠다네.”

중년 남성은 다시 의기양양한 듯 이야기를 하였다. 일단은 보호자라는 건가.

“우리 아이도 얼마큼 장성했고,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네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남자를 데리고 이곳으로 올 줄은 몰랐네. 적어도 사람의 예의라는 것이 있고 절차가 있으니까 말 일세. 그 아이의 불찰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자네는 이곳에 왔다는 것은 사정을 들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거 아닌가. 자네 쪽이 조금 더 연상인 것도 같고. 그, 사람의 첫 인사란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 이야!”

“저, 말씀 중에 실례지만 그 여자애는......”

“아까 아침 일찍 집으로 돌아갔네. 어렸을 때는 여기서 지냈지만, 지금은 장하게도 혼자 생활 하고 있지. 자네, 또 이 말을 듣고 질 나쁜 생각을 하면 좋지 않을 걸세!”

비약이 심하십니다. 저는 아직 그 여자애의 이름도 모릅니다. 라고 말했다간 지금 상황에선 어떤 말이 돌아올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겠지.

“말씀 중에 거듭 죄송합니다만, 혹시 저에 대해 이야기 들으신 것은 없으십니까.”

“자세한건 자네가 일어나면 물어보라고 했네만.”

관자놀이 언저리가 지끈 거렸다. 일단, 타인과 이렇게 대화 하는 것이 굉장히 오랜만인데다가 그 내용이 도저히 평범한 내용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 어디서부터 대화의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 마시고 어제 밤, 처음 여자애와 만났을 때부터 오늘 아침 눈을 뜨기 까지 있었던 일을 할 수 있는 한 상세하게 설명했다. 파스 붙여준 이야기만 빼고.

“......”

내 이야기를 듣던 중년 남성의 표정은 처음엔 놀라는가 싶더니 당혹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윽고 내가 이야기를 마치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 녀서억- 떠넘긴 거냐아- 내 잘못도 있지만 서도-.”

눈앞에 앉은 중년의 남성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들릴까 말까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오해해서 미안하네,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하지.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방금 전 이야기처럼 가볍게 듣고 말 이야기가 아니네.”

방금 전 이야기도 충분히 무거웠습니다.

“자네가 어제 겪은 일도 있고, 나이도 젊으니 이해가 빠르리라고 생각하네만, 이야기를 듣고 자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따라 여러 가지로 자네의 상황이 변할 수 있으니 주의해서 들어주게.”

일순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방금 전 까지 딸 걱정하는 아버지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확실히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어제의 사건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면 분명 이 사람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범죄 쪽으로 연관이 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들의 얼굴은 물론 근거지까지 알고 있다. 입막음 당하려 드럼통 속에 들어가 저수지에 던져져도 이상하지 않으나 아직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것은 뭔가 나에게 이용가치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고 순응하는 척 해서 이곳을 빠져 나간 뒤 신고를 하든지 하는 것으로 생각이 정리되자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

“우리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활동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군 일세.”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앞에 앉은 중년 남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혀 농담을 하거나 하는 표정이 아닌, 진지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단어는 생소했지만 자주독립, 독립군 같은 단어는 들어본 적이 있는 단어였다.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후 생겨난 반 정부주의, 과격민족주의 테러집단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단어 중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독립군’ 이었으며 그들이 ‘독립운동’ 이란 것을 하며 외치는 구호가 ‘자주독립’ 이었다. 물론 이 단어들이 단 한 번도 신문이나 정부기관의 공식적인 서류에 등장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의 활동은 무정부주의 테러리스트 집단 따위와 같은 자들의 소행으로 보도될 뿐이었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집중적인 토벌작전으로 사그라드는가 싶었지만 지속적인 생명력으로 암암리에 세력을 불려나가다 1985년 5월 18일 광화문을 중심으로 기습적인 무장봉기를 시도하며 시민들의 2차 봉기를 유도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출동한 무장경찰, 군 헌병대와 3일 가까이 시가지에서 총격전을 벌인 끝에 일망타진되어 그 명맥이 끊기다시피 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민간인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고 분노한 일본 정부의 후속 조치로 인해 엄청난 사회적 파장이 몰아 닥쳤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람들은 독립군이나 독립운동에 대한 거부감,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일종의 광신 종교집단 같이 보는듯한 인식과 혐오감이 팽배했고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조선의 자주독립과 같은 이야기는 사회에 적응 못한 망상가들, 혹은 나이들은 노인들이 중얼거리는 현실적이지 못한 노망쯤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후에도 현재까지 간간히 독립을 주장하며 정부요인이 살해 되거나 소규모 사제 폭탄테러 같은 사건이 종종 벌어졌지만 사회 부적응자에 의한 개인적 범죄 행위 쯤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당치도 않은 곳과 관련돼 버렸다!’

등에서 땀이 흘렀다. 어쨌거나 이들은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범죄자들로 규정되어 있으며 일본 정부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행정 권한이 자치정부로 이양된 후에도 특별형법인 파괴활동방지법을 강화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이들에 대한 직접적인, 통상의 범죄자들과는 전혀 다른 사법처리 절차를 거치는 특별관리 대상으로 지정된 사람들이다. 만약 어제 그 남자들에게 잡혔더라면 아무리 결백을 주장해도 최소 반년은 지하실에 갇혀 바깥 공기는 마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잘못 휘말리면 평생 교도소 천장을 바라보며 잠들 수 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리와 함께 일했으면 좋겠네.”

역시나 이다. 확실히 입막음으로 이것 보다 확실한 방법이 없다. 공범이 되면 입을 열고 싶어도 열 수 없게 된다.

“자네가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우리가 서로 간에 믿을 수 있는 방법이 이것 밖에 없는 것을 이해해 주게. 내 목숨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사가 달려있는 것이니.”

진퇴양난이다. 어떻게 해야 할 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이대로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미안하네. 원래라면 이런 식으로 권유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 방법이 잘못 된 것이 마음이 아프군. 조금 이야기를 바꾸어 보겠네. 자네, 살면서 자네가 누구인지 고민해 본적이 있나?”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기에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대답하기 이상한 질문 이었나? 흠, 좀 더 구체적인 질문으로 바꾸어 보겠네. 자네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사회의 부조리나 모순에 부당함을 느껴 본 적이 있나?”

나는 여전히 대답 할 수가 없었다.

“우리 민족이 이미 일본의 지배를 받은 지 1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네. 자치정부는 일본 정부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지. 이제 우리가 자주적인 하나의 국가로서 존재해 왔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던 사람은 이제 이 땅에 단 한명도 남아있지 않네. 일본인으로 태어나서 일본인으로 죽어가지.”

한자로 쓰여 지는 일본식 이름. 그리고 그것이 적혀있는 황국신민증. 여권 국가 란에 적혀있는 EMPIRE OF JAPAN. 어느 누가 봐도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반도인들.

“그렇다면 자네는 일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우는 노래는 기미가요이며 일본어로 쓰여 진 교과서로 일본의 역사를 배우며 자란, 우리 스스로도 일본인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자들은 바로 일본 본토의 ‘진짜 일본인’들 이었다. 세계적으로 친절하고 예의바르다는 일본인들도 반도인들 앞에서는 표정이 달라졌다. 설사 겉으로는 표현 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반도인 들을 의식의 깊은 곳에서부터 멸시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반도는 일본제국에 빌붙어 먹는 기생충쯤 이었다. 인터넷에서는 자신들의 혈세가 반도인 들에게 혜택으로 돌아간다는 불만을 표출하는 글이나 이와 관련된 시위대의 사진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일본인들의 세금이 반도에 쓰인 부분은 반도를 관리하기 위한 정부행정기관이나 군대의 비용으로 쓰이거나 일본 기업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인프라 사업이 대부분이었고 자치정부가 세워진 이후로는 오히려 상황이 역전되어 자치정부가 반도에서 거둬들인 세금으로 반도에 주둔중인 일본 군 시설에 방위비라는 명목으로 제출하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경제 부문에서는 반도에서 소비되는 거의 모든 소비재들은 일본 기업에 의한 폭리수준의 독점형태로 일본 기업은 막대한 이익을 올렸고 일본 내부에서 유통되는 저렴한 가격의 물품들은 일본 기업들이 반도에 세운 공장에서 헐값의 인력으로 생산된 물품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세계적인 일본의 삶의 질 수준에 한 몫 하였다. 하지만 정부나 언론에서 사실그대로 이런 부분들을 언급 할리는 만무했다. 오히려 통계 수치에 반도를 교묘하게 끌어들여 일본의 성장에 반도가 방해하는 듯한 기사를 써냈고 정치인들은 이를 이용해 사회적 불만이나 관심을 반도를 향해 표출 시키도록 했다.

“자네는 본토에 가 본적이 있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금전적인 문제로 인해 일본 본토뿐 아니라 국외로의 여행은 일반인들에게는 사치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일본 본토 방문에 발목을 잡는 것은 절차였다. 황국신민증은 두 가지로 나뉘어졌다. 본토인이 지급받는 1급 신민증과 반도인이 지급받는 2급 신민증. 본토인들은 항공기나 선박티켓에 신상정보만 기입하면 반도에 문제없이 자유롭게 왕래 할 수 있지만 반도인이 본토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최소 3개월 전 관련기관에 신고 후 허가가 떨어지면 상세한 일정정보와 연락처, 숙박하는 곳의 정보 및 여행 중 정기적으로 관련기관에 신고를 해야 하며 장기체류의 경우 절차는 더욱 복잡해졌다. 2급 신민증을 가진 반도인이 본토에서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현대에 들어서 국제 사회적으로 신민증이나 기타 반도인에 대한 차별에 대해 인권 문제가 제기 되었을 때 자치정부가 나서서 일본 정부를 감싸는 모습을 보이자 외국의 인권단체들은 반도의 문제에 대해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어렸을 적 우연찮은 기회로 부모님과 함께 본토에 갈 기회가 생겼었지. 여행을 가서 느낀 것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굉장한 충격이었다네. 나나 부모님이 일본사람에게 말을 건넬 때 그 사람들의 표정이란 말로 형용하기 힘들었어. 뭐, 지금이야 워낙 세월이 흐르고 미디어 매체의 발전으로 이제는 반도인이나 일본인이나 말을 하는데 있어 발음이나 억양 차이가 없어 구별하기 힘들지만 그 시절에 배웠던 일본어에는 아직 조선말의 억양이 묻어나왔던 걸세. 호텔에 가도, 식당에 가도, 우리가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면 하나같이 같은 얼굴을 하더군. 그 때 처음으로 느꼈네.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다시 반도에 들어왔을 때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네. 필사적으로 일본어를 공부하고 일본문학을 공부하고 일본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 어떻게든 출세해보려 힘 있는 일본인들 앞에 줄을 서는 어른들. 성공해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반도를 떠나는 것이 최종적 목표인 민족이 사는 곳이었지.”

출세해 일본 본토에서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 그렇다 2급 신민증자가 일본 본토에서 거주 할 수는 없어도 1급 신민증을 발급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는 고위 공직자가 되거나 박사학위를 취득해 그 분야에 영향력 있는 연구 결과나 논문을 발표 한다 던지, 예술이나 체육 분야에서 국제적인 실력을 가지고 확약을 한다 던지 일본 공기업이나 국가 선정 기업에 일정 금액 이상을 투자 하거나 1급 신민증을 지닌 일본인과 결혼을 하는 등의 방법이 있었다. 반도에서 성공한 삶은 곧 1급 신민증을 가지고 반도를 떠나 본토에서 진짜 일본인처럼 사는 것을 말했다. 그리고 반도인 들은 두 가지 무리로 분류 되었다. 어떻게든 성공해보려 힘을 다해 발버둥치는 사람들, 그리고 이미 경쟁에서 도태되어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문제인 사람들. 물론 개중에는 부모덕으로 수월하게 꿈을 이루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루하루 성공하기 위해, 먹고살기 위해 모든 힘을 탈진한 사람들은, 사회에 어째서 이런 부조리함과 차별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나도 언젠가는 성공한 사람들처럼 이 사회에 올라서서 아랫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심에 이런 체제를 거부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이었다. 마치 일본의 메이지 유신 시절 신분제 폐지 정책을 천민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반대했던 평민들처럼.

“능력 있는 인재들은 이 땅을 떠나가고, 떠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저 지배당하는 악순환이 끊어지지 않고 반복되고 있는 걸세. 그럼, 우리는 이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정말 할 수 있는 일은 없는가?”

잠시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일단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줌세.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지. 뭐, 자네가 거부한다면....... 어떻게 상황이 변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말이야.”

결국은 협박으로 끝나는 것인가.

“일단 돌아가 보도록 하게. 그렇다고 자네를 믿는 건 아닐세. 자네가 이곳에서 나가서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모르는 것이니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행동을 취할 것이네. 부디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그렇다. 지금 여기서 내 대답을 듣고 나에 대한 처분을 결정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비록 1:1의 상황이지만 저 사람이면 나 정도는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주머니 어딘가에 무기가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나를 풀어주며 생각할 시간을 주는 이유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은 스스로 바라는 소원이 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지 협박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부디 짧은 시간이나마 생각을 정리하며 자네가 진심으로 민족을 위해 일 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램일세. 시간은 이번 주말 정도면 충분 하겠지.”

말을 마친 중년의 사내가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만. 일단 그 옷은 빌려 줄 테니 다시 여기에 왔을 때 돌려주도록 하게. 이제 슬슬 우리 식구들도 올 시간이고, 식구들과 마주치면 또 귀찮은 일이 생길 수 있으니 그만 빨리 돌아가 보게.”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함께 있는 중년의 남성만으로도 충분히 심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중에 다른 사람들까지 더 늘어나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이 중년의 남성이 이곳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배려해 주는 것으로 보면 이 사람과는 달리 거친 사람들 일 수도 있는데다가 나를 여기서 내보내주는 것에 반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마음이 급해졌다. 중년 남성이 자리를 비켜주자 나도 자리를 일어나 내 옷이 담겨있는 쓰레기봉투를 챙기고 있을 때였다.

쿵쿵쿵쿵

현관문 넘어 철제 계단이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벌써 돌아온 것인가!

나는 봉투를 챙기던 손을 멈추고 잔뜩 긴장한 채 문을 바라보았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철커덩-!

계단을 내려오던 사람은 이윽고 큰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들어왔고 나는 그 사람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응? 자넨 누구? 손님인가? 후욱, 후욱! 뭐, 신경쓸 때까 아니지! 아! 사장 돌아왔습니다!”

170 후반대의 키, 약간 살집 있는 몸 얼굴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의 옷차림새를 제외 한다면. 그가 입은 상의 한가운데는 수명의 미소녀와 애니메이션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어깨에는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미소녀들이 잔뜩 그려져 있는 보자기를 걸치고 있었고 양손에 들려있는 쇼핑백에서는 미소녀 포스터가 꽂혀 있었다.

“전쟁이다 전쟁! 감히 다음 라이브 일정을 겹치게 하다닛! 폭도 놈들 P들에 대한 도전이닷! 지금 당장 이 일에 대해 인터넷 실황 게시판에서 이 일을 P들과 의논해야!”

기세 좋게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나를 거들 떠 보지도 않은 채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쿵쿵쿵쿵

숨 돌릴 틈도 없이 또 다시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려오는 소리는 혼자인데 말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전화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철커덩!

“오오! 그게 정말이오? 다음 밀리 페스티발 스태프라니! 대단하오! 꼭 가겠소! 역시 다음 페스티발 때는 타미야 사에서 출시한 타이거 전차의 후기형을 꼭 사야겠소! 물론 2차 대전 타입도 좋지만 역시 현대 기갑 장비 중 러시아의 T80U나 T90도 멋있으니 여의치 않다면 그쪽이라도!”

평범한 체형에 적당히 큰 키의 그는 얼룩덜룩한 밀리터리무늬의 군모를 쓰고 양손에는 프라모델로 보이는 상자를 잔뜩 들고 있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그는 아예 내 쪽은 신경 쓰지도 않고 통화를 이어나가며 아까 사장이라 불린 중년의 남성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신경 쓰지 말고, 돌아가도 괜찮네.”

중년의 남성은 눈을 감고 손으로 자신의 미간을 비비며 힘겹게 말했다. 이곳 사람들과 마주쳐서 곤란 한 것은 내 쪽이 아니었던 것인가.......

“그럼, 실례 했습니다.”

사무를 보던 책상으로 돌아가 의자에 털썩 앉는 중년의 남성을 뒤로하고 나는 방금 사람들이 열고 들어온 문을 열고 나가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끝에 올라서자 눈부시게 밝은 햇살과 9월 초 더위의 후끈한 열기가 몸을 휘감았다. 방금 전까지 저 아래 지하에서 중년 남성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마치 없었던 일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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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는 작가 사정상 화요일에 업뎃 됩니다! =분량시망

다다음주는 작가 사정상 휴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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