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일인 오늘, 히사히토 왕자님의 생일을 맞아 축하파티가 도쿄 황궁에서 성대하게......’

우웅-

낡은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 사이사이에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가 섞여서 귓속으로 들어왔다. 9월에 접어들었음에도 아직 가시지 않은 무더위는 편의점 매장의 낡은 에어컨이 감당하기엔 벅찼는지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등에는 땀이 흘렀다. 원래대로라면 신나는 아이돌 노래가 매장에 끊임없이 울려야 하지만 매일같이 이곳에서 일하는 나에게 그것을 하루 종일 듣는 것은 상당히 고역이었다. 특히 하나같이 끈적거리는 목소리로 같은 귀여움을 토해내는 요즘 노래들은 이런 날씨에 듣기엔 짜증만 솟구치게 할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점장이 자리를 비운사이 노래대신 라디오를 틀어놓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손님이 들어올 때 까지 온몸을 늘어뜨린 채 멍하게 기대어 서 있는 것이 나의 베스트 포즈였다. 그리고 일을 마치면 맥주와 삼각 김밥 한두 개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보다 잠이 드는 것이 나의 하루 일과의 마지막 이었다.

‘내일부터 주말인가.’

나의 유일한 취미이자 안식처는 인터넷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잦은 이사와 좋지 않은 가정형편은 내가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많은 것을 앗아갔다. 그 후로 나는 시간이 남을 때면 인터넷을 할 뿐이었다. 밖으로는 나가지 않는다.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시간을 죽이며 어제 봤었던 것 같은 글을 또 읽으며 의미 없이 하루를 보낸다.

‘지루하다. 앞으로 마감까지 30분’

그래도 이렇게 일을 하고 있는 나는 사실 운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조선자치반도 일명 ‘반도’는 세계적인 실업률에 시달리고 있으니까.

1910년, 조선과 일본의 합병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를 발판으로 ‘천황’ 히로히토는 대일본제국을 이루었고 2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으로 참전하여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었다. 그 후 이어진 냉전시대에서 일본은 입헌군주제의 국가로 탈바꿈하여 자유진영인 미국과 공산진영의 소련 사이에서 명실상부 ‘제 3세력’ 으로서 미국과 소련의 사이를 조율하며 G3로서의 입지를 다진다. 대일본제국 대부분의 식민지는 1960년대 즈음, UN과 세계사회의 눈총으로 해방되었지만 ‘조선반도’에 대해서는 식민통치가 1990년대 까지 이어졌다. 그 후 소련의 붕괴와 함께 세계적으로 해방의 물결이 일자 일본 정부는 1994년 조선반도자치정부 수립을 발표하며 행정상 조선반도의 독립을 세계에 알렸다. 하지만 이미 지난 80년간의 일본의 식민통치로 인해 조선반도는 경제적, 사상적으로 일본에 귀속 된지 오래였다. 조선반도의 거의 모든 주요 산업은 일본대기업들의 값싼 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하청 공장과 일본에 안정적인 식량 확보를 위한 농수산물 산업으로 이루어졌다. 일본 내의 수요와 기업의 의도에 따라 조선반도의 경제는 요동쳤고 하루아침에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길거리에 내몰리는 것은 일상다반사였으며, 그럴수록 일본에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아사히 맥주를 마실까.’

 

평일 근무인 내가 5일간의 근무가 끝나고 금요일 저녁에 사는 맥주는 쥐꼬리 같은 월급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치였다. 계산대 정면의 벽에 걸려있는 시계는 이제 막 오후 열시 반을 막 넘기고 있었다. 시계에 집중하니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째깍째깍 거리는 시계소리가 귀속에 들어왔다. 30분 후면 점장이 마감을 위해 매장에 들러 정산을 할 것이다. 그 동안 나는 가게 문을 닫고 뒷정리를 한다. 그리고 11시 반이 되면 퇴근을 하여 통금 시간인 12시 이전에 집에 도착해야한다. 집이 15분 정도 거리에 있기 때문에 통금시간 때문에 큰 부담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딸랑-

“어서 오십시오. 세븐- 투엘브입니다.”

에어컨, 라디오, 그리고 시계가 만들어내는 조용한 하모니 속에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근무시간 내내 이 소리는 듣는 것 자체로 피곤해지는 미지의 힘을 가진 것 같다. 내 목은 자동 반사적으로 머릿속에 입력된 인사말을 내보냈다.

“......”

시계에 고정되어 있던 내 시선은 매장의 문을 열고 들어온 검은색 형체에게 돌아갔다.

깊게 눌러쓴 검정색 모자, 검정색 집업 후드에 어두운 진청바지 그리고 검은색 운동화...... 하지만 그중 나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허리춤 까지 늘어지는 수려한 흑발이었다.

‘모자 때문에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데, 위험하게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건가.’

조금은 기묘한 손님과 벽에 걸린 시계를 번갈아 보며 나는 남은 시간을 저울질 했다. 이대로라면 저 여자애가 오늘 내 마지막 손님이 될 것 같았다. 이렇게 손님도 오지 않는 편의점이 용케 망하지도 않고 버티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

“......”

벌써 20분 째다. 뭔가 살 생각이 있어서 들어 온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매대 앞에서 빙글 빙글 돌며 자꾸만 카운터와 문밖을 힐끔힐끔 볼뿐 나는 뭔가 안 좋은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도둑질을 할 셈인건가!’

분명 내 눈치를 보다 매점 근처에 사람이 없어 보일 때쯤 물건을 들고 전력으로 도망칠 것이라는 망상에 생각이 미치자 왠지 모를 긴장감에 손끝이 저려왔다. 마침 이 근처는 어둡고 복잡한 골목이 많아서 한번 놓치면 붙잡기 어렵다. 늦은 시간이라 매점 밖으로 보이는 사람이라곤 길 건너편에 성인 남성 두 명이 서성이고 있는 것 외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도둑질 같은 걸 하든지 말든지 전혀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내 근무시간에 이런 일이 발생한 다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인 것이 점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면 내 퇴근시간이 연장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인데다가 없어진 물건은 내가 배상해야한다. 거지같은 근로계약서는 근무 중 발생한 도난 사건은 근무자에게 배상책임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최악의 경우 통금시간 전에 제때 집에 도착하지 못하게 되면 골치 아픈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쪽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을 눈치 챘는지 다시 내 쪽을 바라보았고 눌러 쓰고 있던 모자 밑으로 살짝 눈이 마주쳤다.

‘윽’

나는 눈을 마주 친지 1초도 못 돼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뭔가 굉장히 매서운 눈빛 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내 월 6만엔의 월급에서 조금이라도 더 깎인다면 오늘 맥주고 뭐고 당장 저녁으로 때울 삼각 김밥조차 살 여유가 힘들어진다. 네가 어떤 사정을 가지고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도둑질을 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너 같은 사람이 지천이다. 나도 더 이상 물러 설 수 없지.

“저, 손님? 곧 마감시간이라 물건을 고르셨으면 계산 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 종일 입 밖으로 내뱉은 말 중 가장 긴 말이었다. 용케 발음이 꼬여서 나오지 않았다.

“......”

눌러쓴 모자 밑으로 매섭게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최대한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상당히 오랜만에 지어보는 표정이라서인지 아니면 인위적으로 지은 표정이라서인지 입 꼬리 끝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짧은 정적이 흐르고 뭔가 결심했는지 들릴락 말락 가벼운 한숨을 내쉬곤 천천히 계산대를 향해 걸어왔다. 그래 체념하고 다른 데나 알아봐라! 이미 시간이 늦어서 고픈 배를 부여잡고 잠들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거기까지 신경 써줄 여우는 없다.

“저, 손님 고르신 물건은?”

덜컹! 짤랑짤랑-!

거세게 밀어젖혀진 문에 달려있던 작은 종이 깨질듯이 울려댔다. 젠장! 당했다! 계산대로 걸어오는 척하다가 그대로 문을 열고 뛰쳐나가다니! 아니, 그보다 어느새 물건을 훔친 거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보지 못했는데, 그 새 옷 속에 숨긴 건가! 나의 몸은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계산대를 뛰어 넘어 똑같이 문을 박차고 나가고 있었다.

“어이쿠-! 놀래라! 으잉? 야스무라, 자네 어디가?”

“으억, 점장님!”

문을 박차고 나오자마자 정면에서 오던 점장과 부딪힐 뻔 했다.

“이제 마감해야되는데, 매장 비우고 어디 가려는 거야?”

“점장님! 지금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까 나중에 이야기 할게요! 금방 올 테니까요!”

점장의 어깨 넘어 그 빌어먹을 도둑년이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금방 갔다 올게요!”

“어이! 지금 뭐하는!”

비록 최근 몇 년간 제대로 달려본 기억이 없지만 그래도 이 근방 지리는 확실히 알고 있다. 행색을 보아 하니 이 동네 주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승산은 있다!

도둑년이 들어간 골목길은 안쪽에서 다시 Y자로 갈라지는 길이었고 내가 골목길 입구에 막 들어섰을 때 그 도둑년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달려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바보같긴! 어차피 그 길은 왼쪽으로 가는 길과 다시 만날 수밖에 없게 돼 있지! 게다가 왼쪽으로 가는 것이 더 빠르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주마!’

이 도둑년은 역시나 이 동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달린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미 숨이 턱에 차올랐지만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힘든지도 모르고 구불구불하고 좁은 골목길을 전력으로 내달렸다. 이윽고 갈라졌던 길이 다시 만나며 넓어지는 지점이 눈에 들어왔다.

‘골목길이라 가로등도 적어서 어둡지! 주차 되어 있는 차 뒤에 숨어 있다가 잡아 주겠......’

“끄컼!”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말이 끝나기도 직전, 내 목에서 쥐어짜는 것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몸이 붕 뜨는 것이 느껴졌고 방금 전까지 길바닥을 보고 있던 내 눈에 새카만 하늘과 허공을 가르고 있는 두 다리가 들어왔다.

‘크......크로스 라인......’

실로 내 목이 쥐어짜진 것도 맞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이 소리를 낸 원인은 바로 내가 숨으려고 했던 차 뒤에서 검은색 형체가 튀어 나와 자신의 팔로 풀스윙 하여 내 목을 가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눈 깜짝 할 새에 벌어진 것이었다. 나는 거부할 수 없는 중력으로 인해 지면과 등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쿵-!

“끄어억!”

골목을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런 상황에서 머릿속에서는 등과 목 중 어느 쪽을 부여잡고 아파해야 하는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금세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 할 만큼 등짝과 목에 덮쳐 오는 통증, 그리고 턱 끝까지 차올랐던 숨이 뒤죽박죽이 되어 전해지는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입에서 침이 흐르고 눈에선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흐려진 시야에 그 도둑년이 나를 놔두고 몇 걸음 뛰어가다 문득 멈추고선 다시 나에게 뛰어 오는 것이 보였다.

“커허윽! 무, 무슨!”

“너 뭐야? 왜 날 따라온 거지?”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것을 본 나는 또 다시 무슨 해코지를 해서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 짐작하고 몸을 웅크렸지만 뜻밖에도 날라 온 것은 주먹이나 발길질이 아니라 멱살잡이였다.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지만. 그보다 지금 와서 발뺌이라니 늦은 것도 한계가 있지! 라고 하기엔 뭔가가 이상하다. 어두운 골목길이라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목소리에는 당황과 짜증이 섞여있었다.

“너, 너 도둑! 끄억, 이거 좀 놓고! 억!”

“......이런 멍청이가!”

도둑에게 도둑이라고 했을 때 당연히 나와야 하는 반응인 변명이나 부인의 대사가 나오길 일말의 기대를 했지만 들려온 대답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대답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그 여자애의 행동은 더욱 이외의 것 이었다. 여전히 내 멱살을 잡은 채 나를 질질 끌면서 달리기 시작한 것 이었다. 나는 멱살을 잡은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고등학생 여자애의 힘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뭐, 뭐야! 어디로 끌고 가는 거야? 일단 이것 좀 놔!”

“닥치고 그런 말할 정신이 있으면 제대로 일어서서 네 다리로 뛰기나 해라!”

나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애써 태연한척 쥐어짜 보았지만 목이 눌려 우스꽝스러운 소리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물론 그마저도 이 여자애는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이상한 상황에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 여자애는 물건을 훔친 것 같지는 않다. 물건을 훔쳤다면 도둑질한 가게의 점원인 나를 이렇게 끌고 갈 리가 없다. 그보다 내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로부터 도망치는 거지? 그보다 정말 도망치고 있는 것이 맞나? 물론 행동을 보면 그렇다고 밖에 할 수 없지만, 나를 유인하려고 한 행동인가? 설마 조금 더 골목으로 들어가면 동료들이 나와서 날 납치해서 장기 밀매.......

타-앙-!

다시 내 생각의 고리를 끊은 것은 공기를 찢어발기는 굉음이었다. 지난 21년 동안 살아오면서 평생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총소리가 아닌, 진짜 총소리를 실제로 들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 소리는 총소리 의외의 다른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알기 쉬운 소리였다. 다만 그 뒤 피융- 하고 총알이 날아오는 소리는 내가 잘못들은 것 이었나 싶을 뿐이었다. 내 옆에 있던 벽에서 파편이 튀어 볼을 때리는 느낌이 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총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고 멀리서 건장한 남성 두 명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쳇, 벌써! 뛰어!”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은 여자애는 방금 전까지 내 멱살을 잡고 있던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고 뛰기 시작했고 나도 어느새 제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달리지 않을 수 가 없었다. 내가 아무리 이 여자애와 무관계하다고 해도 여자애를 쫓고 있는 것 같은 저 사람들이 우리 둘의 이런 모습을 보고서 알아줄리 만무했다. 일단 저 사람들에게 붙잡히지 않고 이 상황이 끝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들 뭐야? 총을 가지고 있어! 경찰이야? 무슨 폭력 조직원인가?”

“여기서 왼쪽!”

터질 것 같은 호흡으로 간신히 물어봤지만 역시나 돌아 온 것은 당연한 듯한 무시였다. 하지만 더 이상 물을 경황은 없었다. 뭔가 가고 있는 방향이 잘 못 됐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른쪽!”

“어이! 너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 거야?”

“다시 왼쪽!”

“설마!”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지면 쭉 가봤자 막다른 골목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전혀 파악이 되지 않는다. 담이라도 넘을 생각인가? 하지만 그런 짓을 하기엔 담도 높고 여러모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총을 맞든 붙잡히기 딱 좋을 뿐이다!

“골목 맨 끝에서 세 번째 맨홀! 반시계 방향으로 반 바퀴 돌리고 들어 올려!”

“뭐?!”

“빨리! 내가 시간을 끌고 있을 테니까!”

“네가 무슨 수로!”

나는 하려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애는 후드 안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고 그것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영화에서 자주 보던 소음기가 장착된 작은 권총이었다. 그 여자애는 권총에 끼워져 있던 소음기를 능숙하게 돌려 빼면서 담벼락 사이 공간에 몸을 숨겼다.

“세 번째, 반 시계 반 바퀴라고......”

반신반의 하면서도 나는 행여나 틀리지 않도록 중얼거렸다. 이제 와서 저 여자애의 말을 믿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는 왼쪽으로 꺾어지는 골목길을 돌아 내달렸다. 눈앞에는 막다른 골목이 펼쳐졌고 바닥에는 간간히 맨홀이 보였다.

‘세 번째, 이거다!’

맨홀은 오랫동안 방치 돼 있어서 그런지 녹이 슬고 겉보기에는 꿈쩍할 것 같지 않아보였다. 보통 맨홀 공사를 할 때 쇠막대기로 지렛대 삼아 들어내곤 하는 것이 생각났다.

‘하지만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방법을 알려준 것이겠지!’

나는 맨홀 앞에 무릎 꿇고 앉고 나서야 내 팔과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분명 30분 전까지만 해도 난 매장에서 퇴근 후 금요일 밤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며 이불 위를 뒹굴 생각에 부풀어 올라 있었는데....... 목과 등짝은 얼얼하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팔꿈치는 피가 맺힌 것이 보였다. 온 몸은 땀에 흠뻑 젖었고 땀방울이 얼굴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타-앙!

아까보다 훨씬 큰 총소리가 났다. 굉장히 가깝게 들리는 것이 그 여자애가 쏜 것이 틀림없었다. 쓸데없는 짓을 할 시간이 없다.

“끄윽!”

나는 맨홀 뚜껑을 잡고 반시계 방향으로 돌리기 시작했고 굉장히 빡빡한 느낌과 함께 뚜껑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반 바퀴 쯤 돌았을 때, 찰칵 소리와 함께 맨홀 뚜껑을 손쉽게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어떡하지? 다시 돌아가서 열었다고 말해줘야 되나? 데리러 가야하나?’

짧은 생각을 하는 사이에 몇 번의 총성이 더 울렸다. 좀 더 거리가 있는 부근에서 소리가 난 것으로 보아 그 남자들이 쏜 것 같았다. 가만히 기다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 애를 혼자 두고 나 혼자 들어가 숨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심한 나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 모퉁이를 향해 달렸다. 모퉁이에 도착해 고개를 살짝 내밀어 보니 그 여자애가 몸을 숨기고 있는 곳이 보였다. 그 남자들은 어디에 숨어서 총을 쏘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정도 거리면 소리쳐 불러도 들릴 거리였지만 그렇게 되면 그 남자들도 눈치를 챌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모퉁이를 뛰쳐나갔다.

탕! 타탕!

여자애가 쏜 것인지 그 남자들이 쏜 것 인지 나는 생각할 겨를 따윈 없었다. 나는 넘어지듯 그 여자애가 숨어있는 공간으로 굴러 들어갔다.

“뭐야? 여긴 왜 온 거야?”

“뚜껑! 헉헉! 열었어!”

“겨우 그 말을 하려고? 멍청이가!”

“그럼 어떻게 해? 너 혼자 두고 들어갈 수는 없잖아!”

“이런 닭대가리! 내가 신호 하면 다시 돌아가서 먼저 들어가 있어!”

나는 지금! 이라고 여자애가 외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모퉁이를 향해 달렸다. 등 뒤로 총성이 울렸지만 무사히 모퉁이를 돌아 맨홀까지 도착했다.

첨벙-

맨홀 속은 생각보다 깊지는 않은지 금방 발이 닿았고 하수구 특유의 썩은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정말 이대로 기다리면 되는 건가!’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가로등 불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는 구멍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몇 발의 총성이 더 이어졌지만 어느 순간부터 갑작스레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갑자기 왜 조용해 진거지? 왜 안 오는 거야? 총에라도 맞은 건가? 이제 어떡하지?’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의문이 솟아오르고 있던 그때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탓탓탓-! 철컹!

그 발소리는 맨홀 바로위에서 끊겼고 검은 형체가 주저 없이 맨홀 안으로 뛰어 들면서 마치 연결동작인양 자연스럽게 맨홀 뚜껑을 돌리며 닫았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쉿!”

어둠속에서 조그맣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여자애의 목소리였다. 우리는 뚜껑이 있는 곳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곧이어 뚜껑 위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남자들 인 것 같았다. 그들은 우리가 어디로 갔는지 찾는 것 같았다. 손발이 저리고 이미 흥건한 얼굴에 땀이 더욱 흘렀다. 심장이 두근두근 거려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하지만 침이 넘어가는 소리조차 들릴까봐 침조차 삼키지 못했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

갑자기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진동 모드였지만 밀폐 된 하수구 안에서 증폭된 소리는 평소에 듣던 진동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크게 울렸다. 그들이 맨홀 가까이 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꺼냈다.

‘망할 점장!’

핸드폰 화면에는 점장과 편의점 번호가 떠 있었다. 내가 뛰쳐나간 뒤 돌아오지 않아서 전화를 걸어 온 것 같았다.

‘왜 하필 지금 인거야!’

나는 황급히 전원 버튼을 누르기 위해 핸드폰을 바로 잡았다. 아니, 바로 잡으려고 했다. 손에 흥건한 땀과 전화의 진동으로 인해 핸드폰을 떨어뜨리기 전까지는. 낙하하는 핸드폰을 잡아보려 휘두르는 손이 휴대폰 대신 어두컴컴한 하수구 허공을 덧없이 휘저을 뿐 이었다. 우리를 쫒던 남자가 맨홀 위에 서있는 것이 느껴졌다.

위이이에에에엥-!!

첨벙!

핸드폰이 하수구에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간발의 차이로 통금 30분전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덕분에 휴대폰을 떨어뜨리며 난 소리는 사이렌 소리에 묻힌 것 같았다. 그 남자들은 맨홀 뚜껑을 조금 만져보는 것 같더니 사이렌 소리가 끝나기 전에 인기척이 사라졌다. 우리는 그 후에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너 이 멍청아! 뚜껑 열었으면 얌전히 곱게 들어가 있어야지! 총 맞고 싶어? 거길 와서 어쩌자는 거냐!”

“네가 언제까지 거기서 그러고 있을 줄 알고! 혼자 들어와서 마냥 기다릴 수는 없잖아!”

“내가 적당히 시간조차 계산 못할 정도로 바보로 보이는 거냐? 쓸데없는 오지랖이다!”

“아까부터 말이 짧다? 여러모로 봐도 내 쪽이 연상이 거든? 그쪽 생각해서 목숨 걸고 데리러 가줬으면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게다가 너 때문에 지금 나까지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놓고 어디서 적반하장......!”

내가 말을 끊은 것은 이 여자애에게 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내서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싸워봤자 어차피 소득이 없을 뿐이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다시 올라가?”

“멍청한 얼굴처럼 멍청한 소리를 하다니 밖은 이미 경찰이 쫙 깔렸을 거다 그렇게 난리를 쳤으니, 게다가 곧 통금 시간이다.”

“그럼 여기서 이대로?”

“끝까지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따라와라.”

그렇게 말한 그 여자애는 조그마한 손전등을 꺼내 켜더니 입에 물고선 능숙하게 머리를 묶어 올렸다. 그리고선 하수구 속을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손전등 불빛에 시꺼먼 하숫물이 눈에 들어왔다. 발목까지 오는 하숫물에 내 신발 속은 이미 푹 절어있었다. 아마 엄청난 냄새가 나겠지. 어쩌면 신발을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예상외의 지출은 싫은데. 앞서 가고 있는 여자애는 이러한 것들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지 이런 상황에 익숙한 것인지 거리낌 없이 걸어갔다.

“어디로 가는 거야?”

“조금이라도 더 하수구 냄새를 들이키고 싶은 거라면 그냥 입을 열고 걷지 그래.”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다. 물어본 내가 잘못이다. 사실 물어보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지만, 아까 쫒아온 그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들이지? 총을 가지고 있었으니 경찰 혹은 총기를 밀수입해 손에 넣은 범죄조직일 것이다. 어느 쪽으로든 납득이 가능하다. 그 사람들이 총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이 여자애가 어떻게 총을 가지고 있는 것이 훨씬 의문이다. 당연히 경찰이나 정부 쪽 사람은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이런 어려보이는 애가 범죄 조직의 일원일리도 없을 것이다. 뭐, 나이를 떠나서 그랬다면 내가 죽든 살든 신경 쓰지도 않았을 테니까. 나는 이 여자애가 나를 왜 굳이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 같이 도망치게 했는지 짐작 할 수가 없었다. 여하튼 경찰에 쫒기든 범죄조직에 쫒기든 양쪽 모두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렇다고 물어 봐 봤자 헛수고일 것이 뻔했으므로 나는 일단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하수구는 넓어 졌다 작아졌다 하기를 반복했다. 넓은 공간은 자동차가 지날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좁은 공간은 한사람이 허리를 숙이고 지나가야 할 정도였다. 경성의 하수도 시설은 무질서하고 무계획적인 증축에 증축을 거쳐 행정당국에서도 지하지도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본 것 같았다. 물론 예산이 제대로 쓰였다면 그렇지 않았겠지만.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아무 말 없이 어두컴컴한 하수도를 걷기만 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등 쪽이 이따금 욱신거려왔다. 다리는 최근 몇 년간 제대로 이토록 격렬하게 움직여 본적이 없으니 파업 직전의 상태였다. 젖은 신발 속의 발은 퉁퉁 불어서 더 이상 감각이 없는 듯 했다. 핸드폰은 아까 떨어뜨렸을 때 침수되었기 때문에 밧데리를 분리해 놓아서 시간을 확인 할 수도 없었다. 슬슬 심리적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을 때였다.

“이쪽이다.”

약간 넓은 하수구 길, 한쪽 벽에 한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구멍이 뚫어져 있었고 그 안에는 작은 공간과 계단이 놓여 있었다. 나는 약간 긴장되기 시작했다. 총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렇고, 평범한 집이라면 하수구와 연결되는 통로를 만들 이유도 없다. 좋지 않은 곳에 발을 들여 놓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지만 너덜너덜해진 몸은 더 이상 한계였다. 구멍 안으로 들어가니 좁은 공간이 나왔고 한쪽 벽에 계단이 그리 높지 않은 천장 까지 이어져있었다. 천장에는 위로 열수 있는 문이 달려있었다. 여자애가 닫혀 있던 문을 위로 들어 올리자 다시 평범한 건물 천장이 보였다.

“올라와.”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게 조심해서 올라가자 나온 그곳은 창고 같은 방이었다

“문 제대로 꼭 닫아 냄새가 새어 들어오니까.”

이제는 바닥에 달린 문이 된 문을 나는 조심스럽게 닫았다. 그리고 우리는 창고라고 생각되는 방의 제대로 달려있는 문을 열고 나갔다.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이 들린 후 딸깍 소리와 함께 그 여자애가 불을 켜자 눈앞에 보인 것은 바로

“인쇄소?”

어디서나 평범하게 볼 수 있는 인쇄소 그 자체였다. 커다란 인쇄기가 몇 개 놓여 져 있고 여기저기 종이박스가 쌓여있었다. 한 쪽에는 사무를 볼 수 있는 책상에 서류들이 쌓여 있었다. 창문은 보이지 않고 환풍기만 여러 개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지하에 있는 것 같았다.

“샤워실은 저기다. 갈아입을만한 옷은 가져다 줄 테니 들어가 있어라.”

여러 가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일단 몸에서 올라오는 땀과 시궁창 냄새가 뒤섞여 형용할 수 없는 냄새가 나는 몸부터 씻는 것이 급선무였다. 샤워실 문을 열고 불을 켜자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좁은 공간과 샤워실을 구분해 주는 칸막이가 쳐져 있었다. 샤워실은 대충 두세 명이 동시에 씻을 수 있을 정도의 공간으로 보였다. 옷을 대충 벗어서 바닥에 놓고 안으로 들어가 물을 틀자 찬물이 쏟아졌다. 수도꼭지를 여러 방향으로 틀어 봐도 따듯한 물이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젠장, 땀에 흠뻑 젖었다가 식은 몸 상태로는 아직 날씨가 덥다고 해도 찬물 샤워는 무리라고!’

하지만 씻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 샤워용품은 샤워장 안에 놓여 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하면 됐었다. 샤워를 마치고 칸막이를 열고 나가자 벗어놓았던 옷은 치워져 있고 대신 츄리닝 바지와 티셔츠 한 장, 슬리퍼가 놓여 있었다.

‘어느새 가져다 논 거지.’

샤워에 열중해서 인지 피곤해서인지 샤워실 문을 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무주의에도 정도가 있지! 뭐, 주의한다고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나는 가져다 놓은 옷으로 갈아 입었다. 사이즈가 큰 것으로 보아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여자애의 옷은 아닌 듯 했다. 옷이 조금 헐렁한 것보다는 역시 속옷은 가져다주지 않았기 때문에 안에 속옷을 입지 못한 쪽이 훨씬 신경 쓰였다. 그것 보다 내 옷을 전부 가져간 것은 세탁을 해 주겠다는 의미인가. 오늘 팬티 뭐 입고 왔었지?

옷을 전부 갈아입고 나가자 샤워실 문 앞에서 그 여자애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데나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라는 말을 남기고 그 여자애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나는 한쪽에 놓여 져 있는 소파에 앉아 다시 한 번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생각 보다 작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인쇄기들이 빼곡히 들어 앉아 있어 조금은 좁게 느껴졌다. 아까 나왔던 창고 같은 방 이외에도 벽에 문이 꽤 늘어서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가지 방들이 있는 모양 이었다.

째깍 째깍 째깍

솨아아아-

시계는 새벽 2시 반을 막 넘기고 있었다.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샤워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함께 묘한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흠흠, 방금 전까지 의식하지 않고 있던 샤워장의 물소리가 조금 신경 쓰이기 시작했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은 더 이상 생각하기를 거부했고 결국 다시 멍하니 들려오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집중하고 있었다.

‘아니야! 정신 차려라 야스무라 토우마! 저기서 샤워 하고 있는 것은 남자를 공중에 붕붕 날리지를 않나 멱살을 잡고 질질 끌고 다니는 괴력에, 입까지 거친데다 총질까지 해대는 범죄자라고! 그런데 어째서 이딴 것에 신경 쓰고 있는 거냐! 그래! 저런 건방지고 못 생......!’

찰칵. 끼이이익.

어느새 샤워를 마쳤는지 샤워장 문이 열리고 들어갔던 여자애가 한 손에 세탁물이 담기 투명비닐을 들고 나왔다. 처음 편의점에서 봤을 때부터 샤워실에 들어갈 때까지 눌러 쓰고 있던 모자도 그 비닐 안에 담겨있었다.

갸름하고 작은 얼굴, 얇지만 진하고 올 곧은 눈썹과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 얼굴과 조화롭고 자연스러운 콧날, 붉은 기가 감도는 입술. 아직 앳된 느낌이 충만한 흰 피부. 다시 풀어 내린 긴 흑발은 물기를 머금고 찰랑거렸다. 새로 갈아입은 헐렁해 보이는 검은색 티셔츠에 진한색의 쇼츠 데님 팬츠는 편하면서도 활동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기지는 않았네.’

단순히 못생기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지만 그 이상 생각했다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을 인정해야 될 것 같아 나는 그만 두기로 했다.

“뭐, 할 말이라도?”

“엇, 아니, 저, 얼굴을 제대로 본 것이 처음이다 싶어서”

젠장. 혀가 꼬여서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 여자애는 나에 대해선 여전히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들고 있던 비닐을 가지고 세탁실이라고 적혀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곤 조금 뒤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다시 문을 닫고 나왔다.

“세탁이랑 갈아입을 옷은 고마워”

일단 예의상 감사를 표시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무슨 소리지?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 준 건 맞지만, 네 옷이라면 저기, 쓰레기봉투 안에 담아 놓았다. 내일 갈 때 잊지 말고 가져가라.”

“아, 예. 그러시겠죠.”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그 여자애는 어느새 어디선가 가져온 대걸레를 내 손에 쥐어 주며 우리가 하수구에서 올라오며 바닥에 흘린 오물들을 닦게 했고 자신은 탈취제 같은 것을 들고 다니며 뿌리기 시작했다. 거부할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벌써 세시인가. 자고 싶다.

“소파 위에 이불을 올려놨으니 써도 돼”

소파에서 자라는 이야기군.

“오늘 밤은 마침 아무도 없지만 내일 아침이 되면 사람들이 들어올 거다. 추한 꼴 보이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적당히 일어나”

그럼 평소에는 여기서 사람들이 지낸다는 건가, 뭐 샤워실에 세탁실까지 갖추어져 있으면 납득할 만하다. 내가 이불이 올려 져 있는 소파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선 그 여자애는 불을 끄고 침실이라고 생각 되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나는 이불을 적당히 펴서 소파위에 누웠다.

“으으윽”

등이 소파에 닿자 찌릿찌릿한 통증이 사정없이 후벼왔다. 아까 분명 골목에서 등짝을 쳐 박고 나뒹굴었을 때 최소 피멍정도는 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도저히 등을 대고 누울 수가 없어서 몸을 뒤척일 때마다 입에서 신음이 흘러 나왔다. 그래도 눈을 감고 이불을 덮고 누워있으니 지난 몇 시간이 꿈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 일 뿐이었는데 갑자기 도둑을 쫒게 되질 않나 그 도둑이 사실은 도둑이 아닌 총을 가진 정체모를 여자애 인데다가 갑자기 이상한 남자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하수도 속을 두 시간 가까이 걸어서 도착한 곳은 의미를 알 수없는 인쇄소라니.

“들어와 봐”

빼꼼 열린 문틈 사이로 새어나온 불빛과 함께 들려온 못마땅하다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다시 눈을 떴다.

“뭐라고?”

“들어와 보라고!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멍청아!”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소파에서 일어나 그 여자애가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엔 두 세 명이 누울 수 있는 공간과 옷장, 옷걸이, 각종 가전제품, 생활용품들이 늘어져 있는 것이 영락없이 가정집 같은 분위기였다. 슬리퍼를 벗고 방바닥 위로 올라가자 앉으라는 손가락 질을 받고 나는 바닥에 앉았다.

“윗옷 벗어봐.”

“뭐?”

“이거, 붙여 줄 테니까 윗옷 벗으라고!”

등 뒤로 숨기고 있던 거 파스였냐. 진작 그런 거라고 말을 해주면 좋을 텐데 내가 지금 두근거리고 있는 것은 설명이 부족한 이 불친절한 여자애 덕분이지 결코 다른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 여자애, 타인과의 의사소통에 절대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등을 돌리고 앉아 티셔츠를 벗었다. 아무리 이유가 그렇다고 해도 조금 부끄럽구만.

“......”

등의 상태를 살펴보는 것인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깨 너머로 향긋한 샴푸향이 느껴졌다. 아까 처음 들어 왔을 때 방에서 느꼈던 은은한 좋은 냄새는 이것이 원인 인가. 향기로 보아 샤워실에 놓여있던 같은 샴푸를 쓴 것이 분명하다. 내 머리에서는 샴푸 향은커녕 다시 하수구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은데, 왠지 치사하다. 그보다 이 샴푸냄새, 원래 이렇게 좋았던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심장에 안 좋은 날인 것이 틀림없다.

“윽!”

“가, 가만히 있어!”

차가운 손끝이 내 등을 스치자 나도 모르게 움찔 하고 떨어버렸다. 진정해라! 나!

파스 포장지를 뜯는 소리와 숨소리만이 방에 울렸다. 어색함에 나도 모르게 발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다 됐다.”

“아, 고마워.”

등에 덕지덕지 붙여진 파스에서 차갑고 시원한 느낌이 느껴졌다. 나는 통증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인가 같은 시답지 않은 생각을 했다.

“그럼 이제 나가.”

“알았으니까 옷 좀-.”

“나가!”

적어도 옷 정도는 입고 나가면 덧나나! 나가라며 발길질 까지 해대는 통에 나는 티셔츠를 손에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고 곧이어 불이 꺼졌다. 분명 저 여자애, 대인관계형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라고 생각하며 나는 셔츠를 대충 입고 어둠속을 더듬어서 소파 위에 누웠다. 그러고 보니 내일 원래 여기 사는 사람들이 온다고 했지. 그 사람들은 평범하게 인쇄소를 운영하는 사람들인가? 저 여자애와 관계된 사람들이라면 분명 평범한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아예 일찍 일어나서 그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고 여기를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핸드폰이 작동되지 않는 지금 알람 같은 것을 맞출 방법은 없었다. 계속 이어지던 이런 저런 의문들이 점점 흐려지며 나는 나도 모르게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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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회  토요일 연재가 목표! 

한글로 쓰고 블로그로 옮기니 가독성이......

원래 1화는 작가가 평소에 쓰는 분량보다 많은 겁니다.

다음 주 부터는 고무줄 분량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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