짹짹- 짹

“으으 음.”

귓가에 시끄러이 들려오는 새소리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평소와 같다면 새소리조차 방음이 안 되는 낡은 집을 원망하며 다시 이불속으로 파고들었을 테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나는 밤새 웅크리고 있던 몸을 힘차게 뻗어 기지개를 폈지만 내 바로 옆에 그녀가 누워있었다는 걷을 깨닫고 재빨리 팔을 다시 움츠렸다. 나는 몸이 약간 긴장되어 오는 것을 느끼며 그녀가 누워있던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 일어난 거지?’

어젯밤 그녀가 누워있었던 자리엔 적당히 정리된 이불만이 놓여있을 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어 난지 한참 되었는지 매트 또한 식어있었다. 내 머릿속에 지난밤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처음엔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졌지만 조금씩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숨소리까지 생생하게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가더라도 이야기는 하고 가야 할 거 아냐.”

“뭐라고 구시렁대고 있는 거지?”

“헉!?”

돌아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느닷없이 머리맡에서 들려왔다. 나는 놀라다 못해 경기를 일으키며 벌떡 일어나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귀를 기점으로 뒤쪽의 긴 흑발은 한데 모아 끈으로 묶어 길게 늘어뜨리고 귀 앞쪽 양옆의 머리칼은 매끄러운 얼굴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내린, 일명 포니테일 스타일 헤어로 한층 활동적인 느낌을 주고 있는 그녀는 연신 집중하는 표정을 지으며 방 한쪽의 싱크대 겸 조리대 앞에서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아직 안 갔어요?”

“뭐야, 내가 빨리 나가 주길 바라는 건가?”

당황함이 묻어 있는 내 말에 그녀는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짐짓 화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보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보면 모르나?”

따다닥-!

치지지익-

달그락달그락-

레버를 돌려 가스레인지의 불을 켠 뒤 프라이팬을 올려놓은 그녀는 나무주걱으로 능숙하게 밥을 볶기 시작했다. 그제 서야 나는 그녀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즉석밥 껍데기와 케첩포장지, 달걀껍질 등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대체.”

“어제 내가 그렇게 얻어먹고 입 닦을 거라 생각했나? 흥, 그런 건 나도 찝찝하고 지저분한 기분이 들어서 싫다 이거다!”

너무나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나를 본 그녀는 한껏 우쭐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재료는 대체 어디서 난 거에요? 냉장고는 비어 있었을 텐데.”

“이 앞에 마트가 있기에 거기서 사왔다.”

“설마, 그 모습으로 갔다 온 겁니까!”

“응? 뭔가 문제라도?”

여전히 목 아래로 시선을 내릴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을 해줘야 하나하고 어제에 이어 다시 고민에 빠졌지만 어차피 늦은 일이라는 생각에 나는 그만 두기로 했다.

“돌아갈 때는 내 옷으로 다시 갈아입고 갈 테니 걱정마라. 냄새는 조금 나더라도 땀은 말랐을 테니 괜찮겠지. 빌렸던 옷은 세탁해서 돌려주도록 하겠다.”

“그런 문제는 아니지만, 어쨌든 알겠어요.”

“그리고 네 지갑은 책상에 올려놨으니 알고 있어라.”

“설마, 재료는 내 돈으로 산건가!”

텅 빈 지갑을 보며 반쯤 우는 표정이 된 나를 시크하게 무시한 그녀는 다시 프라이팬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달달하고 고소한 냄새가 집안에 풍기기 시작했다. 이 집에 살기 시작한 이후로 제대로 된 요리냄새가 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았다.

‘으음, 확실히 자고 일어나니까 확 티가 나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군데군데 파랗게 멍이 올라왔고 자잘한 상처들에는 딱지가 들어앉은 것이 보였다. 누가 봐도 거하게 얻어맞은 것으로 밖에 안보이겠군.

“그렇게 멍하게 있지 말고 쓰레기통이라도 비우고 오지? 가득차서 버릴 공간이 없잖아!”

“예이. 예.”

“음식 곧 다 되니까 빨리 갔다 와라!”

원래대로라면 주말동안에는 쓰레기를 수거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버리는 것을 건물주인에게 들키면 잔소리를 들을 것이 빤하지만, 그렇다고 집안에 쌓아두기도 뭐하니 어쩔 수 없지. 절대 저 여자애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다.

“읏차.”

나는 꽉 찬 쓰레기봉투를 밖으로 가지고 나와 지정된 수거 장소에 내려놓고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건물주인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내려왔던 계단을 다시 올랐다.

“이봐요! 방금 쓰레기 내다 버린 거 맞죠?”

“으헉! 놀래라!”

층계를 올라 복도 코너를 도는 순간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사람과 부딪힐 뻔한 나는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았다. 샛노랗게 물들인 금발, 깊게 파여 가슴골이 훤히 들어나는 브이넥 티셔츠와 두툼한 허벅지가 전부 드러나는 짧은 숏 팬츠. 마치 내가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서있는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옆집의 젊은 여자였다.

“주말에, 그것도 낮에는 쓰레기 버리면 안 되는 거 몰라요? 하루 종일 냄새라도 올라오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옆집여자는 엉망이 된 내 얼굴을 보고 멈칫 했지만 이내 잘 걸렸다는 듯이 비웃음을 띄우며 신난 듯 쏘아붙였다.

“제가 미처 미리 못 내놓아서, 앞으로 주의 할게요.”

나는 대충 무시하며 지나치려했지만 비좁은 복도는 그 여자가 버티고 서자 지나갈 공간이 없어졌다.

“아니,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묻고 있는 거거든요? 이웃 간에 지킬 건 지켜야 되는 거 아닌가?”

당신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거든!

“게다가 대체 어젯밤엔 무슨 짓을 했기에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며 시끄러웠던 거죠? 뭐, 그렇게 혼자 살다보면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이상한’ 취미가 한둘쯤 생길법도 하지만! 푸흡! 그 얼굴 꼬락서니의 원인도 설마? 우웩! 소름끼쳐!”

“으읏.”

옆집여자는 일부러 한 단어를 강조하여 말하며 노골적으로 가슴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안 그래도 훤히 보이던 가슴이 브이 넥 사이로 마구 삐져나올 것 같은 형상이 되었고 당황하며 시선을 돌리는 나를 본 여자는 폭소를 했다. 이 여자, 나를 놀리는 것에 맛을 들인 것이 분명했다.

“풋, 이래서 동정은 안 된다니까.”

“예? 이, 이봐요! 내가 도, 동정인지 아닌지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그거야 보면 알지! 만날 음침하게 혼자 집에서......!”

덜컹!

“내가 음식 곧 다 된다고 빨리 들어오라고 했잖아! 거기서서 뭐하고 있는 거야!”

“......어? 에? 엑?”

나와 옆집 여자의 높아지는 언성을 단박에 멈춘 것은 그녀였다. 갑작스런 상황에 옆집 여자는 깜짝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와 그녀를 빠르게 번갈아 볼 뿐 이었다.

“저, 저 호실은 분명, 아니! 어?”

늦은 주말 아침. 내 집 문을 벌컥 열고나온 여자가 묶어 올리긴 했지만 밤사이동안 헝클어진 것이 분명한 머리칼과 어떻게 봐도 내 옷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차림을 하고 열린 문틈 사이로 갓 만들어진 음식냄새를 흘리며 나를 부르고 있는 상황.

‘누가 봐도 이 장면은......!’

옆집여자는 입을 뻐끔거리며 나를 다그치고 있는 그녀를 연신 위아래로 훑어댔다. 하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는 못했다. 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얼굴을 드러낸 그녀는 누가 봐도 눈에 띄는 미소녀였기 때문에 흠을 잡을 생각이라면 포기하라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어, 어젯밤에 그 소란은 설마! 다, 당신! 저 애 아무리 봐도 미성년자잖아! 범죄라고! 알고 있어?”

결국 지적하는 것은 그 부분인건가!

“사생활은 신경 꺼 주시죠!”

나는 이때다 싶어 옆집 여자를 밀치고 문 앞에 서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안으로 떠밀고 들어가 문을 닫았다. 어찌 됐든 한방 먹인 거 같은 기분이 들지만 실상을 생각하면 조금 부끄럽네.

“저 여자는 대체 누군데 저러는 거지?”

“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요 그냥 옆집 사는 사람입니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온 사이, 어느새 방 한가운데에 놓인 탁상에는 노트북 대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계란볶음밥이 그릇에 담겨 올려져있었다. 반질반질하게 볶아진 계란볶음밥에서 풍겨오는 달달한 케첩냄새는 식욕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애도 혼자 살고 있다고 했던가. 혼자 살아도 착실히 요리를 해 먹는 타입인가보군.

“마, 마음에 안 들면 안 먹어도 된다.”

이크. 음식 앞에서 멀뚱멀뚱 있는 건 실례지.

“아닙니다! 굉장히 맛있어 보여서. 식기 전에 먹죠.”

“에그 스크램블과 밥에 케첩을 뿌려 함께 볶았을 뿐이다.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야.”

“그래도 직접 만든 요리라니 영광이네요.”

“사탕발린 말 따위는 필요 없다.”

칭찬을 해 줘도 삐딱하기는.

달그락 달그락-

항상 편의점에서 차가운 삼각 김밥 따위나 먹어 와서 그런 것 일까. 따듯한 온기가 올라오는 맛있다는 것 이상의 느낌이었다. 아니, 누군가 나를 위해 만든 음식을 함께 같이 먹는다는 것이 그런 느낌을 받게 한 것 일지도 모른다. 정신없이 그릇을 비우고 나서야 고개를 든 나는 그제야 그녀가 먹는 것도 멈춘 채 넋을 놓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 그렇게 배가 고팠으면 만들 때 말을 하지! 나도 다 먹었으니까 이건 마음대로 해라. 버리던지 먹든지.”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먹던 그릇을 내밀었다.

“아, 그럼 감사히 먹을게요.”

배가 이미 조금 불러왔지만 마음대로 하라 했다고 정말로 마음대로 한다면 이 다음 끼니는 씹어서 먹는 음식을 먹기 힘들게 되겠지.

“그럼 나는 이만 내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가도록 하겠다.”

내가 그녀의 그릇을 앞으로 가져와 남은 볶음밥을 입에 밀어 넣는 것을 흘끗 본 그녀는 약간 고개를 숙이고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퉁명스럽게 이야기했다. 나는 입에 가득 찬 볶음밥 덕분에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내가 남은 밥들을 먹는 사이 화장실에 들어가 어제 벗어놓았던 자신의 옷으로 다시 갈아입었다.

“빌렸던 옷은 세탁해서 돌려주도록 할 테니까.”

그녀는 내 옷을 작은 봉투에 담아 챙긴 뒤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물론, 네가 이 옷을 돌려받을 수 있는 판단을 한다면 말이지. 이제 기한은 내일까지다. 남은 하루 동안....... 제대로 생각하라고 바보야!”

찰칵- 끼이익-

쾅!

“......”

방금 전까지와 달라진 것 이라고는 단지 사람 한명이 줄어들었을 뿐인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떠들썩했던 것이 마치 완전히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무거운 적막감이 방안에 내려앉았다.

‘사람의 빈자리는 생기고 나서야 느낄 수 있다던가.’

설마 지금 나는 아쉬워하고 있는 건가? 아냐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이제 드디어 자유롭고 조용한 주말을 얻은 거야!

“......”

나는 지금까지 오랜 시간동안 이 집에서 혼자 살아왔지만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에 괜히 일부러 더욱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내며 식기들을 정리했다.

‘이제 하루 인가.’

독립군에 들어가든가 독립군 손에 죽든가 둘 중 하나라는 건가. 어느 쪽도 결국 죽는 미래밖에는 보이지 않는구만. 솔직히 아직도 내가 거절했을 때 저들에게 어떤 짓을 당하리라고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저들에게 나는 상당히 껄끄러운 존재임에 확실하다. 내가 만약 따르지 않았을 경우 나를 처리하는 것에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 이다.

‘그렇다고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 가담한다고 해도 문제란 말이지.’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내 인생은 이제 완전히 변해버릴 것이 분명했다. 만약 그때 바보 같은 오해만 하지 않았다면, 내 지루하도록 평범했던 일상은 지금까지와 변함없이 앞으로도 그대로 쭉 계속 되었을까. 지금으로선 이제 영영 알 수 없게 돼버렸다.

째깍째깍-

오랜만에 듣는 것 같은 시계소리가 조용한 방안을 울렸다. 시곗바늘은 어느새 낮 12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지금쯤에야 어기적어기적 일어나 대충 끼니를 때우고 노트북 앞에 눌러 붙었을 시간이지만 오늘은 전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나는 대신 매트위에 가만히 누워서 뒹굴 거려 보았지만 마음한쪽 구석에서 느껴지는 불편함과 초조함에 머릿속은 편치 않았다.

‘공안과 독립군 어느 쪽에도 관련되지 않고 끝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내가 이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잠수를 탄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제아무리 그런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민간인들이고 내가 마음먹고 지방으로 내려가 잠적한다면 찾아낼 방법이 없을 것 이다.

‘하지만 수중에 그럴 돈도, 능력도 없지.’

나는 복잡해진 머릿속과 뒤숭숭해진 기분을 견딜 수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대로 방안에서만 있기에는 뭔가 시간이 아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라면 주말 내내 집에서 한발자국도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끼이익- 덜컹.

일단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막상 갈 만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 오늘은 충분히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나는 일단 마음을 진정시키기로 했다.

‘익숙한 장소라면.’

나는 내가 일하고 있는 편의점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집밖에서 유일하게 익숙한 장소라고는 일터뿐이라니, 나는 조금 자조적인 기분이 되었지만 어차피 곧 점심을 사 먹어야하기도 했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지금은 미와코가 근무하고 있을 시간인가.’

나에게 조금 귀찮게 굴지도 모르지만 하루 종일 혼자서 일하다가 아는 사람이 매장에오면 신이 나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 뭐, 기분 전환 겸 조금 같이 놀아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딸랑-

‘주말에도 빠짐없이 이곳에 오게 될 줄이야.’

편의점 문을 열어젖히자 종소리가 울렸고 익숙한 매장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헉? 선배?”

카운터에서 들려온 미와코의 목소리는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뭐라고 할까 좀 더 기뻐하는 것을 기대했는데 말이지.

“야스무라군? 이 시간에 무슨 일로? 거기다 자네 얼굴은 왜 그래?”

“어? 점장님? 점장님이야 말로 아직 교대할 시간이 아닌데 왜 벌써 오셨어요?”

카운터에는 미와코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와코의 옆에는 원래대로라면 출근이 세 시간이나 남은 점장이 서류를 잔뜩 손에 쥔 채 허둥대고 있었다.

“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야스무라군! 옆에! 옆에!”

카운터 쪽으로 걸어온 나에게 점장은 한껏 목소리를 낮추더니 한쪽 얼굴을 찡그려서 옆을 가리켰다.

“예? 대체 무슨?”

나는 점장이 왜 이러는지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점장이 온 얼굴 힘을 다해 가리키고 있는 곳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흐음~.”

푸딩진열대 앞에서 한쪽 손으로는 턱을 받친 채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져있는 여성은, 그녀가 입고 있는 새까만 정장과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매력적인 가슴이 아니었더라면 누가 보더라도 식사 후에 먹을 간식을 사러 나온 여고생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앗!”

인기척에 진열대에서 고개를 들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작게 놀란 그녀는 다름 아닌 공안 조사관 아라세카이 히토미였다. 편의점에 들어왔을 때 매장에 그녀가 있는 것을 내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작은 키 덕분에 매장의 진열대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당황해하는 나를 본 그녀는 이내 예의 미소를 되찾으며 빠른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뭐, 뭐야? 너무 가까이 다가왔잖아!’

내 바로 앞에 바싹 붙어 선 그녀는 까치발까지 들고서 내 얼굴을 뚫어 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과 내 얼굴 사이의 거리는 몇 십 센티도 채 되지 않았고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내 얼굴을 훑으며 또르르 굴러다니는 것이 세세하게 보일정도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얼굴을 피할 생각도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턱선 부근까지밖에 오지 않을 정도로 짧지만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단발머리, 작은 얼굴에 비해 크고 시원시원하며 옅은 쌍꺼풀이진 눈, 작지만 오뚝한 코,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붉은 입술, 하얀 피부위에 살짝 내려앉은 것 같은 분홍색 뺨. 미인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시선이 계속 가슴으로 가는 바람에 지금껏 자세히 보지 못했던 그녀의 얼굴은 꽤, 아니 상당한 미인이었다.

“어젯밤, 그 사람들과 싸웠던 사람, 토우마씨 맞지요?

“예?”

넋을 넣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질문을 놓쳐버렸다. 초면은 아니지만 갑작스럽게 이름으로 불린 것도 당황스럽긴 했다. 처음 봤을 때 그녀 자신도 이름으로 불러달라고는 했지만, 그녀 스스로도 상대방을 부를 때 스스럼없이 먼저 이름으로 부르는 타입이었던 것 인가.

“그러니까 어제 밤 11시쯤 여기서 가까운 번화가에서 조직폭력배들과 싸웠던 것 말이에요. 그거 토우마씨 맞죠?”

당황해서 멀뚱히 있는 나를 본 그녀는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다시 친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예? 아니, 그건!”

“어떻게 알았냐고요? 음, 그 장소에 있었던 피해자 진술청취에서 당신의 인상착의를 들었어요. 혹시나 했지만, 역시, 지금 토우마씨의 얼굴을 보니 맞는 것 같네요!”

아니, 대체 어떤 진술이었기에 나라고 특정할 수 있는 거지. 나는 눈에 잘 안 띄는 흔한 인상이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내 인상착의를 말한 진술자의 설명력이 좋은 건지 단번에 나라고 생각한 히토미의 눈썰미가 좋은 건지 궁금하네.

“여기 서서 말하는 것도 그러니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죠!”

그녀는 편의점 밖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먼저 나가서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을 한 그녀는 푸딩진열대에서 푸딩 두 개를 가져와 계산을 한 뒤 뒤따라 편의점을 나왔다. 그 사이 대충 점장에게 전해들은 정황은 이러했다. 나를 찾기로 생각한 아라세카이 히토미가 내 소재지를 알아내기 위해 편의점을 방문 했고 미와코의 긴급전화를 받은 점장이 원래 출근보다 3시간이나 이른 시간임에도 쏜살같이 달려와 카운터 밑의 금고에서 직원 명부를 꺼내 뒤지는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내가 편의점에 들어왔다는 것 이었다. 나는 아라세카이 히토미가 내 집까지 찾아오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은 것에 안도해야 할지, 이곳에서 그녀와 마주친 것에 절망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어찌 됐든 그녀의 의식영역에서 조용히 사라지기에는 틀려먹은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딸랑-

편의점에서 나온 그녀는 그녀가 사온 푸딩 중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내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려하자 그녀는 한사코 만류했고 결국 포기한 내가 감사의 인사와 푸딩을 받자 그제 서야 그녀는 테이블 반대편에 앉았다.

“흐흐흥~”

푸딩을 한 숟가락 가득 떠 입안에 넣고 오물거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한가득 짓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나는 왠지 맥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피해자 측의 젊은 아가씨가 당신을 찾게 되면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 하더군요.”

젊은 아가씨라면 그 가게 주인의 딸인가. 아무래도 역시 그 아가씨가 나에 대해 이야기 한 것 같군.

“개인적으로라도 만나서 사례를 하고 싶으니, 괜찮다면 연락을 달라는 말도. 후훗.”

나에게 전화번호가 적혀있는 쪽지를 내민 그녀는 마치 소개팅을 주선하는 친구 같은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그 연락처로 연락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가 건네는 것을 거절하는 것도 껄끄럽기에 나는 그것을 조용히 받아 지갑에 넣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이었다고 할까요? 뭐, 몸을 던져 자신을 보호해준 남자라니! 누구라도 반할법하네요!”

“예? 컥, 켁켁!”

생각보다 직접적인 그녀의 말에 당황한 나는 먹고 있던 푸딩 때문에 사레에 들렸고 한참을 기침해야했다. 그 가게주인 딸의 머릿속에서 뭔가 나에 대해 굉장한 미화가 진행 된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그, 건달들은 어떻게 된 거죠?”

“체포된 사람들을 취조해서 현재 도망친 일당들을 쫓고 있어요. 단순 조직폭력사범은 우리 관할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은 사건을 지역 경찰서로 인계했지만요. 물론, 공안경찰에 대한 폭력행사 및 공안공무집행 방해는 공안사범으로 다룰 수 있지만,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여유까지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 건달들은!”

“토우마씨가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는 알아요. 우리가 직접 실시한 1차 조사 때 지역경찰서와 조직 간에 커넥션이 있는 것을 알게 됐어요. 조직의 실질적 주인인 본토인은 일본본토로 송환됐고 사건처리에 대한 보고서를 관할 경찰부서에서 전달 받고 있으니 안심해도 됩니다.”

“그, 그렇군요.”

일단 그렇다고 하니 다행이지만, 아까 처음 아라세카이 히토미와 마주쳤을 때부터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의문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계속 이런 겉도는 이야기를 해봤자 지치기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은 나는 직접적으로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일단 사건은 잘 진행이 되서 목격자의 진술은 더 이상 필요 없을 것 같고, 설마 아까 그 연락처를 전해 주려고 오신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뭐죠?”

나의 돌림 없는 말에 그녀는 약간 놀라는 얼굴이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슬슬 이야기 하려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이것도 사족이긴 하지만 토우마씨는 목격자가 아니라 피해자이지요. 피의자들에게서 보상을 원하거나 그들의 형벌을 더 높이고 싶다면 관할경찰서와 연결해 주도록 하겠어요. 아, 그리고 토우마씨가 건달들에게 맞았다는 진술을 들었을 때, 저도 꽤 걱정했다고요? 직접 보니 얼굴에 상처가 조금 나긴 했지만 소독이나 처치가 잘 되어있어서 흉이 지지는 않을 것 같네요. 치료는 직접 한 건가요?”

“아, 예, 뭐.”

괜히 그 여자애의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지. 그것보다 아까 나와 마주치자마자 얼굴을 들이밀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 이유가 폭행에 의한 상처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던 건가.

“흠, 평소에도 다치는 일이 많나요?”

“아뇨, 그건 아니지만.”

“그런가요. 음, 좋아요. 이제 제가 온 이유를 말씀 드리죠. 아, 그렇게 대단하거나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저 몇 가지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는 것 뿐 이니까요.”

수첩과 볼펜을 정장 안주머니에서 꺼내어 든 그녀는 일순 분위기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진지하고 사무적인 그녀의 표정과 위엄 있는 목소리에 나는 다시 긴장이 되는 것을 느꼈다.

“어제 같이 있던 또 한명의 피해자 여성분과 아는 관계인가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대화 속에서 이상하리만치 나오지 않았던 부분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것일 것이라고 마음속에서부터 생각했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무슨 대답을 하던지 그 대답이 나에게 어떤 상황이 되어 돌아올지 알 수 없었기에 여전히 머릿속에서는 마땅한 대답을 준비 못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건.......”

꼬르르륵-

내 대답보다 빠르게 튀어나온 것은 배꼽알람이었다. 무안해진 분위기에 나는 말을 멈추고 헛기침을 할 수 박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시간을 뺏어서 미안해요. 혹시 식사는 했나요?”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손목에 있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아, 아직 안 먹었습니다. 혹시 아라세....... 히토미씨는?”

“음, 아까 그 푸딩으로 적당히 때우려고 했지만, 저 때문에 토우마씨의 점심시간까지 방해할 수는 없죠.”

일단 시간을 벌 수 있는 기회인가!

“제가 토우마씨의 시간을 뺏는 것이기도 하니까 답례로 점심을 대접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에?”

나는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발언에 깜짝 놀랐고 입에서는 그저 ‘예?’ 라는 말뿐만 반복해서 나올 뿐 이었다.

“사실,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식사는 제대로 하자는 주의라서, 푸딩 하나만으로는 부족했거든요. 제가 알고 있는 가게가 있는데, 그쪽으로 괜찮을까요?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가게였는데 혼자서 가기에는 힘든 곳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었거든요! 자. 가요!”

“예? 엑? 자, 잠깐!”

방금 전까지 나를 긴장시켰던 분위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그녀는,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기 좋아하는 여느 또래의 여자들처럼 신이 나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이야기하면서 점점 흥분하던 그녀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더니 내 손을 덥석 잡고 끌기 시작했다. 요즘에 여자가 남자 손을 잡아끌고 다니는 것이 새로운 유행인건가. 예상치도 못한 전개에 내 머릿속엔 두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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