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은 또 뭐야?”

 

건달들은 수많은 자신들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시발놈들이 다 같이 손잡고 장례식장 갔다 왔나 단체로 시꺼먼 옷 뒤집어 입고 지랄이야? 니들 어디 애들이냐? 여기 우리 구역인거 몰라? 뒤지고 싶어서 기어들어왔나?”

 

서있는 건달들 중 끗발이 있어 보이는 남자가 부하 서너 명을 데리고 연장을 휘휘 저으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마지막으로 경고하겠습니다. 무기를 당장 땅바닥에 내려놓으세요!”

 

하지만 그런 위협적인 건달들의 모습에도 아라세카이 히토미의 얼굴에는 전혀 긴장하거나 걱정하는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는 건달들을 움찔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런 썅년이 남자가 말하는데 어디서 윽박지르고 지랄이야!”

 

부하들이 주눅 드는 것을 눈치 챈 건달은 괜히 더욱 화를 내며 손에 들고 있던 연장을 들어 때리려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으억!”

 

아라세카이 히토미의 옆에 서있던 검은 정장의 남자가 번개같이 달려들어 그 건달의 팔을 꺾어 바닥에 찍어 누른 것 이었다. 한눈에 봐도 굉장히 단련된 솜씨였다.

 

, 이 새끼들이!”

 

그 모습을 본 부하들이 몇 명이 정신을 차리고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검은 정장의 사내들에게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건달들은 순식간에 제압당해 심음을 내뱉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공안입니다! 여러분들을 특수폭행 및 공무집행 방해죄로 체포하겠습니다!”

 

자신의 동료들이 힘도 못쓰고 제압당하는 것을 입을 벌린 채 보고 있는 건달들에게 아라세카이 히토미가 공안수첩을 내보이며 소리쳤다.

 

, 튀어!!!”

잡히면 인생 끝이다!”

시발! 하필 건든 게 공안이라니!”

 

일순간 정적이 흐른 뒤 누군가 외친 말에 건달들은 너도나도 뒤질세라 연장을 집어던지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멈추세요!!”

 

아라세카이 히토미가 당황해서 외쳤으나 서라고 한다고 설 리가 없었다.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황급히 달려 나가 닥치는 대로 붙잡았지만 숫자에서 역부족 이었다.

 

지금이다! 우리도 빠져나간다!”

 

상황을 지켜보던 여자애가 내 손을 붙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심하게 맞아서 인지 갑자기 일어서서 달리자 현기증이 느껴지고 다시 통증이 밀려왔지만 확실히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공안과 엮이는 것은 좋을 리가 없었다.

 

버스를 탈 수 있는 대로는 저쪽이에요!”

 

우리는 쉴 새 없이 달려서 대로까지 단숨에 도착했다. 때 마침 운 좋게 오늘의 마지막 버스가 도착했고 숨고를 틈 없이 우리는 몸을 실었다.

 

, 헉헉.”

 

의자에 쓰러지듯 몸을 기대자 거침 숨이 터져 나왔다. 버스 창문에 비친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피는 멈춘 것 같았지만 이미 내 코와 입 주변은 피범벅이 되 있었다. 상태를 확인하니 코와 입안이 더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멍한 귓속으로 시끄러운 버스의 엔진소리와 함께 통금 30분 전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뒤섞여 귀에 들려왔다.

 

눈치라도 좀 주지!’

 

미리 알려 줬다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괜히 원망스러워 져서 내 반대편에 앉아 있는 여자애를 바라보았다.

 

“......”

 

그 여자애는 내 모습을 보고 놀람과 당황이 뒤섞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역시 골목이 조금 어두웠던 탓에 내가 이런 상태였다는 것을 몰랐었던 것 같았다.

 

그러게 대체 믿는 구석도 없이 왜 끼어드는 거지? 바보 같긴!”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짐짓 성난 표정으로 소리치며 휙 고개를 돌렸다. 그래, 괜찮으냐고 물어보기라도 하길 기대한 내가 바보지.

 

후우, 집에 갈 때 까지만 참자. , 어차피 이제 곧 집에 도착하면 저 여자애도 돌아갈 테니 오늘은 더 이상 볼일 없겠지.’

 

나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고 예전 집을 나갈 때 할머니가 한사코 가져다준 구급상자를 어디에 뒀는지 떠올리려 애를 썼다.

 

?”

 

뭔가 이상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에서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젠장! 잘못 탔다!”

 

정신없이 급하게 버스를 타느라 방향이 잘못 됐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 이었다. 나는 황급히 일어서서 정차 버튼을 눌렀다.

 

뭐라고?”

방향을 잘못 탔다고요! 반대 방향으로 탔어야 했는데!”

바보 같기는!”

 

급한 마음과는 달리 버스는 한참을 더 달려 다음정류장에 도착해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다급히 반대편으로 건너가 버스정류장을 찾았지만 이미 막차시간은 지난 이후였다.

 

제길, 벌써 끊겼다니!”

 

걸어서 가지 못할 거리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관건은 통금시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 안에 빠듯한 거리였다.

 

어쩔 수 없지. 오늘 만큼은 도와주도록 하겠어!”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선 이어폰을 꽂고 있던 귀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까 승합차 봤지? 그걸로 집 앞까지 데려다 줄 테니 감사하도록 해라.”

 

퉁명스러운 말투로 그렇게 말한 그녀는 정류장의 의자에 털썩 앉아 팔짱을 끼고 시선을 돌렸다.

 

저기.”

뭐냐, 맘에 안 들면 여기서부터 뛰어서 가든가!”

그게 아니라 저기, 저게 그 차 아니에요? 조금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

 

나의 말에 그녀는 무슨 소릴 하냐는 말투로 대답하며 내가 말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위에에엥-

 

- “아아, 회색 봉고차. 봉고차! 멈추세요!”

 

이제 낯이 익은 봉고차가 반대편 차선에서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뒤에 바짝 붙어서 사이렌을 울리며 따라오고 있는 경찰차가 문제일 뿐.

 

쌔애앵-!

 

봉고차와 경찰차는 굉음을 내며 우리 앞을 순식간에 지나쳐 저 멀리 사라졌다. 그 모습을 멍하게 보고 있던 그녀는 다급히 무선으로 연락을 했지만 몇 마디가 채 오가기도 전에 미간을 감싸 쥐며 이어폰을 귀에서 뽑았다.

 

, 저기요?”

 

나는 불길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가자.”

?”

뛰어! 시간 없잖아!”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있는 나를 끌고 그녀는 우리가 온 방향을 거슬러 뛰기 시작했다.

 

아까 그 봉고차는!”

너도 눈이 있으면 봤잖아. 말할 시간 있으면 앞장서서 뛰어! 길은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녀는 내 말에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달리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확실히 방금 상황을 보면 그녀 동료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단념하고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헉헉, 이대로는 너무 아슬아슬 해요! 어제 밤에 그랬던 것처럼 지하통로를 이용 하는 것은?”

경성의 하수도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기 때문에 우리도 쓰는 통로가 아니면 모른다! 지금부터 도착할 때 까지 전력질주다!”

헉헉! 더는, 더는 한계에요! 잠깐!”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말할 시간에 뛰어라!”

 

다리가 점점 느려지는 나를 그녀는 질질 끌다시피 하며 뛰기 시작했다. 이제 통금시간이 임박하고 있다는 것에 증거같이 길거리에는 계도를 위한 경찰들이 속속 눈에 띄기 시작했다. 다리가 한없이 무거워지고 폐가 터질 것 같이 아파왔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헉헉, 여기서 오른쪽! 코너를 돌면 되요!”

 

마치 영겁의 시간동안 계속 뛰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쯤 우리는 익숙한 골목 어귀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침내 내가 살고 있는 원룸 건물의 문 앞에 도착하는 순간 자정 12시 통금을 알리는 기미가요가 확성기에서 흘러 나왔다. 나는 건물 계단 벽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비 오듯이 쏟아지는 땀을 닦았다.

 

하아, 하아, 그런데 그쪽은 이제 어떻게 돌아갈 건데요?”

이제 돌아가다니?”

 

그녀는 자신의 뺨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의아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니, 저는 이제 집에 들어 갈 건데 그쪽은 어떻게 돌아가시냐고......”

 

갑작스레 덮쳐오는 불안감에 나는 나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설마 아니겠지, 아니겠지 하며 진정하려 했지만 그녀의 대답은 가차 없이 내 기대를 부서뜨렸다.

 

밖에 경찰들 깔리는 거 봤잖아? 지금 이 상황에서 나보고 당당히 걸어서 돌아가라고?”

그 하수구라든지!”

말 하지 않았나? 우리도 아는 길이 아니면 사용 못한다고!”

아니 그래도 어떻게!”

 

남자 혼자 사는 집에 그렇게 당당하게 들어올 생각을 해요?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나는 뒷말을 꿀꺽 삼켰다. 어차피 또 자신이 무슨 상황을 벌이려하고 있는지 자각을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여자, 남녀 관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지금 일러주어 봤자 나 혼자 괜히 이상한생각을 하는 것으로 몰아붙일 것이 분명하겠지.’

 

어차피 이제 이 여자애가 내일 아침까지는 돌아갈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맞고 그렇다고 밖에 밤새 세워 둘 수도 없는 일이기는 했다. 일부로 들쑤시지 않고 상황에 대해 자각을 못하게 하면 자연스럽게 이 넘어갈 수 도 있을 것 같았다. 일찌감치 체념을 한 나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들어 계단을 올랐고 그녀는 당당한 걸음으로 내 뒤를 따라왔다.

 

철컥! 끼이익-!

 

딸칵!

 

문을 열고 불을 켜자 정겨운 내 방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 방에 들어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 될 줄이야. 나는 괜스레 입구에 서서 감격에 빠졌다. 하루 종일 방에서 뒹굴뒹굴하며 보냈던 지난 주말이 마치 몇 년은 된 것 같이 느껴졌다.

 

둘이 쓰기엔 좁군.”

 

그녀는 감상에 빠져있는 나를 제치고 들어오며 불만스럽다는 듯 이야기했다. 잠시 그녀를 현관에 그대로 서있게 한 나는 물건들을 최대한 밀어 붙여 공간을 만들었다. 나는 간신히 만든 자리에 그녀를 들어와 앉게 하고 화장실로 가서 지저분한 얼굴을 대충 닦았다.

 

그래도 일단 손님이니까.’

 

나는 찻장에서 언제 사용했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커피 잔을 꺼내어 간단히 씻은 뒤 물을 끓여 믹스 커피를 타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곳에 살기 시작한 이후로 누군가 이 방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였다.

 

“......”

“......”

 

성인 두 명이 자리를 잡고 앉자 좁은 방안은 금세 가득 들어찼다. 한밤중의 좁은 방안에선 그녀의 작은 숨소리조차도 선명히 들려왔고, 그녀가 살짝 움직일 때마다 땀으로 흠뻑 젖은 그녀의 몸에서 나는 체취가 방안에 퍼졌다.

 

?”

“......!”

! , 미안해요! , 이건 그런 뜻이 아니라!”

 

젠장! 다리가 불편해진 내가 앉은 자세를 고치려 손을 짚은 곳에 하필 그녀의 손이 놓여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무게 중심 때문에 내가 그녀의 손을 꼭 쥐는 형상이 된 이후였다.

 

얻어맞는다!’

 

나는 반사적으로 뻗었던 팔을 황급히 움츠리며 가드를 올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몇 초가 흘러도 예상했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떠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

 

당당히 방에 들어왔던 아까와는 달리, 그녀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긴장이 역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모자를 눌러쓰는 그녀는, 아무래도 자신이 자처한 것이 어떤 상황인지 깨달은 것 같았다.

 

꿀꺽-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괜히 나까지 긴장이 되어 오기 시작했다. 방안에는 걷잡을 수없이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그녀의 숨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를 의식하기 시작하자 방금 전까지는 알아채지 못 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보기만 해도 보드라움이 느껴지는 볼을 따라 촉촉이 젖어 달라붙어있었고,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는 티끌하나 없이 관능적인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슬쩍슬쩍 보이는 그녀의 가는 쇄골에는 땀방울이 촉촉하게 맺혀있었고 땀 때문에 몸에 달라붙은 후드 티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몸의 라인을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했다.

 

“......”

 

그녀는 나의 시선을 눈치 챘는지 안절부절 못 하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나는 더 이상 이런 분위기가 계속 됐다간 무슨 일이 벌어지든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일단 이 옷 빌려 줄 테니 먼저 씻어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나는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려서 떠오른 말을 갈라지는 목소리로 힘겹게 이야기 했다. 어서 땀투성이가 된 몸을 씻어 내고 싶기도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화가 진행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뭐라고?”

 

그녀는 내말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완전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듯이 이리저리 빠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

젠장! 그러고 보니 이 상황에서 이 말은 누가 들어도 빤하고 빤한 의미의 대사잖아! 급한 마음에 너무 두서없이 말을 내 뱉었다! 내 말이 충분히 오해할 만한 것인 것을 깨달은 나는 허둥지둥 팔을 휘저으며 필사적으로 해명했다.

 

, 아니! , 그러니까! 땀이 많이 나기도 했고! 이제 자려면 씻기도 해야 하고! , 이제 시간도 늦었으니까! 화장실이 많이 좁긴 해도 샤워는 할 수 있으니 쓰세요!”

, 그래! 마침 샤워가 하고 싶었던 참이다! 땀을 흘렸으니까! 흘린 땀은 씻어야 하니까! 그럼 먼저 실례하지!”

 

-!

 

내가 내민 옷을 받아든 그녀는 국어책을 읽는 것처럼 딱딱한 말투로 외치며 도망치듯 화장실로 들어갔다.

 

쏴아아-

 

잠시 후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그제 서야 한숨을 푹 쉬며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나는 갈아입을 옷을 정리해놓고 여자애가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시간을 때울 겸해서 노트북을 켠 뒤 인터넷 라디오를 틀었다.

 

요새 대체 이게 무슨 꼴 인거지.’

 

벽에 등을 기대고 힘을 풀자 피로가 몰려와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져 갔다.

 

- ‘금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였고.’

 

어느새 라디오에서 나오는 방송은 조금씩 귀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 ‘다음 차기 자유당 총재 유력후보들 중 한명으로 손꼽히는 아라세카이 의원이 오늘 기자 회견을 열고.......’

 

“!”

 

순간 몰려오던 잠이 확 달아나며 나도 모르게 눈이 번쩍 뜨인 나는 귀를 의심했다. 분명히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 ‘아라세카이 의원은 국내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조선반도의 문제에 대해 정부가 강력히 개입 할 것을 주문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야당에서는 조선반도의 자치권을 전면 부정하는 발언이라며......’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아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켜고 방금 들었던 이름을 검색을 했다.

 

[아라세카이 료지. 현 여당인 자유당 소속 중의원. 공안요원 출신인 그는 공안청 조사 제3부 부장, 공안청장 등 요직을 역임하였고 은퇴와 동시에 우익 보수정당인 자유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하였다. 자유당 내에서도 대표적으로 꼽히는 극우성향의 정치인이며 반도문제와 관련하여 강경한 발언으로 몇 차례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그는 슬하에 1녀를 두고 있으며......]

 

나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손을 더듬거리며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었다.

 

[공안청 조사 제3부 조사관. 아라세카이 히토미.]

 

흰 바탕의 명함에 검은색 글씨로 깔끔하게 쓰여 있는 이름의 성은 내 모니터에 띄워져 있는 이름의 성과 한자가 정확히 일치했다. 성이 3만개나 되는 일본에서는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아무리 조사관이 간부라고는 해도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공안요원들일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그렇게 까지 쩔쩔 맨 이유를 납득하기에 충분했다.

 

하마터면 진짜 인생 귀찮아질 뻔 했구나!’

 

등줄기가 서늘해진 나는 휴대폰이 고장 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쪽에서 내 말을 의심하지 않고 넘어가긴 했지만 아마 휴대폰이 멀쩡했다면 나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순순히 번호를 넘겼을 것이 분명했다. 어찌됐든 이런 사람과는 조금이라도 얽히지 않는 것이 일신에 좋은 것이다.

 

그건 그렇고 반나절 만에 또 마주치다니, 다행히 그쪽은 우리를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지만.’

 

나는 복잡해진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차피 이제 진짜로 마주칠 일은 없겠지. 그리고 며칠만 지나면 그쪽도 나에 대해선 금세 잊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한가한 사람도 아니니. 덕분에 잠이 확 깼다.

 

찰칵- 끼익-

 

화장실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열린 문틈 사이로 화장실 불빛과 함께 수중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 벗어 놓은 옷은 이 쇼핑백에 담아서 가져가세.......?”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긴 흑발, 만족스럽다는 듯이 살짝 감고 있는 눈, 살짝 상기 되어 있는 양 볼과 그것에 대조되어 더욱 희고 부드러워 보이는 피부, 굴곡지고 매끄럽게 떨어지는 몸의 라인, 강렬한 듯 은은한 듯 몸에서 풍겨오는 향기. 내가 빌려준 짧은 반바지와 흰색 반팔 티를 입고 나온 그녀는 남자라면 누구든지 충분히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볼 만 했다. 하지만 나를 놀라게 한 진짜 이유는 전혀 다른 것 이었다.

 

에이, 설마!’

 

나는 양손으로 눈을 비비며 속으로 내가 지금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아니면 요즘 욕구 불만이었던 것인가 하며 마음을 진정시킨 뒤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례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예의상이라는 느낌으로 인사를 한 그녀는 머리칼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기 위해 수건을 머리 위로 넘겨 올리며 어깨를 쭉 젖혔다. 그러자 상대적으로 앞으로 내밀어진 가슴은 얇은 티셔츠에 달라붙으며 도드라지는 그것의 윤곽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안한 거냐! 아니, 물론 땀에 푹 젖었을 테니 다시 하고 싶진 않았겠지!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행동에 경각심이란 것이 없는 거냐! 타인의 시선이란 걸 좀 의식해라! 이 여자야!’

 

내 두 눈을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했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뭐냐 그 태도는 얼굴까지 빨개져서. ? , 어이 너 코피가!”

 

주르륵- 뚝 뚝.

 

역시 아직 지혈이 잘 안됐던 건가. 일단 이걸로......”

, 잠깐만요! 그렇게 가까이 다가오면!”

?”

아니, 그러니까 이제 나도 씻으러 들어가야 하고, 괜찮으니까 알아서 하게요!”

 

-!

 

나의 갑작스런 태도에 당황해하는 그녀를 방에 남겨둔 채 나는 코를 부여잡고 도망치듯 화장실에 들어왔다. 한사람이 간신히 서 있을만한 작은 화장실 내부는 방금 전 그녀의 몸에서 나던 향기의 수증기로 가득 차있었다.

, 그러고 보니 방금 전까지 여기서 저 여자애가!’

 

후두둑!

 

거울에 비친 코에서 피가 더욱 맹렬하게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란 나는 급히 휴지를 뭉쳐 코를 막았다.

 

하아, 내가 무슨 사춘기 남자애도 아니고.’

그래, 저런 거에 일일이 의식하지 않으면 되잖아! 나는 훌륭 하.......지는 않지만 일단은 성인이다. 나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저런 신민증에 잉크도 안 마른 것 같은 애한테 내가? 웃기지 마라! 내 이상형은 쭉쭉 빵빵하고 농염한 누님이다!

 

그런데 잠깐, 위에 속옷을 안 입었다는 것은, 설마 마찬가지로 아래쪽도.’

“......”

 

나는 샤워를 다 마친 후에도 한참동안 가만히 서서 어릴 적 배웠던, 알고 있는 동요란 동요는 전부 한 번씩 마음속으로 열창한 후에야 간신히 화장실을 나올 수 있었다.

 

너무 늦잖아. 대체 얼마나 씻어 대는 거냐.”

아하하, 코피가 잘 멈추질 않아서요.”

 

내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방 한쪽에 앉아있던 그녀가 나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나는 황급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대충 변명을 했다. 지금 그녀를 봤다간 화장실에서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대참사가 벌어질 것 같았다.

 

빨리 와서 앉아라.”

 

잠시 말이 없던 그녀는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약간 망설이며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 찾아냈는지 그녀의 손에 구급상자가 들려있는 것이 보였다.

 

어서!”

 

내가 머뭇거리자 못 참겠다는 듯이 그녀가 소리쳤다. 거부할 수 없음을 느낀 나는 엉거주춤 그녀의 앞에 앉아 시선이 엄한 곳에 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능숙하게 구급상자에서 약품들을 꺼낸 그녀는 내 얼굴에 난 생채기를 소독하기 시작했다.

 

. 해라

입 안에 난 상처까지 굳이 소독 할 필요는.”

“......”

.”

 

나는 잠시 저 구급상자에 입안을 소독할 수 있는 약품이 있었던가에 대해 고민에 빠졌지만 약을 묻힌 솜을 집은 집게가 입안에 들어온 이후였다. 비릿하고 쓴 맛이 입안에 금세 퍼졌다.

 

아깐, ..............”

? 방긍 머하그요?”

, 그러니까 아까! 그 건달자식이 날 때리려던 것을 네가 대신 막아 줬던 것 말이다! 물론,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난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 , 나를 위해 용기를 낸 것에는 예의상이지만 감사인사 정도는 하지!”

? 그흐, 그건!”

 

이 여자, 뭔가 굉장한 오해를 하고 있잖아! 그렇다고 내가 몸을 날린 건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건달을 위해서였습니다!’ 라고는 절대 말 못 하지만! 설마 방에 들어와서부터 얼굴을 빨갛게 하고 꼼지락거린 이유가 이 말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냐!

 

, 그러니까 아까! , 고마....... , 에잇! 멍청아! 약해 빠진 주제에 앞뒤 안 가리고 끼어드니까 이런 꼴이나 당하지! 분수를 모르는 바보 같으니라고!”

끄하학! 그러케 세게 누흐면 아팟! 살사알!”

우당탕-! 쿵쾅!

와르르-!

 

한바탕 난리를 치는 바람에 치워놓았던 물건들이 쏟아져 내렸다. 다시 방을 정리하고 마침내 이불에 몸을 눕힐 수 있던 것은 깊은 새벽이 된 후에서였다.

 

너무 좁아서 조금만 뒤척여도 황천 행 티켓 예약이겠는데.’

 

사실 말이 이불이지 내가 원래 쓰던 매트와 이불은 손님이라는 핑계를 대며 그녀가 차지해버렸고 매트 위로 조금이라도 올라오면 내일 아침 해를 보는 일은 없을 테니 알아서해.’ 라는 그녀의 독설을 들으며 나는 안 입는 옷들을 바닥에 대충 깔고 누웠다. 한명이 누워도 넉넉하지 않은 공간에, 특히 매트가 깔려있는 부분 의외의 공간은 매우 협소했기에 나는 잔뜩 움츠린 포즈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불에서 네 냄새가 잔뜩 나잖아.”

이런 곳에 사는 사람에게 이불세탁은 사치입니다. 정 그렇게 불쾌하다면 이불은, 그럼 내가.”

, 불쾌한건.......! ,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그냥 써주도록 하지!”

 

그녀가 이불을 끌어안으며 눕는 것을 확인한 나는 전등을 끈 뒤 어둠속을 더듬거리며 어린아이도 자다가 가위눌릴 것 같은 좁은 면적에 간신히 몸을 눕혔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아주 조금만 팔을 뻗어도 닿을 거리에 누워있는 그녀의 실루엣이 보였다.

 

누군가의 곁에서 잠에 드는 것이 얼마만이거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할머니와 살았던 때는 내방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아마 아주 어렸던 시절이 마지막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생각을 떠올릴 수 없었다. 옆에서 새근새근 들려오는 조용하고 기분 좋은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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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의 과정은 험난했씁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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