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주변의 전원적인 느낌과는 대조적으로 활기에 넘치는 카미야마 고등학교

 드디어 시작된 카미야마 고등학교의 문화제. 문화제에 문집을 내기로 했던 고전부는 주문 실수로 인해 빙과 문집 200권을 판매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문집의 판매대를 늘려달라고 총무위원장에게 부탁하려는 치탄다는 자신이 부탁하는것에 서툴다는 것을 깨닫고, 이리스에게 부탁하는 요령을 물어본다. 사실 여기서 이리스가 치탄다에게 알려준 방법이, 치탄다가 호타로를 휴일에 불러내서 세키타니 사건의 조사를 부탁할때 이미 무의식적으로 사용했었던 것이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호타로에게 기대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그에게는 무척 간단한 일일 것임을 강조하고, 그에게 가까이 접근해서 이성성을 드러내왔던 치탄다가 아니었던가. 그랬던 그녀가 이 '부탁하는 방법'을 의식적으로 남에게 사용하려고 하자 피로감을 느끼며 갈등하는 것을 보면, 그녀에게 호타로는 충분히 '특별한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녀의 피로감을 유일하게 알아차리는 사람도 다름아닌 호타로다.

치탄다의 피로를 눈치채는 호타로

 한편 마야카는 만화연구부에서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그녀는 2학년 선배인 코우치와 만화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로 부딛히며 크고작은 다툼을 야기한다. 이 와중에 만화연구부 부장인 유아사는 마야카를 위로해주려는 모습과 함께 두 사람의 갈등을 동아리의 홍보에 이용하려는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양면성을 나타낸다. "내일 또 한다"고 소개하며 마야카와 코우치의 설전을 홍보하는 부장의 모습은 소름끼칠 정도다. 만화연구부로 인해 힘들어하는 마야카는 그 일을 고전부원들에게는 숨기지만, 사토시만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직감한다. 사토시 역시 마야카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마야카가 만화연구부에서 갈등을 빚고있다는 것을 눈치채는 사토시

 그러는 사이에 문화제에선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괴도 십문자 범행 성명과 함께 동아리의 물품들이 줄줄이 도난당한것이다. 일련의 도난사건에서 금세 그 규칙성을 파악한 호타로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고전부의 문집의 판매를 유도하기로 한다. 곧 학교 전체에도 괴도 십문자에 대한 소문이 퍼지며 범인을 찾아내기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도 곳곳에서 이뤄지기 시작한다.

아카펠라부에서 사과주스를 잃어버리는 장면. 빙과에는 여러 복선과 암시가 곳곳에 심어져있다.

 처음에는 괴도 십문자를 잡아내는데 극히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호타로지만, 그것 문집을 홍보하려는 계획에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이었을 것이다. 이미 학급영화사건으로 크게 데인적이 있기에 그의 날선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그는 표면적으로만 부정적이었을 뿐 속으로는 여전히 자신의 추론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지금까지 치탄다의 부탁에 의해서만 추리를 해왔던 호타로가 스스로의 호기심에 이끌리며 추리를 진행하는 모습은 그의 성장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추리는 전부 치탄다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호타로의 모습은 귀여울 정도다. 


오레키의 누나의 개입은 언제나 결정적이어서 모든 일은 그녀의 계획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불러일으킨다.

 홀로 추리를 해나가는 호타로에게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던 사토시는, 이번 십문자 사건의 범인을 자신만의 능력을 사용해 붙잡으려 한다. 소위 말하는 안락의자형 탐정인 호타로에게 이번 사건만큼은 한계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십문자 사건은 사토시가 아닌 호타로에 의해 해결된다. 전교생 및 모든 손님이 용의자인 상황에서 호타로는 놀라울정도로 치밀한 논리전개를 통해, 십문자 사건의 범인으로 타나베 총무위원장을 지목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어서 호타로는 범인이 총무위원장임을 이용해 빙과 문집의 판매를 의뢰한다. 언제나 자신의 추리 능력을 이용당하기만 했던 호타로가, 이번에는 총무위원회의 통신판매를 이용하기위해 총무위원장에게 교섭을 시도했다는 점은 아주 인상적이다. 게다가 호타로는 타나베의 범행 동기까지 예측하는데 성공하는 완벽한 추리를 선보인다.


 호타로의 추리를 통해 밝혀진 타나베의 동기는 쿠가야마 학생회장에 대한 박탈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작년 문화제에 출품되었던 '저녁에는 해골로'의 제작에 참여했던 그는 쿠가야마의 놀라운 그림실력에 감탄했었지만, 그것이 그에게는 그저 한 순간의 놀이였을 뿐임을 알아차리고 분노한다. 아무리 잘 그리려 노력해도 그저 만화의 배경을 도와주는 수준에 불과했던 타나베는, 처음 펜을 쥐고 단숨에 수준급의 만화를 그려낸 쿠가야마가 그 능력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 안타까운 마음을 이해해줄 사람은 원작을 썼던 안죠 하루나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토시가 호타로의 추리를 엿듣는 연출을 통해 그의 심리가 잘 드러난다.

 타나베가 자신의 기분을 이해해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안죠 하루나. 그러나 그녀 역시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는 박탈감을 느끼는 대상이었다. '저녁에는 해골로'의 원작을 썻던 안죠 하루나는 만화연구부 소속이었으나 만화 제작은 처음 시도하는 일이었다. 그런 그녀와 같은 만화연구부 소속이자 친구였던 코우치는 그녀의 작품을 읽고 아예 자신이 만화를 바라보는 가치관을 바꿔버리기까지 한다. 명작같은 것은 없고 오로지 개인의 취향만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고서는 안죠 하루나가 만들어낸 '명작'서 느끼는 박탈감과 열등감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코우치와 갈등을 빚었던 마야카는, 수작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작품과 비교해보던, 그러나 역시 '저녁에는 해골로'보다는 한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보디 토크'의 작가가 실은 코우치임을 알아차리고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사토시도 호타로의 숨겨져 있었던 추론능력이 치탄다를 만난 후에 날로 성장해 가는 것을 보며 열등감에 빠진다. 그의 "데이터베이스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는 좌우명은 원래 자신의 데이터베이스로서의 능력을 자신만만하게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저 그의 한계를 절실하게 표현하는 문장이 되어버렸다. 이번 사건에서는 호타로의 능력이 한계에 도달하리라고 생각한 그였지만, 호타로는 그의 예상을 깨며 저만치 앞서나간 것이다. 사토시는 이러한 자신의 기분을 마야카가 알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그와 비슷한 상황에 놓였었던 마야카였으니 그의 기분을 모를리가 없음은 당연하다.


 십문자 사건의 타나베와 사토시부터  만화연구부의 코우치와 마야카에 이르기까지, 빙과는 하나의 사건으로 각 인물들의 갈등을 아주 짜임새 있게 그려내고 있다. 이렇게 청춘의 아픔을 겪는 고전부는 문집의 완매라는 소소한 목표의 달성으로 그 아픔을 훌훌털고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청춘의 장미빛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청춘의 어느 순간에 회색빛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비워지는 잔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호타로가 여러 사건들의 수수께끼를 해결해 오는 동안, 치탄다와 사토시를 비롯한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의 능력을 알아채기 시작한다. 다만 호타로 본인은 아직 자신의 능력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으며 여전히 그저 타인의 영향력에 휘둘리며 수동적으로 그 능력을 사용당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능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못하는 그의 한계는 금방 드러나고 만다.


자신이 혼고의 친구라고 대답하는 에바의 의미심장한 뒷모습. 그녀는 이미 이 일의 전말을 알고있지 않았을까.

 학급영화의 완성을 위해 각본가 혼고의 진의를 추리해 달라고 부탁하는 이리스. 그녀는 사실 호타로의 누나로부터 그의 능력에 대한 말을 전해듣고는 치탄다를 통해 호타로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치탄다의 호기심을 이끌어내는 이리스의 모습은 철저히 계산적이다. 호타로는 역시 치탄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그렇게 이리스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된다. 


 고전부는 영화 제작팀의 의견을 들어보지만 어느것 하나 이치에 맞아보이지는 않는다. 포기를 선언하려는 호타로에게 이리스는 개인의 능력에 대해 충격적일정도로 냉철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호타로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호타로에게 자신의 능력을 자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지만, 그것도 역시 이리스 본인의 이익을 위한 계산적인 발언이었을 뿐이었다. 능력에 대한 자각은 얻었지만, 그 능력을 이용당하기만 하는 호타로는 그렇게 이리스의 의도대로 탐정이 아닌 각본가가 되어버리고 만다.


호타로의 능력을 부러워하는 사토시. 빙과 작품 내내 호타로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채주는 사람도 사토시다.

호타로의 이야기는 영화에서 나타난 조건만을 통해 가장 합리적인 결론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당초의 목표는 혼고가 쓰려고 했던 진짜 각본, 즉 혼고의 진의를 밝혀내려는 것이였음에도 이리스의 말에 휘둘린 그는 자신이 직접 혼고를 대체해버리고 자신만의 각본을 쓰게 된다. 세키타니 사건을 조사할때 세키타니에 주목하지 못했던 것 처럼 이번에도 혼고에 주목하지 못한 그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만 것이다. 심지어 이번에는 영화소품으로 준비했던 자일의 존재를 놓치는 논리상의 허점도 존재한다. 사토시는 완성된 영화를 보고 그것이 혼고의 각본을 추론한 것인지, 아니면 아예 새롭게 호타로가 쓴 각본인지를 예리하게 물어보기까지 한다영화는 성공적이었으나, 그의 추리는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호타로가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를 깨닫는 장면은 신선한 연출로 강조된다

 이 와중에 치탄다는 그녀답게 혼고라는 개인의 상황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사실 이것도 어쩌면 '빙과'라는 작품의 서술트릭일지도 모른다. 집필을 중단한 혼고, 각본의 결말을 모르는 제작팀. 도대체 어떤 상황이길래 혼고는 그 누구에게도 각본의 결말을 알려주지 않은채 집필을 중단한 것인가?  시사회를 마치고나서 바로 지나가듯이 제시되었던 이 의문은 고전부의 추리가 진행되는 동안 감추어져 있다가, 학급영화 에피소드의 끝에 가서야 비로소 다시 등장한다. 


 치탄다의 이 의문은 호타로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추리의 문제점을 직접적으로 깨닫게 한다. 추리라는 것은 타인에 대한 이해 없이 단순히 종이에 적힌 문장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 에피소드에서도 치탄다는 혼고에게 공감하는 마음을 통해 그녀의 진의를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그녀의 타인에 대한 이해력이 다시금 부각된다.


정지된 시간. 이 학급영화 사건에서는 특히 새로운 연출이 자주 시도된다.

 어쨌든 끝난 일은 끝난 일로 덮어보려는 호타로. 생각을 딴데로 돌리기 위해 타로카드에 대해 살펴보는 그는 사토시가 타로카드를 통해 암시한 대로 자신이 주위의 여성들에 의해 휘둘리고 있었음을 뒤늦게나마 알아차린다. 호타로는 이리스에게 사건의 전말을 캐물으며, 그녀가 자신을 원하는 대로 주무르고 있었던 것임을 깨닫고 크게 낙담한다. 자신의 능력이 그저 남의 이익을 위해 이용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를 다시 회색빛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만다.


 회색빛으로 돌아가는 호타로에게 극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것은 수영장에서의 사건이었다. 호타로가 수영장 알바로 일하게 되는 OVA는 흔히 서비스만을 위한 에피소드로 착각하기 쉬우나, 사실 빙과 작품의 전체 구성상 정확히 가운데에 해당함으로서 이 사건을 중심으로 빙과의 시나리오는 대칭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렇기에 이 에피소드는 호타로의 성장을 그리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호타로의 누나는 언제나 얼굴이 가려진 상태로 등장해서 그녀의 신비적인 느낌을 더한다.

 수영장 에피소드에서는 그 어느때 보다도 더 의욕이 없고 수동적이 된 회색빛 호타로가 그려진다. 그가 학급영화 사건을통해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해볼 만 하다. 그렇게 다시 의욕을 상실한 그에게 치탄다는 아주 중요한 말을 꺼낸다. 자신에게 객관적인 기준을 들이댈 필요는 없으며, 주관적이어도 좋다는 것이다.


 그동안 호타로는 자신의 주관보다는 타인의 의견이 보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옳다고 생각하며 그 의견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호타로의 누나가 지적한대로 "어차피 할 일이 없는"것은 객관적으로 옳은 사실이었고, 이리스의 개인의 능력에 관한 비유도 그 자체만으로는 객관적으로 옳은 말이었다. 그 결과는 물론 주관없이 타인에게 조종당하는 꼴일 뿐이었다. 이 수영장 에피소드를 통해 호타로는 자신의 능력과 주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되었고, 성장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호타로가 샤프심을 끼우는 장면을 통해 긴장감의 조성과 해소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치탄다는 호타로의 변화를 주도한 인물이다. 물론 그녀 자신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럴 의도도 없었다. 변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호타로에게는 치탄다의 존재 자체가 이미 변화의 이정표인 것이다. 자신과 정반대의 성격을 갖고있는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에게 영향을 받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치탄다와 호타로가 어떻게 다른지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치탄다가 어떤 인물인지는 '대죄'편과 '온천'편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못한 인형을 통해, 호타로가 사건의 진행을 불완전한 형태로 전해듣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치탄다는 자신이 화낸 이유를 궁금해한다. 정확히는 자신이 화를 냈었던 그 상황, 즉 선생님이 반의 진도을 착각한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물론 그 호기심에 호타로는 공감하지 못한다. 바로 여기에서, 호타로에게 큰 영향을 끼친, 치탄다의 특징적인 성격이 나타난다. 치탄다는 바로 타인을 신뢰하고 이해하려는 성격의 소유자인 것이다. 심지어 자기 혼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나머지 호타로에게 까지 부탁을 할 정도 그녀의 인간신뢰는 대단하다. 아무 관계도 없는 타인에 대한 신뢰가 이정도이니 그녀가 형재자매 관계에 대해 갖는 믿음이 어느정도일지 쉽게 예상이 된다.


 그에 반해 호타로는 기본적으로 불신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귀신 목격담을 늘어놓아도 그것은 전부 억새풀을 잘못 본 것이라고 일축한다. 온천여관을 방문해서 마야카와 치탄다가 목격했다던 목맨 그림자도 분명히 무언가의 착각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추리를 시작한 호타로는 어렵지 않게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치탄다는 그의 추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의 추론은, 그녀의 믿음과는 전혀 다르게, 두 자매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이좋은 형제자매라는게 오히려 더 어색할 뿐이다.


호타로가 자신과 치탄다가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하는 장면은 다양한 연출로 여러번 강조된다.

 치탄다가 선생님에게 화를 낸 이유를 찾고 여관 맞은편에서 목맨 그림자가 흔들린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치탄다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이해라는 자신의 강렬한 색체를 유감없이 호타로에게 뿜어낸다. 호타로는 그녀가 화낸 이유를 찾고나서 그녀의 인간신뢰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고, 젠나 자매가 서로 돕는 모습을 보며 그러한 신뢰가 "억새풀 만은 아닐것"이라는 생각을 갖게된다. 


치탄다의 충격적인 발언에 고전부원들이 깜짝 놀라는 이 구성과 연출은 나중에 한번 더 사용된다.

 이렇게 두 사건 모두 호타로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는 작품의 후반부에 직접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작품의 전반부에서 계속 보여지는 치탄다와 호타로의 대비가, 후반부에서는 조화를 이루는 모습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런식으로 전반부와 후반부가 대칭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은 작품의 시나리오적인 완성도를 크게 높여준다. 이러한 체계적인 시나리오 구성에 대해서는 후반부 에피소드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봐요 내 말이 맞죠?'라고 말하는 듯 싶다. 이 온천편은 호타로와 치탄다만의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구성도 후반부에 다시 한번 등장한다.



두 주인공 외에도 다른 배경인물들이 함께 교실에 있다는 것은 현실감을 높여준다.

빙과는 호타로의 대사로 시작된다. "예를들면 공부에도, 스포츠에도, 연애에도 흥미를 가지지 않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회색빛 취향도 있지 않을까?" 호타로의 이 대사는 바로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1화에서 보여지는 호타로의 모습은 그야말로 그 어떤것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 소극적인 인간이다. 부활동은 흥미가 없으므로 들지 않는다. 그러나 누나가 시켰으므로 고전부에 가입한다. 남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치탄다가 요구하므로 수수께끼는 푼다. 방과후에 학교에 남는 일은 없도록 한다. 그러나 선생이 시켰으므로 숙제는 남아서 한다. 여기에다 치탄다에게 음악실까지 끌려갈 것을 염려해서 무당거미회라는 이야기를 흘리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추리를 진행시켜서 행동을 최소화 시키려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정도의 에너지 절약주의 신조를 보여주고 있다.


호타로와 치탄다가 지학준비실에서 만나는 장면은 고프레임의 슬로모션으로 연출되어서, 그 순간을 아주 효과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런 호타로에게 큰 돌풍을 몰고 온 것이 바로 치탄다이다. 호타로와는 다르게 행동력과 호기심으로 완전무장한 이 아가씨는, 자신의 외삼촌, 세키타니 준과 고전부에게 있었던 과거의 일을 알아내기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다. 호타로의 수수께끼를 푸는 기상천외한 능력은, 비록 그 수수께끼의 해결 중 하나는 호타로의 자작극이었지만, 치탄다에게 큰 인상을 남기고 호타로에게 다가가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호타로는 "신경쓰여요!"를 외치며 다가오는 치탄다가 당황스럽다. 그에게 치탄다는 이해할 수 없는, 자신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다. 처음에 그는 수수께끼의 본질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치탄다의 호기심을 납득시키려는 목적으로 추리를 시작한다. 

타인의 활력에 압도당하는 호타로. 호타로에게 분홍빛이 얼마나 멀게 느껴지는지 알 만하다.

 치탄다가 수수께기에 보이는 관심, 그 분홍빛에 호타로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관심은 자신이 처한 이 익숙하지 않은 상황을 벗어나는 것 뿐이다.


순간적으로 정지되는 시간의 흐름은 호타로가 느끼는 긴장감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호기심을 '고백'하는 치탄다에 의해 호타로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치탄다의 진심어린 호소에 호타로는 드디어 수수께끼의 표면적인 해결이 아닌, 본질적인 해결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여전히 수동적이며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지금껏 자신만을 위해 행동한 호타로가 처음으로 타인을 위해, 자신의 신조를 버리고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이러한 호타로의 변화는 사토시가 가정 먼저 알아챈듯 하다.

잔잔한 농촌. 그러나 고전부의 생활은 변화무쌍하다.

 사토시의 물음에 호타로는 회색이 지겨워졌다고 답한다. 호타로가 치탄다로 상징되는 분홍빛 세계에 이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이끌림은 회색빛이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호타로라는 한 남성이 치탄다라는 여성에게 이끌렸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저 단지 남의 떡이 커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호타로의 진정한 동기가 어떤 것일지는 보는사람의 몫이다.


세키타니를 생각하는 호타로. 필름영상의 피사계심도 개념을 애니메이션에 적용하였다. 호타로의 눈을 강조하고 있다.

 치탄다는 세키타니와 호타로가 비슷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일까, 호타로는 이 세키타니 사건의 결정적인 실마리를 세키타니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찾아낸다. 일반적으로 호타로의 추리는 엄격한 사실에 기초한 논리적인 추론에 의한 것이다. 사실 호타로가 이보다 앞서 고전부원들이 모아온 자료를 토대로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찾아낸 바 있다. 그러나 그 결론은 잘못된 것이었다. 호타로에게 부족한 것은 타인에 대한 공감이었다. 애초에 치탄다가 세키타니 사건을 조사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 일이 어린 자신에게 울음을 터뜨리게 할 만큼 매우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호타로는 당시 치탄다가 가졌을 생각, 세키타니가 가졌을 생각은 철저히 배제한 채 오직 문서화된 사료만을 가지고 객관적인 추론을 시도했던 것이다. 뒤늦게나마 그 부족함을 깨달은 호타로는 진실에 도달하는데 성공한다. 

세키타니가 겪었을 고통에 공감하고 동요하는 호타로.

 어떻게 보면 호타로가 타인에 대해 공감하기 힘든 것 뿐만이 아니라, 타인도 호타로에 대해 공감하기 힘든 면이 있다. 말하자면 '섬'같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키타니 사건을 통해 살짝 엿볼 수 있었듯이, 목석같은 호타로도 감정이 있고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 미약하지만, 호타로는 치탄다와의 만남을 통해 이미 변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신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는 두 사람.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성장 드라마의 정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래의 막연함을 잘 나타내는 연출이다.




  • 원작 : 요네자와 호노부
  • 감독 : 타케모토 야스히로
  • 각본 : 가토 쇼우지
  • 캐릭터 디자인&작화감독 : 니시야 후토시
  • 음악 : 타나카 코헤이
  • 애니메이션 제작 : 교토 애니메이션


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시리즈를 원작으로, 타케모토 야스히로가 감독하고 가토 쇼우지가 각본을 쓴 교토 애니메이션의 작품이다. 나는 이 애니메이션을 교토 애니메이션의 작품중에서도 아주 우수한 축에 속한다고 본다. 비록 상업적으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작품성만큼은 아주 뛰어나다. 빙과의 작품성을 높이는 세가지 특징을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추리물이면서 동시에 성장드라마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총 23편 (OVA 1편포함)으로 이루어진 각 화의 구성을 살펴보면 크게 몇개의 독립된 에피소드로 이루어져서, 각 에피소드마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추리를 풀어나가고 있다. 만약 애니메이션의 전체가 각각의 에피소드만을 모아놓은 것이라면 특별할 것 없는 추리물이겠지만, 빙과는 각각의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를 제시하여 발전시키고 있다. 바로 호타로의 성장이다. 빙과는 호타로가 각 에피소드를 겪음에 따라 성장하는 모습을 아주 균형있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치탄다가 아주 큰 역할로 작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마야카와 사토시의 성장도 마찬가지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치탄다의 성장은 아주 약하게, 마야카와 사토시는 그 과정의 아픔만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민하고 변화하며 성장하는 과정이 온전하게 작품 내내 그려진 호타로가 빙과의 핵심적인 주제를 나타내는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내에서 조용히 진행되는 호타로의 성장 드라마는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재미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빙과의 또 다른 특징은 작품의 공간적 배경과 내용의 대비가 갖는 독특한 분위기이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카미야마시는 산골의 비교적 낙후된 소도시로 그려진다. 호농과 신사의 주지가 지역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나, 학교 도서관에서 여전히 도서대출카드를 수기로 작성하고 있다는 점, 고층빌딩없이 한산한 시내와 따듯한 색감으로 그려지는 배경을 보면 거기에서 나오는 전원적인 느낌을 바로 받을 수 있다. 마지막 화에서 치탄다는 가혹할정도로 카미야마 지방에 대해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이렇게 조용히 시간이 흐르는 카미야마시에서, 고전부 4인방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의 생활은 다이나믹하기만 하다. 카미야마 고등학교의 문화제는 근방에 유명세를 떨칠만큼 떠들썩하고, 호타로의 누나는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젊음의 활력과 늙어가는 시골은 이질적이다. 그런데 빙과에서는 이상할정도로 자연스럽게(!) 이 두 요소를 섞어내고 있다. 이렇게 배경과 내용이 이루는 대비는 아주 독특한 감상을 느끼게 한다.


높은 품질의 작화또한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앞서 언급한 전원적인 분위기를 내는데 작화의 공이 아주 크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고품질의 작화가 주는 시각적인 즐거움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이와 더불어 교토 애니메이션 특유의 아주 세심한 연출도 훌륭하다. 대사뿐만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말없는 행동과 연출로 표현되는 요소들을 통해, 등장인물은 생동감을 얻고, 보는이는 보다 입체적인 감동을 느낄 수 있게된다. 이렇게 세심하면서도 다각도로 심어진 연출적 요소들은, 작품을 다시 돌려보게 되었을때 기존에는 놓쳤었던 요소를 발견하고 새로운 감상이나 생각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도 아주 매력적이다. 물론 모든 연출적 요소를 꼭꼭 숨겨놓을 뿐이라면 너무나도 딱딱하겠지만, 빙과는 전체적인 연출과 세밀한 연출을 적절히 분배해놓아 부드러운 겉과 단단한 속을 동시에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각 에피소드들을 지금까지 언급한 세가지 특징, 즉 성장드라마/배경분위기/작화연출을 중심으로 파해쳐보기로 하겠다.




자칭 쿄빠인 필자가 쿄애니의 작품에 대해 심도있는 리뷰를 진행하는 카테고리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의 리뷰임을 염두에두시기 바랍니다. 또한 모든 포스트는 독자 여러분께서 이미 해당 작품을 모두 보셨다는 가정하에 씌어 있으므로, 리뷰를 읽으시기 전에 먼저 해당 작품을 시청하시고 오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제 리뷰를 읽고 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재미를 쿄애니 속에서 찾게되셨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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