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주인공 외에도 다른 배경인물들이 함께 교실에 있다는 것은 현실감을 높여준다.

빙과는 호타로의 대사로 시작된다. "예를들면 공부에도, 스포츠에도, 연애에도 흥미를 가지지 않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회색빛 취향도 있지 않을까?" 호타로의 이 대사는 바로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1화에서 보여지는 호타로의 모습은 그야말로 그 어떤것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 소극적인 인간이다. 부활동은 흥미가 없으므로 들지 않는다. 그러나 누나가 시켰으므로 고전부에 가입한다. 남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치탄다가 요구하므로 수수께끼는 푼다. 방과후에 학교에 남는 일은 없도록 한다. 그러나 선생이 시켰으므로 숙제는 남아서 한다. 여기에다 치탄다에게 음악실까지 끌려갈 것을 염려해서 무당거미회라는 이야기를 흘리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추리를 진행시켜서 행동을 최소화 시키려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정도의 에너지 절약주의 신조를 보여주고 있다.


호타로와 치탄다가 지학준비실에서 만나는 장면은 고프레임의 슬로모션으로 연출되어서, 그 순간을 아주 효과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런 호타로에게 큰 돌풍을 몰고 온 것이 바로 치탄다이다. 호타로와는 다르게 행동력과 호기심으로 완전무장한 이 아가씨는, 자신의 외삼촌, 세키타니 준과 고전부에게 있었던 과거의 일을 알아내기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다. 호타로의 수수께끼를 푸는 기상천외한 능력은, 비록 그 수수께끼의 해결 중 하나는 호타로의 자작극이었지만, 치탄다에게 큰 인상을 남기고 호타로에게 다가가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호타로는 "신경쓰여요!"를 외치며 다가오는 치탄다가 당황스럽다. 그에게 치탄다는 이해할 수 없는, 자신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다. 처음에 그는 수수께끼의 본질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치탄다의 호기심을 납득시키려는 목적으로 추리를 시작한다. 

타인의 활력에 압도당하는 호타로. 호타로에게 분홍빛이 얼마나 멀게 느껴지는지 알 만하다.

 치탄다가 수수께기에 보이는 관심, 그 분홍빛에 호타로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관심은 자신이 처한 이 익숙하지 않은 상황을 벗어나는 것 뿐이다.


순간적으로 정지되는 시간의 흐름은 호타로가 느끼는 긴장감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호기심을 '고백'하는 치탄다에 의해 호타로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치탄다의 진심어린 호소에 호타로는 드디어 수수께끼의 표면적인 해결이 아닌, 본질적인 해결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여전히 수동적이며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지금껏 자신만을 위해 행동한 호타로가 처음으로 타인을 위해, 자신의 신조를 버리고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이러한 호타로의 변화는 사토시가 가정 먼저 알아챈듯 하다.

잔잔한 농촌. 그러나 고전부의 생활은 변화무쌍하다.

 사토시의 물음에 호타로는 회색이 지겨워졌다고 답한다. 호타로가 치탄다로 상징되는 분홍빛 세계에 이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이끌림은 회색빛이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호타로라는 한 남성이 치탄다라는 여성에게 이끌렸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저 단지 남의 떡이 커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호타로의 진정한 동기가 어떤 것일지는 보는사람의 몫이다.


세키타니를 생각하는 호타로. 필름영상의 피사계심도 개념을 애니메이션에 적용하였다. 호타로의 눈을 강조하고 있다.

 치탄다는 세키타니와 호타로가 비슷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일까, 호타로는 이 세키타니 사건의 결정적인 실마리를 세키타니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찾아낸다. 일반적으로 호타로의 추리는 엄격한 사실에 기초한 논리적인 추론에 의한 것이다. 사실 호타로가 이보다 앞서 고전부원들이 모아온 자료를 토대로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찾아낸 바 있다. 그러나 그 결론은 잘못된 것이었다. 호타로에게 부족한 것은 타인에 대한 공감이었다. 애초에 치탄다가 세키타니 사건을 조사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 일이 어린 자신에게 울음을 터뜨리게 할 만큼 매우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호타로는 당시 치탄다가 가졌을 생각, 세키타니가 가졌을 생각은 철저히 배제한 채 오직 문서화된 사료만을 가지고 객관적인 추론을 시도했던 것이다. 뒤늦게나마 그 부족함을 깨달은 호타로는 진실에 도달하는데 성공한다. 

세키타니가 겪었을 고통에 공감하고 동요하는 호타로.

 어떻게 보면 호타로가 타인에 대해 공감하기 힘든 것 뿐만이 아니라, 타인도 호타로에 대해 공감하기 힘든 면이 있다. 말하자면 '섬'같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키타니 사건을 통해 살짝 엿볼 수 있었듯이, 목석같은 호타로도 감정이 있고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 미약하지만, 호타로는 치탄다와의 만남을 통해 이미 변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신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는 두 사람.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성장 드라마의 정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래의 막연함을 잘 나타내는 연출이다.




  • 원작 : 요네자와 호노부
  • 감독 : 타케모토 야스히로
  • 각본 : 가토 쇼우지
  • 캐릭터 디자인&작화감독 : 니시야 후토시
  • 음악 : 타나카 코헤이
  • 애니메이션 제작 : 교토 애니메이션


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시리즈를 원작으로, 타케모토 야스히로가 감독하고 가토 쇼우지가 각본을 쓴 교토 애니메이션의 작품이다. 나는 이 애니메이션을 교토 애니메이션의 작품중에서도 아주 우수한 축에 속한다고 본다. 비록 상업적으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작품성만큼은 아주 뛰어나다. 빙과의 작품성을 높이는 세가지 특징을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추리물이면서 동시에 성장드라마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총 23편 (OVA 1편포함)으로 이루어진 각 화의 구성을 살펴보면 크게 몇개의 독립된 에피소드로 이루어져서, 각 에피소드마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추리를 풀어나가고 있다. 만약 애니메이션의 전체가 각각의 에피소드만을 모아놓은 것이라면 특별할 것 없는 추리물이겠지만, 빙과는 각각의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를 제시하여 발전시키고 있다. 바로 호타로의 성장이다. 빙과는 호타로가 각 에피소드를 겪음에 따라 성장하는 모습을 아주 균형있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치탄다가 아주 큰 역할로 작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마야카와 사토시의 성장도 마찬가지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치탄다의 성장은 아주 약하게, 마야카와 사토시는 그 과정의 아픔만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민하고 변화하며 성장하는 과정이 온전하게 작품 내내 그려진 호타로가 빙과의 핵심적인 주제를 나타내는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내에서 조용히 진행되는 호타로의 성장 드라마는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재미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빙과의 또 다른 특징은 작품의 공간적 배경과 내용의 대비가 갖는 독특한 분위기이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카미야마시는 산골의 비교적 낙후된 소도시로 그려진다. 호농과 신사의 주지가 지역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나, 학교 도서관에서 여전히 도서대출카드를 수기로 작성하고 있다는 점, 고층빌딩없이 한산한 시내와 따듯한 색감으로 그려지는 배경을 보면 거기에서 나오는 전원적인 느낌을 바로 받을 수 있다. 마지막 화에서 치탄다는 가혹할정도로 카미야마 지방에 대해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이렇게 조용히 시간이 흐르는 카미야마시에서, 고전부 4인방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의 생활은 다이나믹하기만 하다. 카미야마 고등학교의 문화제는 근방에 유명세를 떨칠만큼 떠들썩하고, 호타로의 누나는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젊음의 활력과 늙어가는 시골은 이질적이다. 그런데 빙과에서는 이상할정도로 자연스럽게(!) 이 두 요소를 섞어내고 있다. 이렇게 배경과 내용이 이루는 대비는 아주 독특한 감상을 느끼게 한다.


높은 품질의 작화또한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앞서 언급한 전원적인 분위기를 내는데 작화의 공이 아주 크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고품질의 작화가 주는 시각적인 즐거움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이와 더불어 교토 애니메이션 특유의 아주 세심한 연출도 훌륭하다. 대사뿐만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말없는 행동과 연출로 표현되는 요소들을 통해, 등장인물은 생동감을 얻고, 보는이는 보다 입체적인 감동을 느낄 수 있게된다. 이렇게 세심하면서도 다각도로 심어진 연출적 요소들은, 작품을 다시 돌려보게 되었을때 기존에는 놓쳤었던 요소를 발견하고 새로운 감상이나 생각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도 아주 매력적이다. 물론 모든 연출적 요소를 꼭꼭 숨겨놓을 뿐이라면 너무나도 딱딱하겠지만, 빙과는 전체적인 연출과 세밀한 연출을 적절히 분배해놓아 부드러운 겉과 단단한 속을 동시에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각 에피소드들을 지금까지 언급한 세가지 특징, 즉 성장드라마/배경분위기/작화연출을 중심으로 파해쳐보기로 하겠다.




자칭 쿄빠인 필자가 쿄애니의 작품에 대해 심도있는 리뷰를 진행하는 카테고리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의 리뷰임을 염두에두시기 바랍니다. 또한 모든 포스트는 독자 여러분께서 이미 해당 작품을 모두 보셨다는 가정하에 씌어 있으므로, 리뷰를 읽으시기 전에 먼저 해당 작품을 시청하시고 오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제 리뷰를 읽고 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재미를 쿄애니 속에서 찾게되셨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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