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에른 뮌헨과 도르트문트의 대결, 

데어 클라시커(Der Klassicker)

2013.11.24


우리가 축구를 볼때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마다 각자 다르겠지만 두 팀간의 치열한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러한 두 팀이 어떠한 관계를 맺고있다면? 특히나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 흥미도는 더욱 올라갈 수 밖에 없다. 서로가 서로를 숙적으로 생각하며 꺽기를 열망하는 그 대결은 축구는 물론이고, 어떠한 스포츠에서도 엄청하게 관심을 모을 수 밖에 없다.


축구에서도 그러한 더비가 몇가지 있다. 맨체스터 시티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맨체스터 더비' 나 아스날과 토트넘의 '북런던 더비' 혹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의 '레즈 더비' ,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열광을 받고 있는 엘 클라시코(El Clasico) 도 이러한 더비중 하나이다. 특히나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엘 클라시코 더비는 스페인이나 유럽뿐만 아니라 이미 전세계적으로도 증명된 세계 최고의 더비로 알려져있다. 양 팀의 경기 일정이 잡히는 날이면 전 세계에 퍼져있는 두 팀의 팬들이 치열한 갑을논박을 벌이며 경기를 지켜본다.


그리고 최근 그러한 여러개의 더비들 중에서 떠오른것이 하나 있다. 바로 독일팀인 바이에른 뮌헨과 도르트문트의 더비인 데어 클라시커(Der Klassicker)다. 전통의 경기라는 뜻을 가진 이 데어 클라시커는 지난 2012-2013 시즌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전에서 두 팀이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를 꺽고 올라오면서 결승전으로 성립되며 모든 이들에게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 이후 데어 클라시커는 전세계적으로도 많은 집중을 받고 있으며, 매우 흥미로운 더비로 자리잡았다.



데어 클라시커(Der Klassicker)는 사실 두팀의 최고 더비가 아니다?

두 팀은 사실 '전통의 경기'라는 의미에 데어 클라시커라는 이름과 달리 상당히 최근에야 만들어진 더비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바이에른 뮌헨의 전통적인 라이벌은 'TSV 1860 뮌헨' 와 'FC 뉘른베르크' 라고 볼 수 있다. 


TSV 1860 뮌헨은 전형적인 지역 라이벌로서, 엘 클라시코(El Clasico)와는 차이가 있다. 엘 클라시코가 정치, 역사적으로 정말로 '숙적'이였다면 두 팀은 훈훈한 동료 라이벌의 관계정도라고 볼 수 있다. 'TSV 1860 뮌헨' 이 재정난에 겪을때마다 바이에른 뮌헨이 응원해주는 등 숙적의 라이벌의 관계라고 보기는 어렵다.


뉘른베르크와의 더비는 바바리아 더비라고 불리는데, 1920년부터 두 팀은 최고의 라이벌이였다. 당시 최고의 팀은 바이에른 뮌헨이 아닌 뉘른베르크였고, 실제로도 최다 우승팀이 바로 뉘른베르크였다. 1960년이 되어서야 바이에른 뮌헨이 뉘른베르크의 우승 기록을 깨는데 성공하며, 최고의 팀으로 자리잡았지만 두 팀의 경기는 여전히 흥미롭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역시 'FC 샬케' 와 최고 라이벌로 꼽히며, 두 팀의 대결은 레비어 더비라고 불리며 여전히 세계 10대 더비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두 팀은 같은 지역 라이벌인데, 바이에른 뮌헨과 TSV 1860 뮌헨과는 달리 매우 치열한 양상을 띄고 있다. 두 팀의 경기마다 경찰들이 총 비상상태에 빠질정도로 관객들이 흥분해있고 열광해있으며, 격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더비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로는 FC 샬케가 3개월간 리그 1위를 달리며 우승을 점치고 있을때, 도르트문트와의 더비에서 패배하며 샬케를 조롱하기 위한 셔츠를 만들었고, 2008년에는 샬케의 리그 50년 무관을 축하하는 파티까지 벌일 정도로 두 팀의 라이벌 구도는 치열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바이에른 뮌헨과 도르트문트가 이제는 세상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최고의 더비인 데어 클라시커로 성장할 수 있게 된것일까. 이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1990년대를 기점으로 리그 우승후보가 될 정도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바이에른 뮌헨은 1960년대부터 황금기가 시작되었고, 리그에서의 독주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되자 다른 리그 우승후보와의 라이벌 관계가 계속 생성되었다. 좋은 예로 뮌헨글라트바흐, 함부르크, 레버쿠젠 등을 들 수 있는데 도르트문트도 이런 리그 우승경쟁에서 라이벌 관계가 생기게 되었다.



데어 클라시커(Der Klassicker)의 역사

데어 클라시커의 시작은 도르트문트의 황금기가 펼쳐지며 시작된다. 현 스위스 대표팀이기도 한 오트마어 히츠펠트 아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까지 올라가며, 막대한 상금을 획득한 도르트문트는 마티어스 잠머 등 뛰어난 선수진들을 영입하며 1994-1995, 1995-1996 분데스리가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바이에른 뮌헨의 우승을 막아내고 새로운 강호로 떠올랐다. 이후 열린 DFB슈퍼컵에서도 도르트문트가 1996년, 1997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독일에서 도르트문트를 막을만한 강자는 없어보였다.


게다가 1996-1997 년도에는 리그 우승을 뮌헨에게 내주면서, 당시 바이에른 주장인 마테우스에게 우는 아이 제스처까지 당하는등 조롱을 받았으나,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컵을 쥐며 전세가 뒤집혔고, 도르트문트는 세계적인 클럽으로 올랐다. 심지어 다음년도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서 바이에른 뮌헨이 도르트문트에게 패배하며 리그와 챔피언스 리그 전부 놓치게 되자 두 팀의 라이벌 의식은 엄청나게 타올랐다. 


두 팀의 경기는 매우 격해지기 시작했다. 1999년에는 올리버 칸이 상대 공격수인 샤퓌자에게 쿵푸킥을 날리고, 뮐러의 귀를 꼬집었으며, 헤어리히의 목을 깨무는 등 비신사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 이 경기는 양팀 다 한명의 퇴장 선수가 나오면서 2:2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다. 2001년도에는 10장의 옐로우카드, 2장의 퇴장, 1번의 옐로우카드 누적 퇴장으로 13장의 카드가 나오며 역대 분데스리가 사상 최악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중 10장의 카드가 뮌헨이 받은 카드였으니, 당시 바이에른 뮌헨이 얼마나 라이벌 의식을 느끼며 거칠게 경기를 했을지 알만하다.


하지만 2002년 도르트문트가 리그 우승을 하고 난뒤로 도르트문트는 형편없는 재정관리로 파산을 맞이했다. 이후 계속된 재정파탄으로 선수들의 임금을 20% 이상 깍는등의 일도 일어났고, 두 팀의 라이벌 관계는 이대로 끝으로 보였다. 하지만 바이에른 뮌헨은 이런 도르트문트에게 돈을 빌려주기도 하며, 도르트문트를 돕는등의 행동을 보였다. 사실 독일리그가 훌륭한 이유는 구단이 재정적인 위기에 직면했을때, 다른 구단이 그 구단을 도움으로서 상부상조 한다는것이 멋진것이 아닐까. 뮌헨이 하부리그 팀들의 재정을 위해 하부리그와 친선경기를 하는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어찌되었건 도르트문트는 재정파탄의 위기속에서 위르겐 클롭이란 명장을 선임한다. 당시 도르트문트는 강등위기까지 겪으며, 팀 전체가 휘청거리는 때였는데, 이 위르겐 클롭이 부임한 이후 뛰어난 수완과 놀라운 전술구사로 도르트문트를 상위권 팀에 올려놓았다. 더불어 부임한 때에 DFB 슈퍼컵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꺽으며 데어 클라시커를 새로운 국면으로 빠져들게 했다.


이후 도르트문트는 승승장구하며 2010-2011 시즌에 9년만에 리그 우승을 하였고, 그 다음해인 2011-2012 시즌에도 우승을 함과 동시에 DFB 포칼 결승전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5-2로 이기며 구단 역사상 첫 더블을 달성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되며 데어 클라시커는 다시 흥행하기 시작했고, 다시 사람들은 데어 클라시커를 찾기 시작했다.


심지어 2012-2013 시즌에서도 도르트문트는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좋은 경기력을 보여왔고, 두 팀이 놀랍게도 UEFA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전에서 엘 클라시코의 주인공들인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를 꺽으며 만나며 전세계적으로 그 이름을 떨쳤다. 당시 분위기만 해도 결승전은 엘 클라시코가 될것이라며 이야기했기에 이는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여기에 도르트문트의 신성, 마리오 괴체가 결승 직전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까지 선언하며 두 팀에 대한 관심사가 폭발했다.


그리고 챔피언스 리그에서 바이에른 뮌헨이 도르트문트를 이김으로서, 바이에른 뮌헨은 데어 클라시커에서 오랜만에 승리를 맛봄과 동시에, 구단 역사상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하며 도르트문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 바이에른 뮌헨과 도르트문트 경기에서 다시 한번 바이에른 뮌헨이 승리함으로서 클롭은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데어 클라시커(Der Klassicker)글을 마치며

최근 데어 클라시커에 대해 관심이 생긴 사람들이 있을것이다. 데어 클라시커는 생긴지 얼마 안되기도 했고, 역사가 중간에 끊길뻔도 했지만 이제는 세계적인 더비로 급부상하고 있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바이에른 뮌헨의 선수진들과 팬들도 이제 이 더비에 대해서 더더욱 관심을 가지고, 심지어 이사진들도 라이벌의식을 느끼며 발언하고 있다.


글을 마치며 여러분들이 이 데어 클라시커를 즐기는데 가장 큰 요소 하나를 이야기해드리고자 한다.


마리오 괴체(바이에른 뮌헨)


바로 이 남자다. 2012-2013 년도까지 도르트문트에서 뛰어왔지만, 바이에른 뮌헨과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앞두고 뜬금포로 이적을 하며 도르트문트 팬들에게 신임을 잃고, 이미 역적으로 몰리고 있는 마리오 괴체는 데어 클라시커를 더욱 즐길 수 있는 요소다. 그리고 실제로도 오늘 마리오 괴체는 그것을 증명했다. 도르트문트를 함락시키는 선제골을 넣으며 바이에른의 승리를 이끌었다. 괴체의 골 이후 도르트문트 팬들은 요동쳤고, 선수진들은 평정을 잃었고 결국 80분대에 2골이나 허용하며 3-0으로 패배했다. 이 괴체를 중심으로 데어 클라시커를 즐긴다면 좋을것이다. 


아참, 그리고 한명 굳이 더 소개하자면.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도르트문트 돌풍의 주역이자, 이미 핵심선수로 자리잡은 레반도프스키는 현재 도르트문트와의 재계약을 거절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유력한 행선지는 바로 바이에른 뮌헨이다. 과연 이 남자는 어떠한 선택을 하며, 데어 클라시커를 다시 불태우게 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기성용, 

논란의 중심속에서 실력으로 답한 사나이.

2013.11.23


한국에서 뛰어난 미드필더들은 많았지만, 현재 2014년 FIFA 브라질 월드컵에 참가할 선수들중 가장 뛰어난 미드필더를 고르라면 대부분은 한명의 이름을 말한다. 최근 많은 논란을 가지고 왔지만, 실력만으로 모든것을 답한 남자, 바로 기성용이다. 기성용이 한국 국가대표중 최고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 미드필더중 최고라는데에는 이견이 없을것이다. 한국 국가대표 팀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기성용은, 한국은 물론 클럽 내에서도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 기성용 선수는 그동안 아주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때문에 지난 브라질, 오늘 말리전에서 팬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 것 같아 기쁘게 생각한다. 이런 모습을 계속 보여준다면 언젠가는 팬들도 기성용 선수에 대한 마음을 열지 않을까 기대한다. "


현 국가대표 감독 홍명보의 말에는 최근 기성용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들어있다. 올해 드러난 전 국가대표 감독 최강희와의 불화로 SNS 에 불미스러운 글을 올려 언론과 팬들에게 비난에 휩싸였다. 기성용은 차기 대표팀 감독인 홍명보 감독의 단호한 태도에, 언론에서 공개적으로 최강희 감독에게 사죄했고 이후 국가대표 경기에서 훌륭한 경기력으로 논란을 잠재웠다. 



기성용

1989년 1월 24일

187cm, 79kg


FC 서울(2006-2009)

셀틱(2009-2012)

스완시 시티(2012-현재)

└선더랜드 AFC(2013-현재)


 년도

구단 

출장 

득점 

도움 

2006 

FC 서울 

2007 

FC 서울 

25 

2008 

FC 서울 

28 

2009 

FC 서울 

39 

10 

2009-2010 

셀틱 FC 

10 

2010-2011 

셀틱 FC 

34 

2011-2012 

셀틱 FC 

33 

2012-2013 

스완시 시티 

38 

2013-2014 

선더랜드 AFC 

총계

 

214 

22 

30 


기성용의 프로필 내역이다. 이청용과 함께 쌍용으로 FC 서울에서 활약한 기성용 역시 귀네슈의 유산으로 알려져있다. 이청용처럼 어느 팀을 가든, 대부분 핵심 선수로 뛰어왔으며 이는 귀네슈가 " 이청용과 기성용은 세계적으로 통할 선수 " 라고 했던 이야기가 들어맞는 증거이기도 하다. 게다가 여태까지 장기 부상을 당한적이 없기에 기량이 주춤한 때도 없어 계속 본인의 실력을 잘 입증하고 있다.


기성용은 제라드를 존경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스타일은 알론소의 보급형이라고 불리며 또한 그 기량이 출중하다. 신체조건이 우수하고 넓게 보는 시야와, 좋은 골 키핑능력을 가지고 있고 한국내에서도 탑으로 꼽히는 킥력 역시 장점이다. 패스의 완급조절 역시 뛰어나며 창의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고, 패스의 정확도는 EPL 내에서도 최상위권에 꼽힌다. 더불어 템포 조절 능력이 뛰어나 소속팀은 물론, 국가대표에서도 꼭 필요한 인재라고 말할 수 있다.



" 기성용은 레온 브리튼처럼 홀딩 역할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조나단 데 구즈만과 같이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선수다. 기성용의 존재로 우린 로테이션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 - 미카엘 라우드럽 감독


FC 서울, 셀틱 FC, 그리고 스완시 시티까지 실력으로 답했던 남자.


기성용은 어렸을때부터 오스트레일리아로 축구유학을 5년 다녀오고나서, 2006년 서울 FC에 입단하게 되었다. 이미 2005년때부터 대한민국 U-17 대표팀에서 뛰어오면서 재능을 맘껏 뽐낸 기성용은, 2006년 U-20에 선발되면서 이미 본인의 나이보다 한단계 위의 국대에서 대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귀네슈는 2007년에 본격적으로 기성용을 주전으로 기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안타깝게도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지는 못했다.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기성용의 시대가 열렸다. 데뷔골은 물론 어시스트도 기록하며 팀의 주전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굳히는데 성공했다. 이청용과 함께 K리그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하는데 성공한 기성용은 그 재능과 잠재력을 인정받아 시즌 BEST 11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어, BEST 11 에 선정되었으며 최연소 BEST 11 기록도 갱신하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스코틀랜드에서 기성용을 영입하려는 자세를 보였고, 이청용을 보낸 FC 서울은 이번 시즌 종료후 기성용을 셀틱 FC 로 이적시키기로 계약을 했다. 기성용은 2009년 FC 서울에서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도 경험하고, 처음으로 두자리수 도움을 세우는 등 대활약을 하며 서울에 핵심적인 선수로 활약했다.


당시 기성용은 이청용과 함께 멘탈리티적으로 지적을 받았다. 가장 큰 사건으로는 미니홈피에 "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지.. " 라는 글을 게시해 팬들의 비난에 응수하였던 사건인데, 당시 기성용은 수많은 욕을 먹으며 비난을 받았다. 또한 2008년 수원삼성 블루윙즈와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고, 당시 골키퍼인 이운재에게 캥거루 세레모니[각주:1]를 한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기성용은 이런 상황에서도 본인의 멘탈리티를 크게 개선하지 못해, 나중에 큰 사건을 만들게 된다.


기성용은 셀틱 FC로 이적한 뒤 주전으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하지 못하며, 유럽진출이 실패로 남을것만 같았다. 당시 언론이나 팬들도 셀틱 FC 이적은 성급했다며 기성용의 행동을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성용은 차근차근 본인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고, 주전으로 기용받으며 34경기에 출전해 6골 6도움으로 두자릿수 공격포인트를 달성하며 본인의 실력으로 자신에 대한 비난을 잠재우는데 성공했다. 더불어, 스코틀랜드 컵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2011년 스코틀랜드 컵을 드는데 성공한다.


2011-2012년에도 33경기에 출전해 7골 7도움으로 두번 연속 공격포인트 기록에 성공하며, 셀틱의 리그우승을 성공시켰고, 2012년에 병역 혜택까지 주어지자 빅리그 클럽들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그 결과 2012년, 구단 사상 최고 이적액인 600만 파운드(108억원) 에 스완시 시티로 이적했다. 이 금액은 당시 한국인 이적액으로도 최고의 수치였다.


역시나 당시 언론과 팬들은 스완시 시티로 이적한것이 실수라며, 기성용의 EPL 진출은 실패가 될것이라 이야기했지만 기성용은 오히려 EPL 첫시즌에 완벽하게 적응하며 리그 29경기를 포함한 총 38경기에 출전해 스완시 시티의 핵심 주전으로 뛰는 놀라운 쾌거를 보여주었다. 셀틱당시에 보여주었던 중거리 슈팅과 골 결정력은 떨어졌지만 패스의 정확도와 템포 조절등 다른 부분으로서의 기량이 더욱 발전하였다. 2012-2013 기성용은 유럽에서 패스 성공률이 최상위권이였으며, 킬 패스도 상위권이였던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2013-2014년도 시작시즌에 기성용은 스완시에 새로 이적한 존조 셸비에게 밀려 주전자리를 잃었고, 이에 대해 2014년 FIFA 브라질 월드컵을 생각한 기성용은 이적을 모색했고, 결과적으로 지동원이 있는 선더랜드 AFC 로 임대를 하게 되었다. 선더랜드는 최하위권으로 단 한번의 승리로 거두지 못했던 팀이였고, 감독이 경질되는 등 여러 사건이 있었으나 결국 새 감독에게도 중용받고, 핵심 주전으로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



" 선수는 운동장에서 이야기해야한다. SNS에 글을 올린다고해서 잠깐 화를 푸는것 말고 무슨 이득이 있나. 선수들이 어리석은 행동은 자제해야한다. 공인으로서 자기 컨트롤이 안되는 거 아닌가. 후배들이 좋은 선수가 되기보단 훌륭한 선수가 되었으면 한다 " - 황선홍 감독


국가대표 논란의 중심, 기성용.


기성용의 국가대표 인생은 사실 논란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기성용의 재능은 인정하지만 멘탈리티적인 부분에서 분명 개선해야할 여지가 있는 선수다. 기성용의 플레이가 거칠고 터프하기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것이 아니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 감독인 알렉스 퍼거슨이 " SNS는 인생의 낭비. " 라고 말한게 기성용을 위한 말이 아닌가 싶을정도로, 기성용은 SNS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기성용은 2008년, 19살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데뷔했다. 하지만 데뷔하기 전인 2008년 U-23 대회인 2008년 하계올림픽 국가대표로서 출전했는데, 당시 기성용의 실력이 부진하자 기성용의 미니홈피에는 악성댓글이 올라왔다. 하지만 이에 기성용은 "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지. " 라는 말로 응수해 큰 논란을 빚었다. 이는 모 학교의 도덕윤리 시험에도 출제되어 표현의 자유 남용이란 부분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래도 기성용은 이런 논란속에서 실력으로 모든것을 침묵시켰다. 2010년 FIFA 남아공월드컵 예선에서 2골을 넣으며 본인의 기량을 과시하였고, 본선에서도 한국 최연소선수로서 모든 경기에 참가하며 본인의 이름을 전세계에 떨쳤다. 이 남아공월드컵의 활약으로 소속팀인 셀틱에서도 재주목받아, 주전으로 도약하였고 향후 한국을 이끌어갈 최고의 인재로 뽑혔다. 


하지만 이런 실력은 자만심을 낳았던것일까. 같은 소속팀인 셀틱에서의 동료이자, 자신의 국가대표 선배인 차두리에게 말도 안되는 글을 올렸다. 당시 차두리의 집에서 식사를 한 기성용은, 트위터에 " 스파게티, 파스타, 라자냐... 이런거는 먹어도 정이 안간다.. " 라는 글을 올렸다. 당시 차두리의 부인은 임신한 상태인데도, 기성용의 밥을 위해 요리를 한 상황이였고 무엇보다 자신을 챙겨주는 대표팀의 선배가 본인의 트위터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글을 올린다는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다. 차두리는 이런 기성용의 태도에 고개를 숙이며 사과의 글을 유머스럽게 남겨 넘겼지만, 기분이 좋을리 만무하다.


또한 2011년 AFC 아시안컵에서 준결승전 상대인 일본을 상대로 패널티 킥을 성공한 기성용은 원숭이 세레머니를 해 논란을 빚었다. 당시 일본은 욱일승천기를 경기장에 가져오는 등 몰상식한 행동을 보여왔고, 그것에 화가 난 기성용이 세레머니로 응수한것이였다. 하지만 국가대표 경기에서 그러한 행동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였고, 당시 주장이였던 박지성은 기성용에게 자제를 촉구했다.[각주:2]


하지만 이러한 논란속에서도 기성용은 실력을 보여주었다. 2012년 하계 올림픽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풀타임 기용되면서 팀의 공수조율과 템포조절을 책임졌다. 그 결과 하계 올림픽에서 3등이란 성적을 거두며, 동메달을 수여받아 병역 특례가 되었다. 이는 기성용이 스완시로 이적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다. 더불어 기성용은 골닷컴 선정 올림픽 BEST 11에 팀 동료 윤석영과 함께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기성용은 반성할 맘이 없었나보다. 조광래 전 국가대표 감독이 경질당하고 축구협회는 하기 싫다는 최강희 전북 현대 감독을 국가대표 자리에 강제로 앉혀놓았다. 그리고 기성용과 최강희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기 시작했다. 최강희 감독은 해외파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해외파들의 기량과 실력은 인정하나, 본인들끼리만 어울리며 해외파와 국내파의 파벌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최강희는 강력하게 응수했다.


최강희는 기성용을 길들이기 위해, 언론에 공개적으로 " 셀틱 빼면 내셔널 리그지. " 라는 발언으로 기성용에게 분발을 촉구했다. 기성용에게 현재의 자리에 만족하지 말고, 더욱 더 성장하라는 충고의 의미로 던진 이 말은 너무나도 어렵게 들렸나보다. 들린 그대로 이해한 기성용은 본인의 페이스북 비밀계정에 " 고맙다. 내셔널 리그같은곳에서 뛰는데 대표팀 뽑아줘서. " 라는 글을 올리며 최강희 감독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기성용은 감독의 지시를 무시하고 혼자서 드리들 돌파를 감행해 플레이하는등 팀워크를 해치는 행동을 하였고, 본인의 트위터 계정에 " 리더는 묵직해야한다. 그리고 안아줄 수 있어야한다. 모든사람(해외파)를 적으로 만드는건 리더에 자격이 없다. " 라는 글을 올리며 그를 비난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논란이 일자, 교회 목사님의 이야기라고 해명하였으나 이후 최강희 감독과의 불화가 드러나며 최강희 감독을 저격한것이 맞다고 보고있다.


하지만 기성용의 실력은 출중했다. 저런 논란과 관계없이 국가대표에서 일관된 좋은 경기력으로 상대팀을 압도했다. 2014년 FIFA 브라질월드컵 예선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기성용은 언론과 팬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자 기성용은 본인의 페이스북 비밀계정으로 " 모든사람이 느꼈을거다. 해외파의 필요성을. 우리를 건들지 말았어야했고 다음부턴 그 오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길바란다. 그러다 다친다. " 라는 글을 올리며 최강희 감독을 비꼬았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던가. 결국 기성용의 SNS를 통한 만행은 김현회 기자의 페이스북 계정 고발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기성용의 이러한 태도에 국민들은 분노했고 기성용이 국가대표로서의 자격이 없다며 그를 선발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기성용의 실력이 출중해 대한민국에서는 없어설 인재라고 이야기하며 대립된 입장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성용에 대한 여론과 팬심은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기성용은 국가대표로서의 최고의 위기를 맞는다.[각주:3]


이후 최강희 감독의 부임기간이 끝나고, 홍명보가 대한민국의 사령탑을 맡게 되자 홍명보는 기성용의 일을 처리해야했다. 당시 국가대표로서 가장 먼저 붙잡아야할 과제였기 때문이다. 과거 홍명보는 박주영의 병역 특례 논란을 본인이 책임지겠다며 안고 간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홍명보의 리더십은 기성용에게도 손을 펼쳤다. 홍명보는 런던으로 건너가 기성용에게 최강희 감독을 찾아가 사과를 하라고 이야기했다. 사과하지 않으면 국가대표로서 출전하지 못할것이라고 못박으며 사과를 통해 국민들에게 진심을 보여주길 바랬던것이다.


하지만 최강희 감독은 사과를 받기를 원치 않았고, 홍명보 감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가 사과하는게 도리라고 이야기했다. 결국 두 감독은 합의 하에 언론에서 공식사과를 하는 선에서 끝내기로 했고, 기성용은 언론에서 공식 사과를 하면서, 자신의 과오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를 내었다. 이후 홍명보 감독은 약속대로 기성용을 국가대표에 차출시켰고, 기성용은 국가대표에서 본인의 실력으로 모든것을 답하기 시작했다.


홍명보호가 출범된 이래 기성용은 SNS 논란을 사과한 뒤, 홍명보호에 전부 승선했고 모든 경기를 주전으로 뛰었다. 사실상 홍명보호에서 기성용은 이미 핵심 주전으로 한 자리를 차지한 상황이고, 기성용의 파트너 자리만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성용은 이미 2010년 FIFA 남아공 월드컵 본선에서 모든 경기에 주전으로 뛴 경험이 있기에 현재 대표팀에서 소중한 자원이 될것으로 보이고있다.


하지만 본인의 멘탈리티를 성숙시키고 퍼거슨의 명언인 "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 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며 박지성처럼 국가대표로서 투철히 뛰어야만 한다. 박지성이 위대한 선수인 이유는 박지성의 멘탈리티도 한몫을 한다. 박지성의 발언을 생각해보라.


" 나는 한국축구 속에서 자란 사람이기 때문에, 대표팀에 돌아오면 기분도 감각도 '맨유의 박지성'이 아니라 '한국대표 박지성' 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맨유에서는 이렇게 하는데' 라거나 '맨유 선수니까' 라고 생각하는것은 자만심일 뿐이고, 이기주의자의 사고방식일 뿐 이다. 한국대표팀에 돌아오면 대표팀의 일원으로서 팀 전체와 동화되어 기쁨도 슬픔도 공유하고 싶다. 맨유에서의 경험을 한국대표팀 모두에게 환원해주고 싶을 뿐이다. "


기성용도 마음속에 이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길 바란다.



" 그의 플레이는 감탄할 만하다. 기성용은 특히 원터치 패스나 방향 전환에 능하다. 드리블, 슈팅에 수비 능력까지 겸비한 선수로, 우리팀에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 - 거스 포옛 감독


정신적으로 성장해야할 기성용, 앞으로의 거취는?


기성용의 앞으로의 방향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미 세계 최고 리그중 하나로 뽑히는 EPL 에서 본인의 가치를 계속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2-2013 시즌 스완시 시티에서 팀의 공수연결고리로서 '패스마스터'란 별명을 얻으며 절대적인 활약을 펼쳤다. 존조 셸비를 영입하고 기성용을 선더랜드에 임대시킨 스완시는 지난 시즌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언론과 스완시 팬들은 Ki(기성용을 부르는 말)의 임대는 성급한 결정이였고, 그를 보낸것은 실수였다며 이야기하고 있다.


반대로 선더랜드쪽에서는 팬들과 감독, 그리고 언론까지도 Ki의 임대는 훌륭한 선택이였다고 이야기하며 어떠한 영입보다도 가장 훌륭하다고 이야기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거스 포옛 감독에게도 맨시티 전에서 미친 활약을 보여주며 확고한 신뢰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기성용이 이번 시즌 계속 이러한 활약을 보여준다면, 스완시는 기성용의 임대가 끝나고나서도 재계약과 동시에 주전으로서 확고히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


월드컵에서의 활약도 기대된다. 기성용은 한국 국가대표팀에서 좋은 실력을 보여왔고, 지난 2010년 FIFA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한국 대표팀 최연소 나이로 모든 경기에 출전해 활약했다. 기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성숙한 기성용은 이번 월드컵에서 더욱 더 뛰어난 기량을 보여줄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대표팀에서의 활약으로 기성용은 더 큰 클럽에게 제의를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이제 기성용은 경솔한 행동을 자제해야한다. SNS 는 기록이 남는곳이다. 언젠간 누군가에게 밝혀진다. 진짜 일기는 본인의 일기장에만 써야한다. 언젠가 밝혀질지도 모르는 SNS가 아니라. 그리고 해외파와 국내파의 파벌을 주도하지 않고 한국 대표팀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뭉쳐 활약한다면 기성용을 아니꼽게 보는 시선도 사라질것이라 단언한다.



  1. 에마뉘엘 아데바요르가 독일 월드컵에서 하였던 세레머니로, 이운재를 비난하려는 비신사적인 행동이였다. [본문으로]
  2. 기성용은 예전부터 박지성의 축구실력은 존중하나, 박지성처럼 살고싶지 않다. 그렇게는 못살겠다 라고 발언한적이 있다. [본문으로]
  3. 비슷한 부분으로 과거 유병수는 국가대표 시절 교체에 대한 불만을 미니홈피에 올리게 되었고, 이후 국가대표에 선발되지 못했다. [본문으로]

상암동 미친개에서 한국의 에이스로. 

이청용에 대해 말하다.

2013.11.22


현재 국가대표에서 최고의 재능을 가진 선수를 말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누굴 뽑을까. 유럽에서 핫한 최고의 유망주 스트라이커 손흥민? 스완시에서 선더랜드로 임대당했지만 그 기량은 여전한 기성용? 답을 말하라고 하면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바로 이청용을 떠올릴것이다. 정대세가 인정한 대한민국 박지성의 후계자인 이청용은 이제 한국 대표팀에서 없어서는 안될 인재가 되었다.


" 예전 한국 대표팀 감독들은 박지성과 이영표를 BEST 11에 일단 써놓고, 그쪽에 대해 고민을 안하지 않았느냐. 지금 이청용이 딱 그렇다. 이런 선수 4-5 명만 있으면 걱정이 없다. "


전 한국 국가대표 감독 최강희 감독의 말이다. 한국 최대의 재능이라 불리는 박지성과 이영표. 그들의 국가대표 영향력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제는 이청용이 그러한 영향력을 보이고 있는것이다. 다른 선수들도 이청용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있고, 이미 해외에서는 한국 대표팀에서 이청용의 재능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청용에 대해서 차근 차근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지는건 어떨까.



이청용

1988년 7월 2일

180cm, 69Kg


FC 서울(2004-2009)

볼튼 원더러스(2009-현재)


 년도

구단 

출장 

득점 

도움 

 2004

FC 서울

  2005 

FC 서울

 2006

FC 서울

 2007

 FC 서울 

25 

 2008

FC 서울

26 

10 

 2009

 FC 서울 

23 

 2009-2010

볼턴 원더러스 

40 

 2010-2011

볼턴 원더러스 

36 

 2011-2012

볼턴 원더러스 

 2012-2013

볼턴 원더러스 

44 

 2013-2014

볼턴 원더러스 

15 

 총계

 

215 

25 

49 


이청용의 프로필이다. 아시아 어디에 내놓아도 크게 부끄럽지 않을 이청용은 FC 서울에서 귀네슈의 유산중 한명으로 유명하다.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도약한 2007년 이후, 모든 시즌을 핵심 선수로 거의 모든 경기에 출장했다. 1부리그인 볼턴 원더러스에서도 2시즌간 주전으로 활약했으나, 2011-2012 시즌 부상으로 한 시즌을 전부 못뛰다 마지막 2경기를 교체정도로 출장하게 되었고, 팀은 강등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 챔피언쉽에서도 주전으로 뛰고 있으며, 이번 시즌 역시 마찬가지다.


이청용의 장점은 창의적인 플레이와 이타성을 꼽을 수 있다. 이청용은 기본적으로 스피드가 빠르고, 볼 간수 능력이 뛰어난데다 드리블 돌파는 물론, 2:1 패스를 통한 침투까지 윙어로서의 재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게다가 정확한 크로스 혹은 창의적인 패스로 팀의 공격루트를 다양화시키는 플레이메이커 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본인이 해결 지을 수 있다고 판단되는 위치에서도 패스를 시도하며 팀의 공격을 도와주는 이타성 역시 커다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 이청용은 볼을 다루는 감각이 타고났다. 물론 골은 넣어주면 좀 더 좋겠다. 하지만 영리하기 때문에 어느 상황에서도 잘 적응해 나갈 것이다. 그를 발전시키는것이 내 임무다. " - 오웬 코일 감독


상암동 미친개에서 EPL 최연소 리거로...


이청용은 어렸을때부터 이미 뛰어난 축구재능으로 유명했었다. 그 재능을 알아본 조광래 감독은 이청용에게 중학교 중퇴를 하면, 서울에 입단시켜주겠다는 조건을 내세워 2004년 이청용을 영입한다. 이청용은 서울에 입단하자마자 2군에서 뛰며, 그 실력을 키우면서 본인의 재능을 꽃피웠다. 그리고 2006년, 18세의 어린 나이에 서울 1군으로 데뷔하는데 성공한 이청용은 그 시즌 4경기를 뛰게 된다. 물론 안타깝게도 이창수 감독은 수비적인 윙백으로 사용해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2007년, 셰놀 귀네슈가 FC 서울의 감독이 된 이후 그는 팀의 핵심선수로 중용받아 25경기에 출전해 3골 6도움으로 3경기당 1개의 공격포인트를 세우는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기 시작하며 FC 서울의 인기선수가 되는데 성공한다. 특히나 6도움중 5도움을 K리그 컵에서 세우며, K리그 리그컵 도움왕에 선정되는데 성공했다.


귀네슈 아래서 기성용, 고명진, 고요한, 이청용, 박주영은 FC 서울에서 대활약을 펼쳤고, 2008년 26경기에 출전해 6골 10도움으로 두 자릿수 어시스트에 이어, 1경기당 0.6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는 놀라운 재능을 선보이며 K리그 베스트 11에 고작 19살의 나이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었고, 그 결과 외국 언론에서도 아시아 최고의 유망주라며 극찬하기도 했다.


2009년에도 여전히 그 기량을 발휘하며 23경기 3골 7도움으로 2경기당 1개의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는 등 그 재능을 꽃피우며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도 경험하는 등 최고의 시기를 보냈고, 그 재능을 눈여겨본 볼턴 원더러스는 당시 해외 이적료로는 최고액수인 44억원으로 이청용을 영입하는데 성공한다. 당시 이청용은 고작 21살이였고 한국 EPL 최연소 리거였으며, 한국 제 7호 프리이머리거가 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런 놀라운 재능과 달리 이청용은 멘탈리티가 성숙하지 않은것으로 유명했다. 세간의 주목을 받은 사건으로는 베컴에게 고의적인 백태클을 한것이 있지만, 그 외에도 매 경기마다 고의적으로 거친 플레이를 하고 욕설도 서슴치 않게 하기도 했다. 김태영에게 날아차기를 하기도 했고, 한 시즌에 퇴장을 2번 당하기도 했으며 이청용에 의해 부상당한 선수도 상당히 많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그에게 상암동 미친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가지게 했다.


어찌되었건 2009년에 볼턴 원더러스로 이적에 성공한 이청용은 첫시즌 40경기 5골 8도움으로, 21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보인다. 역대 한국인은 물론 아시아인을 통틀어서도 어린나이에 이런 재능을 보인 선수는 없을 정도였기에, 세간의 주목을 받은 이청용은 볼턴 원더러스에서 볼턴 원더러스 구단 선정 올해의 TOP 3 상, 올해의 이적선수상, 올해의 선수상 3관왕을 성공했으며 볼턴 원더러스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단에도 선정되어 볼턴 원더러스 팬과 선수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각주:1].


그 다음 시즌에서도 이청용은 36경기 4골 8도움으로 준수한 기록을 펼쳤고, 지난 시즌에도 물론 순도높은 골을 기록했지만 특히나 2010-2011 시즌에 볼튼 리그 통산 500호 골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고, FA컵 8강전 버밍엄과의 경기에서 89분 마지막 결승골을 넣어 볼튼을 FA 4강으로 견인하는 등 절대적인 활약을 펼쳐 볼튼의 핵심 선수임을 본인이 입증하였다. 그 결과 이 시즌에서도 구단 선정 올해의 TOP 3 상을 받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런 이청용에게 악몽같은 일이 일어난것이 바로 2011-2012 시즌이다. 친선경기에서 뉴포트 카운티의 톰 밀러의 비신사적인 태클로 인해 무릎 골절을 당했고, 수술은 성공했으나 최소 9개월의 재활기간이 필요한것으로 알려졌다. 그 결과 시즌 아웃을 통보받았고, 볼턴 원더러스는 핵심 선수인 이청용의 부재로 강등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청용의 의지와 노력으로 37R, 38R 로 마지막 2경기에 교체출전으로 총합 90분 정도의 경기를 뛰었으나 팀의 강등을 막진 못했고, 결과적으로 이청용의 부상이 볼턴 원더러스를 강등으로 처하게 했다.


결국 챔피언쉽에서 시즌을 시작하게 된 이청용은, 흔들리는 팀내에서도 부동의 주전으로 황약했다. 44경기 4골 7도움을 기록하며 그 기량이 녹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데 성공한 이청용은 팀을 승격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볼턴 원더러스의 전반기 성적이 좋지 않았고, 후반기 놀라운 기록에도 불구하고 승격 플레이오프에 올라가지 못해 승격을 다음시즌으로 미뤄야했다. 


이청용은 2013-2014 프리시즌에 에버턴 등과의 EPL 팀에서의 링크가 있었으나 결국 연결되지 못했고, 이번 시즌에도 챔피언쉽에서 15경기 0골 2도움을 기록하며 열심히 뛰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볼턴 원더러스는 15전 3승 7무 5패로 승점 16점을 기록하며 17위에 머물러있어 승격은 힘들어보인다.



" 이청용은 매우 뛰어난 선수다. 그는 팀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자신보다 팀을 먼저 생각한다. 그는 다재다능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며 활동량도 뛰어나다. 감독으로서 이청용은 정말 함께하고 싶은 선수다. " - 더기 프리드먼 감독


한국 국가대표팀의 막내에서 노련미를 갖춘 최고의 에이스가 되다.


이청용은 이미 어린 나이때부터 U-17, U-20, U-23 등 각급 국가대표 팀을 뛰어오며 엘리트 코스를 거친 국가대표였다. 특히나 2007년 FIFA U-20 월드컵에서 공수 양면을 오고가는 특급 플레이를 펼치며 유럽 각지에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이청용의 기량을 인정한 허정무는 이청용을 2008년도에 2010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부터 기용하기 시작했다. 20살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데뷔한 이청용은 국가대표 최연소 데뷔 랭킹 20위에 속해있기도 하다.


이청용은 월드컵 예선에서도 10경기 5도움으로, 어린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놀라운 기록을 보여주며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10년 FIFA 월드컵에 주전으로 참여했고,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를 상대로 골을 기록해 월드컵 2골을 기록하며 본인의 득점력도 과시했다. 


* 우루과이전 골 이후 이청용은 매번 A매치에서 득점에 실패하다, 2013년 11월 15일, 스위스전과의 경기에서 역전골을 득점하며 3년 5개월만에 A매치 골을 성공시켰다.


이후에도 이청용의 대표팀 입지는 더욱 굳혀졌다. 조광래는 이청용을 절대적으로 신임했고, 심지어 무릎 골절 부상인 상태에서도 그를 차출시켜, 그가 부상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대표팀에게 자리를 주겠다는 절대적인 신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런 조광래의 무조건적인 신임은 이청용의 혹사를 불러왔다. 매번 상당한 거리를 이동해야했고 리그에서도 주전으로 뛰어야했으며, 부상에 시달릴때도 비행기를 타면서 조광래에 대한 비난이 있기도 했다.


조광래 감독이 경질되고, 이후 들어온 최강희호에서도 여전히 이청용에 대한 신뢰가 대단했다. 최강희는 이청용을 두고 " 감독이 낚시나 가고 그래도 알아서 잘할 선수 " 라면서 그의 재능을 극찬했다. 최강희 호 역시 이청용은 오른쪽 윙어로 붙박이 주전을 차지하며 뛰었고, 대한민국을 2014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는데 큰 공헌을 했다.


최강희 감독이 대한민국을 본선에 진출시키고 사임한 뒤, 대표팀 감독으로는 홍명보 감독과 김태영 수석코치가 들어왔다. 둘다 수비수 출신에 2002년 월드컵 주역으로 유명한데, 홍명보 역시 이청용을 신임했다. 5기까지 펼쳐졌던 홍명보호인데, 동아시아컵기간에 해외파가 출진하지 못했던것을 제외한, 4번 전부 출전하며 홍명보 감독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고 심지어 스위스, 러시아 전에서는 주잔 완장까지 차며 뛰기 시작했다.


현재 홍명보호의 장점은 어린 선수들의 투혼과 열정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린 나이대의 선수들이 많은 홍명보호에서 이청용은 그들을 이끌어나갈 노련미를 갖춘 몇 안되는 선수라고 볼 수 있다. 현재 홍명보호에서 2010년 FIFA 남아공 월드컵 본선을 경험한 선수는 정성룡, 기성용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험은 현재 대표팀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부분이다. 


월드컵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월드컵에서 제 활약을 하지 못하는건 아니다. 하지만 월드컵을 경험해본 자들이, 그렇지 않은 선수들에게 주는 조언은 그들에게 있어서 큰 도움이 될것이고, 큰 무대에 서는 어린 선수들에게 이청용 본인이 뜀으로서 우리 대표팀이 뛰어난 실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을것이다. 


경험과 실력을 겸비한 이청용은 현재 국가대표팀에서 당연 에이스라고 볼 수 있다. 이청용이 2014년 FIFA 브라질 월드컵에서 어떻게 우리를 즐겁게 할지 벌써 기대가 된다.



" 어느 팀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팀에서 나를 얼마만큼 원하느냐가 중요하다. 꼭 그 두 팀(리버풀, 스토크 시티)이 아니더라도 나를 간절히 원하는 팀이 있다면 생각해 볼 것이다. " - 2013년 1월, 이청용의 인터뷰 中 


앞으로의 이청용에 대해 말하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볼턴 원더러스는 이제 이청용을 놓아줄때가 되었다고 말이다.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에이스이자 실력을 겸비한 이청용이 2부리그에서 전성기 나이때에 뛴다는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나 역시도 이러한 점이 상당히 아쉬울 따름이다. 어쩌다 EPL 상위 팀인 첼시 등과 링크가 있었던 이청용이 챔피언쉽 리그에서 뛰어야만 하는가.


유럽 팀들이 이청용 영입에 대해 망설이는 이유는 2011-2012 년에 당한 무릎 골절 부상때문이다. 9개월동안 경기는 커녕 연습조차 하지 못하고, 재활에 매달려야했던 이청용이 예전의 기량을 되찾을리가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한국사람들이 이청용이 예전의 기량을 되찾았다고 말한들, 유럽에 들릴리가 만무하다. 그렇다면 이대로 이청용은 볼턴 원더러스에서 그 재능을 계속 낭비해야 되는것일까?


그 전환점은 아마도 월드컵이 될것이다. 다행히도 이청용의 계약기간은 2015년 여름에 끝이 난다. 이청용이 이번 2014 FIFA 브라질 월드컵에서 좋은 활약을 펼친다면 계약기간이 1년 남은 상황이 될 이청용이기에, 비싼 가격이 아닌 적은 금액으로도 수준급의 실력을 가진 이청용을 영입할 수 있게 된다.


이청용이 월드컵에서 매번 고전하던 한국 대표팀에게 골과 어시스트로 도움을 주며, 항상 최고의 선수로 인상을 깊게 남겼다는 점을 본다면 이번 월드컵에서도 이청용의 좋은 활약이 기대된다. 그리고 이 월드컵은 이청용을 유럽 1부리그에 이적시켜줄 좋은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월드컵 무대에서 예전만큼의 기량을 보여준다면야, 어느 누가 이청용의 영입을 망설이겠는가.


우리가 이청용에 대해서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2011-2012 시즌에 있었던 큰 부상이 없길 진심으로 기원하는 일이다. 큰 부상이 없다면 앞으로의 이청용의 미래는 아직 밝다. 그가 다시 1부리그에서 뛰는것을 보는게 이제는 그렇게 먼 일이 아니게 될것같다.

  1. 루니와 테베즈를 제치고 EPL 북서부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나, 팬들이 선정하는 방식이여 매년 논란이 일고 있는 부분이기에 이 상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겠다. [본문으로]

브라질서 만날 ‘아시아 스타 TOP10’

2013.11.21



오늘 새벽 스포탈코리아의 정지훈 기자가 브라질서 만날 '아프리카 스타 TOP10' 이란 글을 게재했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글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그 글을 보고서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익숙하지 않은 아프리카 스타를 소개하는것도 좋지만, 우리에게도 익숙한 아시아 스타들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였다.


브라질 월드컵 본선으로 진출한 32개의 국가중 아시아는 총 4개의 국가가 본선에 진출했다. 피파랭킹 44위 일본, 49위 이란, 56위 한국, 57위 호주가 그 국가들이다. 전부가 익숙한 국가들이고 특히나 아시아에서 한국과 일본이 진출하지 못한 경우가 매우 드물기에, 더더욱 익숙하다.


치열했던 아시아 최종 예선을 거치고 올라온 팀들중에서 브라질 월드컵의 스타로 떠오르는 선수는 누가 있을까. 우리나라에서도 월드컵에서 떠오른 스타들이 매우 많기에, 더더욱 기대가 되고있다. 특히나 아시아 최고의 재능이라 불렸던 박지성 역시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최고의 선수가 되었다는 점을 볼때 이번 월드컵에서도 박지성급의 스타가 나올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아시아의 별. 브라질 월드컵에서 아시아를 빛내줄 그 주인공들은 누구일까.





혼다 케이스케(27, CSKA 모스크바, 일본)


일본의 에이스가 누구냐고 말한다면 당연 혼다 케이스케를 들 수 있다. 자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얻고 있고 일본에 대해 평가가 박한 한국에서도 인정받는 에이스중 한명이다. 피지컬이 우수하며, 볼키핑 능력은 아시아 내에서도 탑으로 꼽히며 공격의 활로를 여는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다. 게다가 킥력과 정확도가 우수해 프리킥의 대부분을 본인이 차고 있기도 하다. 소속팀에서도 에이스로 뛰고 있으며, 이번 겨울 이적시장에 자유계약 선수로 풀리기때문에 이적시장 핫이슈로 꼽히고 있다. 일본의 중심이자 에이스로, 혼다가 있는 경기와 없는 경기의 수준은 상당하다.




손흥민(21, 바이엘 04 레버쿠젠, 한국)


한국에서 가장 기대받고 있는 유망주이자, 이미 전세계적으로도 TOP 유망주에 속하는 손흥민은 이번 월드컵이 첫 출전이지만, 국가대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것으로 보인다. 한국에 부족한 골 결정력을 해결시켜줄 수 있는 선수로서, 드리블 돌파 역시 뛰어나고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이제 21살이기에, 이번 월드컵은 물론 2018, 2022월드컵까지 아시아의 별로서 그 기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것도 장점이다. 소속팀에서도 삼각편대를 이루는 공격진의 핵심으로, 감독의 믿음을 받고 있고 한국 국가대표에서도 에이스로 서서히 자리매김하고 있기에, 손흥민을 기대해볼만 하다.




카가와 신지(2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일본)


혼다 케이스케와 일본의 공격을 책임지고 있는 선수로는 카가와 신지는 일본이 가장 기대하고 있는 선수중 하나다. 박지성에 이어 맨유로 이적한 카가와 신지는 퍼거슨의 믿음 아래 맨유에서 첫시즌 주전으로 활약했으나, 모예스가 맨유를 맡으면서 제대로 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재이며, 문전앞에서의 놀라운 침착성, 창의적인 패스는 일본의 아기자기한 스시타카에서 없어서는 안되기에 계속 선발될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박지성이라 할정도로, 일본 팬들에게 두터운 신임과 기대를 받고 있고,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서 일본을 16강, 혹은 그 이상까지 올려줄 수 있을만한 능력을 지녔다.




자바드 네쿠남(33, 에스테그랄 FC, 이란)


이란에서 A매치를 129회 출전한 백전노장이자, 여전히 국가대표에서 중요한 중추역할을 맡고 있는 자바드 네쿠남은 사실상 이번 월드컵이 마지막이라고 봐야한다. 그렇기에 더욱 더 네쿠남은 이란을 위해 그 실력을 발휘할것이다. 아시아 선수가 크게 성공하지 못한 스페인리그의 오사수나에서도 팀내 에이스로 꼽힐 정도로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국가대표에서도 사령관으로서 그 역할을 할것이다. 시야가 좋고 위치선정이 뛰어나며, 킥력이 좋아 사방으로 뿌리는 롱패스와 중거리슛, 좋은 피지컬과 양발 사용은 이란에게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카드다. 소속팀에서도 에스테그랄을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4강에 올려놓았고, 이란을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은 놀라운 인재인만큼, 마지막 월드컵에서의 그 활약이 주목된다.




김신욱(25, 울산 현대 축구단, 한국)


최강희호 시절부터 중용되었던 김신욱은 홍명보체제에서 완성을 이루었다. 190cm 가 넘는 거대한 키를 통해, 그동안 부족했던 한국의 높이를 만들어냈고 좋은 포스트플레이와 뛰어난 연계력, 왕성한 활동량과 좋은 발재간을 통해 한국 대표팀의 원톱 제 1옵션으로 평가받고 있다. 소속팀 울산에서도 그 기량을 발휘하며 팀의 중추 역할을 맡고 있고, 국가대표에서는 보다 유기적이고 활발한 움직임으로 골을 만들어내는데 주력할것으로 보인다. 김신욱에게 있어서도 첫 월드컵 출전이기에 큰 부담감이 있겠지만, 이겨내고 좋은 활약을 할 수 있길 빈다.





레자 구차네자드(26, 스탕다르 리에주, 이란)


이란의 선수중 아쉬칸 데자가를 할지, 레자 구차네자드를 할지 고민하다 이 선수를 선택하게 되었다. 현재 이란에서 원톱을 맡고 있는 선수고, 한국에게는 6월에 있었던 한국 VS 이란 전에서 한국에게 통렬의 쐐기골을 박은 선수로 기억되어 있다. 왼발을 사용하는 선수이기에, 수비수들이 막기 어려운 타입이고 스피드와 개인기를 갖춘 이란의 샛별이다. 어렸을때부터 유럽축구를 배워왔기에, 아시아에서 보기 힘든 유럽형 스트라이커다. A매치에서 순도높은 골 결정력을 보이고 있으며, 아마 케이로스는 레자 구차네자드를 월드컵까지 안고 갈것으로 보인다. A매치의 경험은 10회를 웃도는 수준이지만, 월드컵까지 꾸준히 친선경기에 참가하며 노련미를 익힌다면 충분히 이란에게 좋은 성적표를 안겨줄 수 있을것이다.




팀 케이힐(34, 뉴욕 레드불스,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의 백전노장, 최고의 공격수로 뽑히는 팀 케이힐이다. 바로 어제 코스타리카와의 경기에서 후반전에 투입되 결승골을 넣을정도로 아직 그 기량이 출중하다. 특히나 2006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월드컵 첫 승리를 본인 혼자서 만들어내고, 오스트레일리아 선수중 월드컵에서 가장 많은 골을 기록한 선수로 아직도 남아있다. 미드필더와 공격수 자리를 유기적으로 이동하며, 세트피스 시의 위협적인 제공력과 수준급 골 결정력을 가진 이 선수는, 이번 월드컵이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기에 본인의 모든것을 바쳐 임할것이 분명하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자존심을 살려줄 팀 케이힐은, 이번 월드컵에서 오스트레일리아에게 승리를 안겨줄 수 있을까.




나가토모 유토(27, 인터 밀란, 일본)


인종차별이 심한 이탈리아에서 부동의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는 나가토모 유토 역시 일본 수비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엄청난 지구력을 가지고 있고, 특유의 오버래핑을 통한 공격가담은 수준급으로 알려져있다. 2010 월드컵에서 주전 수비수로 활약한적이 있고, 27세의 나이에 거의 70경기에 가까운 A매치 기록을 가지고 있어 경험도 풍부하기에 이번 월드컵에서 기대해볼만하다. 여전히 인테르는 물론, 일본 대표팀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으며, 이번 월드컵에서의 경기 폼도 나쁘지 않아 아시아 스타로서 자리매김할것이 분명하다.




마크 브레시아노(33, 알 나스르 SC, 오스트레일리아)


사실 손흥민과 같은 팀에 속해있는 로비 크루즈를 할까 고민했지만, 최근 리그에서도 백업으로 출전하고 있고 국대에서의 입지도 확실하지 않기에 마크 브레시아노를 선택했다. 마크 브레시아노는 33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오스트레일리아의 핵심 미드필더로서 꼽히고 있다. 팀 케이힐과 함께 2006 월드컵때부터 같이 호흡을 맞춰왔으며, 공격의 연결고리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최고의 재능으로 뽑히는 선수중 하나인만큼, 여전히 국대에서 공격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백전노장 팀 케이힐과 오랜시간 국대로 뛰어왔기에 호흡이 좋다는것 역시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을것이다.




홍정호(24, FC 아우크스부르크, 한국)


김보경, 기성용, 이청용 등의 선수가 나오지 않은것에 의아해할 사람들이 있을것이다. 특히나 한국 에이스인 이청용이 여기 나오지 않았다는점에 충격을 받았을만하다. 하지만 현재 한국 국가대표팀이 가장 중요시하는건 탄탄한 수비력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아시아 스타로 떠오를 수 있는건 홍정호가 아닐까 싶다. 홍정호는 한국 중앙 수비수 최초로 유럽 5대리그에서도 1부리그에 안착했으며, 분위기 역시 매우 좋다. 기본적으로 빌드업이 매우 뛰어난 선수고 침착함과 넓은 시야를 통한 위치선정과 판단력이 좋아 한국의 탄탄한 수비에 꼭 필요한 선수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놀라운 재능이 발휘되는걸 이번 월드컵에서 볼 수 있다면 더없이 좋다.





정성룡, 이제 경험은 잊고 경쟁해야만 한다.

2013.11.20



방금전 한국과 러시아의 친선전 경기가 끝났다. 경기를 감상한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정성룡이라는 골키퍼의 자질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사실 경기 전부터 정성룡이 대한민국의 No.1 자리를 맡을 수 있냐에 대한 이야기는 몇번 흘러나온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 축구전문가들은 정성룡은 뺄래야 뺄 수 없는 훌륭한 인재라고 평했다. 기록도 말해준다. A매치 56경기 50실점. 경기당 1실점이 되지 않는 좋은 기록을 보여주고 있으며, 남아공 월드컵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제, 경험도 잘 쌓인 튼튼한 골키퍼가 되었다. 


슈퍼세이브가 없다고 나쁜 키퍼라고 하는건 정말 어불성설에 불과하다. 그의 침착하고 차분한 플레이를 통해 나오는 절대적인 안정감과, 공중볼과 세트피스에서 가지는 장점은 대단하다. 특히나 역대 한국이 항상 세트피스 상황에서 매번 약점을 드러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절대적으로 필요한 키퍼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가 슈퍼세이브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것도 아니다. 서울의 팬으로서 그가 보여준 슈퍼세이브 능력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이런 정성룡을 감싸주긴 어려울것같다. 정성룡은 이제 자신의 강점마저 서서히 사라지고 말았고, 결국 비난을 직면해야 할때가 왔다. 이제 경험은 잊고 경쟁을 해야할때가 온것이다.




1. 자신감을 잃은 정성룡.


 년도

구단 

경기 출장수 

실점 

경기당 실점율 

 2006 

포항 스틸러스 

 26

27 

 1.038

2007

포항 스틸러스 

  16 

18 

 1.125

2008

성남일화 천마 

 34

29 

 0.853

2009

성남일화 천마 

 36

41 

 1.139

 2010 

성남일화 천마 

 30

28 

 0.933

 2011 

수원삼성 블루윙즈 

 31

32 

 1.032

2012

수원삼성 블루윙즈 

 33

38 

 1.152

2013

수원삼성 블루윙즈 

 31

37 

 1.194

 계

 

237 

250 

 1.055


이 표는 정성룡의 리그 기록이다. 내가 굳이 이 리그표를 들고온것에 대해서는 이유가 있다. 바로 정성룡의 최근 리그 기록이다. 정성룡은 성남 일화에 있으면서, 0점대 실점율을 2번이나 보여주며 최고의 골키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수원삼성 블루윙즈에 이적한 이후, 정성룡의 기록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물론 수비레벨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수원삼성 블루윙즈 정도의 구단이 수비력이 약한 팀은 결코 아니다. 곽휘주의 부재를 울부짖는 사람들도 있을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시즌 정성룡의 성적표에 만족할 사람은 결코 없을것이다. 수원삼성 블루윙즈가 매기는 정성룡의 평점을 보더라도, MVP가 4번이나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평점은 뚜렷한 활약이 없을때 주는 5점이 많다. 특히나 시즌초에 MVP를 3번이나 몰아받았다가, 점점 기량이 떨어지고 있는 점만 봐도 알만하다.


다시 말했지만 정성룡의 가장 큰 장점은 안정감이다. 하지만 최근 포항 스틸러스와의 경기에서 이명주의 슈팅을 아슬하게 잡다 놓치고 말았고, 오히려 본인팀의 골대에 덩크슛을 하며 안정감 역시 사라졌다는 평가를 듣는다. 이는 정성룡의 자신감 상실에서 나오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최근 잉글랜드에서 조 하트에 대해 자질논란이 있다. 세계급 키퍼인 조 하트가 있기에 최소 10년은 걱정이 없다고 큰소리치던 잉글랜드다. 하지만 올해에는 언제 그랬냐는듯 조 하트에 대한 비난이 앞서고 있다. 조 하트 역시 이 비난속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잔 실수만 늘어가며 리그와 국가대표 전부 저조한 성적을 가지고 오고 있다. 정성룡이 딱 이 상황에 놓여있다.


정성룡의 자신감 상실은 수원의 경기력에 저하를 가져왔고, 결국 리그 5위로 아시아 챔피언스 출전 티겟을 놓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가대표에도 큰 영향을 미칠것이 분명하다. 빨리 정성룡은 컨디션을 되찾고, 자신감을 찾아야만 한다.




2. 이운재와 김병지.. 그러나 정성룡은?

우리나라는 한때 골키퍼 걱정이 없었던 나라이기도 했다. 1998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의 레전드인 이운재와 김병지때문이였다. 우리나라가 역대 월드컵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던 2002년을 기억해보면 이운재와 김병지의 라이벌 구도를 떠올릴 수 있을것이다. 사실 이운재가 우리나라 정상급 골키퍼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김병지란 걸출한 라이벌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벌은 경쟁을 가지고 온다. 그리고 그러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기발전을 꾸준히 하게되고, 그는 좋은 경기력을 나오게 할 수 있다. 모든 감독들이 선수들에게 포지션 경쟁을 시키는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정성룡은? 정성룡은 이렇다할 라이벌 없이, 너무나도 순탄하게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정성룡을 소개할때 수원은 이런말을 한다. 이운재는 은퇴했고, 김병지는 기량이 하락했다. 이제 정성룡의 독주다. 세상에나, 정성룡이 본격적으로 활약한 시즌에 이미 축구생활의 황혼기를 보냈던 이운재와 김병지가 라이벌이다. 그만큼 정성룡의 실력이 뛰어난 탓도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원탑 구조는 정성룡의 성장을 더디게 하지 않았나 싶다.


다행인 점은 있다. 최근에 신화용과 김승규가 0점대 실점율을 기록하며, 리그에서 정성룡보다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김승규는 국가대표에 선발되었고, 특히 최근 스위스전에서 1실점만을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김승규의 활약은 정성룡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거나, 혹은 정성룡을 주저앉힐것이다. 모든 이들이 정성룡이 뒤에서 열심히 하는 노력파 선수라고 말하고 있는 점을 본다면, 분명 좋은 자극제로 작용할것이다.


이제 홍명보 감독의 노련한 밀고 당기기 기술이 필요한 때다. 정성룡과 김승규를 계속 밀고 당기며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제가 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 



3. 한국, 경험을 잊어라. 정성룡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정성룡을 뽑는 이유로 대부분 경험을 이야기한다. 2010 남아공 월드컵을 경험했고, 이제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김병지를 제외한다면 A매치 기록으로서는 최고의 경험을 가진 골키퍼다. 하지만 이 경험에 의존하며, 계속 정성룡만을 기용하는건 선수 본인한테도, 팀 전체에게도 좋지 않은 상황이다.


홍명보 감독에게서 따라오는 비판이 하나 있다면, 올림픽 멤버만을 너무 중용하지 않느냐라는 이야기다. 그만큼 올림픽 멤버들을 매우 아끼고 있는 홍명보고, 정성룡은 그 올림픽 멤버중 한명이였다. 홍명보는 매번 소집에 정성룡을 뽑아 계속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가 과연 올바른 행동인지는 알 수가 없다. 물론 이는 주전 골키퍼에, 리그에서도 계속 출전하며 출중한 기량을 뽐내고 있기에 당연한 행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성룡은 계속된 차출과 부진으로 엄청난 부담감을 안고 있다. 이런 정성룡에게는 휴식의 시간이 필요하다. 조금 더 자신을 가다듬을 시간을 주기 위해, 정성룡을 1회정도 차출하지 않는 것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국가대표 차출에서 실패한 경험이 거의 없는 정성룡에게는 새로운 자극이 될 수 있다.


선수에게 동기를 주고, 국가대표가 아닌 한명의 일반인으로서 국가대표 경기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며 정성룡에게 자극과 안정을 찾아준다면, 그가 다시 예전의 기량으로 되돌아올 수 있을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국가대표 감독들은 매번 선수들과 밀고 당기기를 했다. 홍명보도 이러한 밀고 당기기를 골키퍼 포지션에도 할 필요가 있다. 최근 홍명보 감독은 김신욱을 가지고 밀고 당기기에 성공해, 그를 주전 스트라이커로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정성룡은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골키퍼중 한명이다. 그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은 없어져야한다. 현존하는 축구감독중 최고로 뽑히는 감독중 하나인 무리뉴의 말을 빌려 말하고 싶다. " 이러한 모토는 어떤가. 내 사람이 최고야! 우리 감독이 파울루 벤투라면 다른 누구보다 파울루 벤투가 최고인 것이다. " 똑똑한 사람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전달하려 했는지, 다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그에게 자극만을 주는 비판을 주는것으로 족해야한다. 얼마나 국가대표팀의 자리가 무거운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무게감이 얼마나 힘들기에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안정환이 이탈리아 전에서 패널티 킥 하나를 실축한것만으로, 이민과 자살에 대해 고민했을정도였을까.


이제 우리는 충분한 비판을 했다. 이제 우리는 정성룡을 믿고 기다려보자.





한국 대표 7인의 원톱 경쟁 백서.

2013.11.10


최근 한준이 스페인 대표 7인의 원톱 경쟁 백서라는 칼럼을 작성했다. 디에구 코스타라는 걸출한 스트라이커가 브라질 국가대표를 포기하고, 스페인 국가대표로 들어가며 원톱의 경쟁이 가열되었기 때문이다. 코스타의 국가대표 선택으로 부진했던 토레스, 비야 등의 스트라이커들이 부활의 신호탄을 올리며 스페인의 원톱은 다시 재경쟁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가 걱정해야 할것은, 머나먼 유럽땅에 있는 스페인의 원톱이 아니다. 항상 스페인의 원톱의 무게감에 대해 이야기해왔지만, 그들의 최하옵션도, 우리 한국에겐 최고의 옵션이 될정도로 기량이 출중하다. 그들의 원톱걱정은 어찌보면 말도 안되는 걱정인 셈이다. 문제는 우리나라다. 매년 우리나라는 02년 안정환, 06년 조재진과 이동국 등 월드컵에서 출중한 기량의 스트라이커를 기용할 수 있었으나 이번 월드컵은 그렇지 않다.


아직도 한국의 원톱은 결정나지 않았고, 그 윤곽조차 크게 좁혀지지 않고 있다. 원 스피릿(One Spirit), 원골(One Goal)을 강조하며 탄탄한 수비력과 단 한개의 골로 승부를 결정짓는 축구로 월드컵에서 좋은 결과를 내려는 한국은 One Goal 을 넣어줄 스트라이커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한국의 원톱 스트라이커 후보에는 누가 있을까.


꾸준한 출전을 하지 않으면 뽑지 않겠다는 홍명보의 원칙, 그리고 홍명보가 좋아하는 선수들을 고려하여 대표 7인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박주영

1985년생, 28세, 아스날 FC(잉글랜드)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의 주역으로 잘 알려진 선수다. 아스날로 이적하기 전까지는 많은 출전 기회를 얻으며, 미래의 주전 원톱으로 성장할것이란 기대를 받았지만, 아스날로 이적한 이후 출전 기회가 없어지면서 선수로서의 위기에 직면해있다. 지난 시즌 셀타 비고로 이적하였으나 저조한 기록으로 선수로서의 감각과 실력이 많이 떨어져있다는 평이다. 이러한 박주영의 상황이 한국 원톱의 부재를 낳기도 했다. 


아직 박주영은 위기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홍명보가 가장 아끼는 애제자로서, 런던 올림픽 당시 군면제 논란에 있었던 박주영 대신 군대를 간다고 발언하며 자신의 제자를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박주영도 이번 겨울시장에서도 주전경쟁이 어둡다면 임대등을 통해 많은 출전을 보장받으려 노력할것이라고 뉘앙스를 풍겼으며, 홍명보도 박주영에게 임대를 권유했다. 


이렇게 홍명보가 아끼고 관리하는 만큼, 주전 기회를 얻게 된다면 가장 유력한 원톱 후보로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 홍명보호는 사실 박주영의 원톱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주영의 포스트 플레이를 통한 좋은 연계, 2선으로 내려가는 활동량. 특히나 순간적으로 오프사이드를 허무는 감각적인 침투는 가히 한국 최강이라 부를 수 있다. 


문제는 감각이다. 2년동안 셀타 비고 임대를 제외한다면, 실전경기를 뛰지 못했다. 더불어 군 면제 논란이나 하이재킹 등 국내에서 이미지가 좋지 않은 박주영의 차출이 대표팀을 흔들리게 할 수도 있단 점 역시 단점으로 작용한다.



이동국

1979년, 34세, 전북 현대 모터스(한국)


1998년 월드컵에서 강렬한 중거리포로 등장한 이동국은 브라질 월드컵 본선 견인까지 무려 15년동안 국가대표를 위해 뛴 헌신적인 선수로 유명하다. 이제 노쇠하면서 기량이 떨어진다는 점에서는 많은 이들이 동감하는 부분이지만, 여전히 K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며 전북의 상위권을 이끌었다. 하지만 홍명보가 이동국을 국가대표로서 전혀 고려하지 않다는 점에서는 이동국에게 악재가 될 수 있다.


이동국은 서서히 선수로서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홍명보의 원칙에 딱 들어맞는 선수이기도 한데, 리그에서 꾸준히 출전하고 있으며,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기에, 원칙을 고수하는 홍명보가 최종옵션으로 고려해봤을법 하다. 장기부상으로 시즌 아웃이 될것으로 우려했으나, 다행히 최근 울산전과의 경기에 출전해 골을 기록할뻔 하기도 했다. 오심으로 무효가 되긴 했지만.


이동국의 장점은 뛰어난 연계력이다. 직접 골을 해결짓는 능력도 뛰어나지만, 최강희호에서 보여준 포스트 플레이와 연계력, 그리고 공간 창출 능력은 알아줄만하다.  무엇보다 A매치 99경기 출전, 30골이라는 기록으로 현재 원톱 후보중 가장 출중한 A매치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동국 본인으로서도 본선에서 주전 스트라이커로 영광을 누려본적이 없기에, 마지막 월드컵을 위해 헌신할 자세가 되어있을것이다.



김신욱

1988년생, 25세, 울산 현대 축구단(한국)


현재 K리그 득점 선두를 달리며, 울산의 리그 1위를 견인하고 있는 김신욱. 최강희 호에서 뻥축구의 중심이 되면서 전봇대라는 별명까지 붙으며 수많은 욕을 얻어먹은 선수다. 그 당시만 해도 국내용이라는 비난이 어마어마했으나, 본인이 부족한 점을 빨리 깨닫고 꾸준히 훈련하고 노력한 결과, 자신의 단점인 발속도를 어느정도 극복해냈고, 활동량을 넓히며 연계력까지 업그레이드시켰으며, 기존에도 탁월했던 발재간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홍명보호에 승선하는데 성공했다.


역시 홍명보호의 원칙에 걸맞는 선수인데다가, 울산에서도 순도 높은 골을 자랑하며 홍명보호의 부재인 One Goal 을 넣어줄 스트라이커의 대안책으로서 떠오르고 있다. 울산의 철퇴축구와 비슷한 이념을 가졌기 때문에 본인의 적응도 수월할것이라 생각된다. 더불어 기존보다 활동량을 폭넓게 넓히며 중원까지 내려와 볼배급을 하며 연계력이 더욱 업그레이드 되었기에, 홍명보호의 원톱으로서 가장 적합하다고 평가하고싶다. 


문제점은 김신욱이라는 선수의 전술적 단순함이다. 기본적으로 발재간이 뛰어나고 속도도 갖추는데 성공했지만, 다른 선수들이 여전히 김신욱에게 머리로만 공을 보내주려한다면 의미가 없다. 다른 선수들도 빨리 김신욱을 파악하고,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할 수만 있다면 좋은 대안책이 될 수 있다.



손흥민

1992년생, 21세, 바이엘 04 레버쿠젠(독일)


해트트릭 손! Kia~~ 국뽕에 취한다!! ...아니 아무튼 현재 한국 최고의 재능으로 차붐의 후예라 불리는 손흥민은 국대에서도 이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위치는 바로 측면 공격수인데, 그 이유는 홍명보호가 원하는 원톱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주영처럼 포스트 플레이에 능하며 넓은 활동량으로 공을 배급해 연계시켜줄 공격수를 원하는 홍명보의 원톱체제에 손흥민이 적합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더불어 손흥민의 폭발적인 골 결정력을 살리기 위해서도 원톱보다 측면으로 내놓은것이라 생각한다.


올해 레버쿠젠으로 이적해 클럽에서 공격 삼각편대로 활동하며, 가장 부진하단 평을 받고 있지만 함부르크전에서 3골 1도움으로 한국인 최초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다시 한번 희망의 불씨를 살리고 있다. 손흥민의 원톱 체제의 가장 큰 장점은 포지션 경쟁의 최소화다. 무슨 이야기인고하니, 포지션 위치가 겹치는 구자철과 김보경을 공존하게 할 수 있단 이야기다. 현재 손흥민이 왼쪽 측면, 이청용이 오른쪽 측면을 뛰게 된다면 하나의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를 두고 두 선수가 경쟁해야만 한다. 하지만 손흥민이 올라간다면 그 점이 해결되기에 한국 최고의 재능을 가진 선수들을 전부 뛰게 할 수 있다.


단점은 연계력과 제공권, 그리고 원톱으로서의 부담감정도가 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 포스트 플레이에 능한 선수를 중요시하는 홍명보이기에 손흥민은 기본적인 전제조건에서 밀린다. 더불어 소속팀에서도 불안한 활약감을 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국대에서도 좋은 활약을 하지 못한다면 선수에게 지나친 부담감을 안게할 수 있다. 홍명보도 그 점을 충분히 고려해 원톱으로 사용할지 고심할것이다.



지동원

1991년생, 22세, 선더랜드 AFC(잉글랜드)


선더랜드에서 뛰고 있는 지동원은 홍명보가 가장 많이 실험해본 원톱 옵션중 하나다. 준수한 제공권 능력과 연계력. 분데스리가 후반기에 보여준 골 결정력 등을 고려해 계속 실험해봤으나 여태까지 이렇다할 활약을 보이지 못한게 사실이다. 클럽에서도 주전경쟁에서 밀리며, 서서히 벤치로 밀려나고 있기에 본인 스스로 그 능력을 입증해야만 한다.


사실 지동원 본인이 자신의 스타일을 잘 찾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제공권도, 발재간도, 공간발견과 창출 능력도 준수하지만, 어느 하나 뛰어나지 못하다. 약팀을 상대로는 즐라탄과도 같은 다재다능한 선수지만, 강팀을 상대로는 이도저도 아닌 선수로 보일 수 있기에, 자신의 강점을 발견하고 그 점을 클럽 감독에게 어필하는게 중요하다. 그렇게해서 홍명보의 원칙을 위해서라도 출전해야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의 지동원에게서 미래는 그리 밝아보이지 않다.


어찌되었건, 홍명보가 박주영을 뽑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다시 한번 실험해볼 지동원의 원톱이기에 예의주시해야한다. 홍명보가 런던올림픽 멤버들을 중용하는 상황이기에, 지동원의 실력만 돌아온다면 월드컵에서 뛸 영광을 누릴 가능성은 충분하다.



김동섭

1989년생, 24세, 성남 일화 천마(한국)


런던올림픽때부터 홍명보의 아이들로서 유명했던 김동섭이다. 특히나 이번시즌 7경기 연속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며 13골을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다. 국대에서도 초기에 승선되는 등 희망을 보인 김동섭이지만, 올림픽 때와 달리 좋은 모습을 계속 보이지 못했다. 호주전만큼의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지 못한 김동섭은 결국, 국대 엔트리에서 제외되며 조급함만 앞서고 있는 상황이다.


김동섭의 장점은 큰 키와 스피드, 그리고 뛰어난 연계력을 들 수 있다. 홍명보호가 가장 원하는 유형의 선수이며, 원칙에서도 맞는다. 소속팀에서 꾸준히 출전하고 있다. 다만 문제점은 조급함이다. 최근 들어 홍명보호에 승선하지 못하고, 김신욱이 스피드 면을 해결했다는 점에서도 김동섭은 매우 초조해졌나보다.


김동섭은 하위 스플릿으로 내려간 이후, 단 2골밖에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했고, 본인에게 있어서도 2개월 연속 공격포인트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불필요한 반칙으로 공격의 흐름을 끊는 등 조급함만 앞서고 있다. 김동섭은 좀 더 침착하게 자신의 강점을 서서히 살려나가야 한다.


런던올림픽의 주역, 홍명보의 아이들이니만큼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현재로서 원톱 경쟁에서 멀어져가고 있는 안타까운 선수다.



이근호

1985년생, 28세, 상주 상무 피닉스(한국)


한국의 메시. 대한민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에 매년 지대한 공을 세웠던 이근호다. 무엇보다 최근 국대에 승선해 미친듯한 능력을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놀라운 공간창출과 활동량은 홍명보의 맘에 쏙 들었을 법하며, 새로 떠오르는 원톱의 별이 될 수 있다. 한때 유럽 진출에 실패하며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현재 마음을 다잡고 뒤는 그의 실력은 한국에 꼭 필요한 인재다.


이근호는 원톱으로서 국대에서는 엄청난 활동량으로 그라운드의 개처럼 뛰어다닌다. 중앙, 측면, 최전방을 수없이 오고가며 공을 배급하고 공간을 창출하며 연계하는데 주력한다. 문제는 득점력인데 K리그 첼린지에서 좋은 득점력을 보이고 있지만, 국가대표에선 최근 경기에서는 과거와 달리 좋은 득점 기횔 아쉽게 놓치는 등 부족한 면을 보였다. 


하지만 현재 이근호의 모습은 분명 인상적이고, 그가 들어올때마다 한국 공격진의 공격전개 레벨이 달라진다는 점을 우리는 꾸준히 봐왔기에, 충분히 원톱으로서 브라질까지 꾸준히 주전경쟁을 할것이라 보인다.

대한민국 스트라이커 계보, 최순호부터 박주영까지.

2013.07.25

(2) 안정환, 이동국, 박주영. 비운의 스트라이커들



3. 안정환(1998~2012)


" 안정환은 아름다운 축구를 한다. 박지성도 훌륭하지만 박지성도 안정환처럼 아름다운 축구를 할 수는 없다. "


A매치 70경기, 17골. 필드의 황태자로 불린 안정환은 아마도 최근세대가 기억하기에 가장 유명한 스트라이커중 한명이 아닐까 싶다. 2002년 월드컵 원톱으로 출전하여 기적같은 골들을 보여준 안정환은 월드컵 본선 3골로, 박지성과 같이 월드컵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중 한명으로서 당시 스트라이커중 독보적인 개인기로 아름다운 축구를 구사한 사람중 한명이다.


전형적인 스트라이커라기보다는 사실 세컨드 스트라이커 혹은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경기를 많이 뛰었고, 많은 골을 넣었던 입단 초기에도 윙포워드로 뛰었을뿐 실제로 전형적인 스코어러로서의 공격수로 뛴적은 거의 없고 세컨드 스트라이커로서 킬패스를 뿌리고 수비수들을 제치며 수비수들을 끌어내는 역할에 본인이 결정지을 수 있는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특히나 그의 개인기는 아직도 한국 최고로 뽑힐정도로 수준급의 개인기였다.


안정환은 아주대 시절부터 독보적인 존재감을 펼치며, K리그에 입단했고 1998-2000년까지 54경기에 출전해 27골을 넣으며 독보적인 존재감을 펼친다. 특히나 1999년, PK골 7골을 제외한 13골을 넣었던 시즌은 K리그 MVP를 받을 정도였다. 당시 안정환은 볼을 계속 끌면서, 수비수들을 다 제쳐버리고 골을 넣ㅇ 해설진들을 매번 당황시켰다. 매번 패스, 슛 타이밍을 놓쳤다고 판단하는 시점에 골을 터트리며 모든이들을 당황하게 했으나, 팀플레이가 부족한 이기적인 선수라고 혹평받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골이나 필드골을 넣으며 본인의 존재감을 널리 알렸다.


그 이후, AC 페루자에 임대형식으로 이적하면서 세리에A에 첫 진출한 한국인 선수가 되었고 2000-2002년동안 30경기 5골을 넣으며 활약했다. 여기엔 일화가 있는데, 2002년 당시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든골을 넣은 안정환을 보고 AC 페루자의 개싸이코쓰레기구단주가 안정환을 방출시키겠다고 하면서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 참고로 AC 페루자의 구단주는 멘탈이 씹쓰레기로 유명하다. 세리에A 에서도 독보적인 병신이였으며 여자선수를 영입하려고 하기까지 했다. 이 구단주의 병신짓들과 막장운영 덕분에 페루자는 결국 해체되었다 재창단된다. )


여기서 부산과 AC 페루자의 영입분쟁으로 안정환은 보상금으로 억대급의 빛을 지게 되고, 일본의 시미즈 에스펄스에서 이 보상금을 갚아주는 조건으로 이적해, 2002-2004년동안 38경기 14골을 넣으며 활약하였고, 그 이후 2004년에 요코하마 마리노스로 이적해 2004-2005년 34경기 16골을 넣어 우승에 일조하였다. 그 이후 2005년에 프랑스의 메스로 이적하여 16경기 2골을 넣었지만, 6개월만에 팀이 강등에 처하자 독일의 뒤스부르크로 이적하여 12경기 2골을 넣었다. 그러나 역시 뒤스부르크도 강등을 면치 못했고, 뒤스부르크는 2006년 계약을 해지하였다.


결국 6개월이나 무직 축구선수로 지내다 다시 K리그로 복귀한 안정환은 수원에서 25경기 5골을 넣었지만 전체적인 부진을 면치 못했고, 벤치신세로 몰리자 더 많은 경기를 위해 결국 친정팀인 부산 아이파크로 이적하여 26경기 6골을 넣으며 활동했다. 그러나 안정환 씨발돼지녀 사건으로 안정환은 벌금을 물기도 했고, 더불어 시즌 초에는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부상과 부진으로 끝맺음을 했다.


마지막으로 안정환은 중국의 다렌 스더로 3개월 단기이적을 하였는데, 좋은 활약을 보인 안정환은 2009년부터 2011년까지 58경기 18골을 넣으며 시즌 말미에 좋은 활약을 보였고, 2012년 공식적인 은퇴를 선언했다. 안정환은 역대 스트라이커중 가장 많은 리그(한국, 이탈리아, 일본, 프랑스, 독일, 중국)를 경험하였으며, 한국 계보를 잇는 스트라이커중 가장 비운의 생활을 보낸 스트라이커이기도 하다.


안정환은 아주대시절 1997년 한중전에서 국가대표로 데뷔하였는데, 2000년까지 국가대표로서 나쁘지 않게 활동했었다. 그리고 안정환의 역사를 뒤바꾸어줄 2002년 월드컵이 찾아오는데, 당시 히딩크는 안정환의 실력은 인정했으나 그의 얼굴이 스타성을 만들어, 선수가 연예인병에 걸릴까 안정환을 가지고 밀고당기기를 했고, 그러한 히딩크의 뜻을 알아차린 안정환은 언론을 멀리하며 실력을 보이는데 집중했고, 그 결과 히딩크는 기존의 공미였던 안정환을 원톱 스트라이커로 끌어올리며 기용한다. 기성용 이거보고 좀 배워라 이새끼야


 2002년 폴란드를 2:0으로 이긴 대한민국은 미국전에서 승리한다면 16강 진출을 거의 확정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게 선제골을 내주고 이을용이 패널티킥을 실축하며 한국은 패색이 짙었고, 이대로 패배하나 싶었으나, 안정환의 78분 기가막힌 동점골로 무승부를 유지하며 16강 진출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 이후 포르투칼전에서 박지성의 결승골로 대한민국은 2승 1무로 사상 첫 16강에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16강에서, 이탈리아를 만난 한국은 전반 3분, 패널티킥을 얻어 안정환이 찼으나 실축을 하고 말았다. 그 이후 안정환은 자신의 실책을 막기 위해 경기 내내 엄청나게 뛰어다녔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선제골로 이대로 패배하나 싶었으나, 88분 설기현의 기가막힌 동점골로 연장전에 들어갔고, 안정환은 이 연장전에서 117분, 골든골을 넣어 대한민국의 8강 진출을 이끌어냈다. 이 골로, 안정환이 패널티킥에 실축했지만, 그가 최고였다고 이끌었다. 안정환은 2013년, 정글의 법칙에 출연하여 이 패널티킥을 실축했을때, 정말 죽고싶었다고 밝혔다.


그 이후 8강의 스페인전에서도 승부차기를 성공하였고 4강전과 3,4위전에서도 최선을 다해뛰며 대한민국의 반짝 스타로 떠올랐지만, 이탈리아 구단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 이후 2004년 AFC 아시안컵에서도 이동국이라는 걸출한 스타의 득점세례속에서도 플레이를 원할하게 하고 본인 역시 아랍에미리트와 쿠웨이트를 상대로 1골씩 총 2골을 넣으며 스트라이커로서 좋은 활약을 했다.


그 이후 2006년 월드컵이 찾아왔고, 아시아 예선전에서 대한민국은 계속된 골결정력 부재로 시달리지만, 김두현등의 활약으로 본선에 진출하였고, 토고전에서 안정환은 토고의 선제골, 이천수의 동점골로 1:1 상황이던 게임에서 역전골을 넣어 토고를 이기며, 사상 첫 원전승을 이루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그 이후 안정환은 전체적인 성적 부진으로 국가대표에 거의 선발되지 못했고, 2010년 월드컵에서도 벤치를 지키면서 사실상 국가대표 커리어에 종점을 찍게 되었다. 


안정환은 무려 8개의  팀을 옮겨다녔고, 특히나 페루자에서의 마찰, 돼지녀 사건등 가장 비운의 사건을 많이 겪었던 선수로서 한국 국가대표의 계보를 잇는 선수라고 하기엔, 비운의 삶을 걸어왔지만 아직도 한국의 기억속에 안정환은 아름다운 축구를 하는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남아있다.


4. 이동국(1998~현재)


" 선수의 플레이가 화려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득점력은 크레스포를 떠올리게한다. "


A매치 99경기, 30골. 이동국은 현재 국가대표를 잇는 스트라이커중 가장 최근까지 국대에 승선했던 백전노장인 이동국은 한국의 전형적인 스코어러라고 볼 수 있다. 특유의 뛰어난 위치선정은 아직도 수준급이며, 특유의 발리슛과 터닝슛 역시 이동국의 주장기로 뽑히고 있다. 몸싸움을 크게 좋아하진 않지만, 타겟형 스트라이커로서 포스트 플레이에도 능하며 연계력이 좋은 스트라이커로 평가받고 있다.


최순호의 가르침을 받아, 필요할때만 움직이는 선수로, 여론에서는 뛰지않는 이동국이라며 비난받기도 하였다. 2009년 최강희의 선택을 받아 전북 현대 모터스에서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으며, 세컨드 스트라이커, 타겟형 스트라이커, 골 스코어러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매력적인 옵션이였다. 그렇기에 1998년부터 이동국은 아시안 대표팀, 청소년 대표팀, 올림픽 대표팀, 성인 대표팀등 거의 모든 대표팀에 참가하여 뛰기도 하였다.


이동국은 1998년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하여 고종수, 안정환과 함께 K리그 르네상스를 열며 활약한다. 포항 스틸러스에서의 좋은 활약과 대표팀에서의 활약으로 이동국은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자리매김했고, 결국 K리그 신인상까지 수상한다. 2000년도 축구협회의 주도하에 유망주들을 해외로 이적시키는 유망주 성장 작업에서 베르더 브레멘에 6개월 임대로 이적하게 되었다. 이동국은 당시 무릎부상을 재활중이였고 브레멘에서 무릎부상 재활과 적응을 하게 되었다. 브레멘에서 이동국의 부상으로 인해 선수보호차원으로 출장기회를 많이 주지 않았고, 이동국은 리그에서 7경기 0골을 기록하며 2002 월드컵 선발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포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당시 이 경력을 가지고 이동국을 비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축구에 대해 매우 무지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브레멘의 공격진은 아이우톤과 피사로로 이동국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을 뿐더러, 이동국은 경기를 뛰기위해 브레멘에 임대간것이 아니였다. 축협의 주도하에 선진축구를 배우고, 경험하는 자리였기에 이것을 가지고, 이동국을 비난하는건 매우 멍청한 행위나 다름이 없다.


그 이후 포항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이미 국가대표에서 혹사당한 이동국의 몸상태는 국가대표에 어울리지 않았으며, 더불어 활동량이 적은 이동국을 거스 히딩크는 선발시키지 않았고, 이동국은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병역 혜택을 받지 못한 이동국은 2003년 다행히 상주로 복무하여 축구선수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46경기 12골이라는 준수한 기록을 낳았으며 플레이 스타일도 적극적으로 바꾸는 등 많은 노력을 하며 2006년 월드컵에 승선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그 이후 2006년 월드컵 예선에서의 활약으로 이동국은 2007년 1월 미들즈브러로 이적료 0원에 이적하게 되며, (당시 포항은 한국축구를 위해 이동국의 이적료를 받지 않았다.) K리그에서 프리미어리그로 바로 입성한 첫번째 한국인 선수가 된다. 초기에는 인상적인 모습을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2008년까지 리그 23경기에서 0개의 골을 기록하였고, FA컵과 리그컵에서 1골씩 총 2골을 기록하여 부진을 면치 못했고 더선에서 발표한 최악의 공격수로 뽑히기도 하였다. 결국 이동국과 미들즈브러는 2008년 결국 상호계약해지되었다.


그 이후 다시 K리그로 돌아온 이동국은 상위권의 성남 천마 일화로 이적했지만, 10경기 2골이란 부진한 기록을 낳았고, 신태용이 성남의 감독으로 돌아오며 전력에서 배제되는 등 이대로 이동국은 끝나는것만 같았다. 그러나 마침 전북에서 조재진의 일본진출로 스트라이커의 부재가 있었고 최강희는 과감히 이동국을 트레이드한다. ( 이동국, 심상식 <-> 문대성, 홍진섭 ) 당시 최강희의 무리수라며 부진한 스트라이커를 영입하려는것을 전북의 팬들은 원치 않았으나 최강희는 본인의 뜻대로 이동국을 영입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적한 2009년, 29경기 20골로 K리그 득점왕에 차지했다. K리그에서 4번째로 20골 이상 득점왕에 선정되었으며 이러한 놀라운 활약에 K리그 MVP를 받게 된다. 이러한 활약으로 2010년 월드컵에 승선한 이동국은 2010년 리그에서 전 시즌보다 부진한 28경기 12골로 한시즌만 반짝하고 이제 끝나는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다. 그러나 2011년 29경기 16골 15도움으로 1경기당 1이 넘는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였고, 도움왕을 수상하여 K리그 역대 최초로 신인상, 득점왕, 도움왕, MVP 의 4개 개인타이틀을 전부 석권하는데 성공하였고 K리그 베스트 11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MVP와 득점왕을 수상하였다.


그 이후 2012년, 34경기 22골로 다시한번 K리그 득점2위에 올랐고 K리그 베스트 11에 포함되었으며 K리그 사상 최다 골 신기록을 세우는데 성공하였으며 2014 월드컵 예선 엔트리에 선발되는등 제 2의 전성기를 펼쳤고, 2013년에서도 독보적인 득점력으로 득점1위에 랭크하고 있으며, 7경기 연속골의 대기록을 작성하였고, 아직도 이동국이 현역이며 경기감각이 죽지 않는것으로 볼때 이동국이 K리그에서 더 뛸 수 있다고 판단되고 있다. 이제 이동국이 골을 넣는것이 새로운 신기록 수립이 되고 있으며, 이러한 이동국의 기록은 앞으로 K리그에서 쉽게 깨지지 않을것으로 예측된다.


이동국은 국가대표에 1998년 자메이카와의 친선경기에서 황선홍의 교체카드로 출전하여 짧은 출전시간에도 불구하고 좋은 모습을 보이며 A매치에 데뷔하였다.. 그 이후 1998 월드컵에서 5-0으로 지고있던 네덜란드전에서 강력한 중거리슛으로 월드컵 스타로 떠올랐다. 그 이후 1998 아시안 게임에서 6경기 연속 주전으로 활용되었지만 안타깝게도 A매치 데뷔골을 넣진 못했었다. 그 이후 2000년 골든컵에서 코스타리카를 상대로 첫 A매치 골을 넣으며 코스타리카전의 무승부에 일조하였다.


그 이후 2000년 아시안컵에서 중국전과 쿠웨이트 전에서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지만, 인도네시아전에서 3골로 해트트릭을 터트리며 독보적인 골감각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조 3위였지만, 다승점인 한국이 8강에 올랐고 이란과의 8강전에서 이란에게 71분골로 패배가 확정되던 순간 김상식이 90분에 기적같은 동점골을 넣었고, 연장전에서 이동국이 골든볼을 넣어 이란을 상대로 역전하는 기염을 터트렸다. 그 이후 사우디 아라비아에게 76, 80분 연속 2골을 내리먹혀 패배가 확정되던 순간에서도, 90분에 한골을 넣어 한국의 체면치레를 하게 해주었다.


그 이후 2001년에도 친선경기에서 나이지리아전 1골로 A매치 기간에 거의 모든경기에 참가하면서 2002년 월드컵에 당연히 승선할것이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2002년 골드컵에서 3경기 전부 득점하지 못했고, 한일 월드컵이 다가온 시점에서 열린 친선경기 5경기에서도 바레인전에서만 1골을 기록하면서 갑작스런 부진이 찾아왔다. 당시 이 부진은 대부분의 국대경기에 차출되면서 혹사된 무릎때문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이동국은 대부분의 국가대표전을 치루면서 무릎과 다리에 붕대를 풀고 경기한것을 보기 힘들정도로 계속된 혹사가 시작되었다.


그 이후 결국 무릎의 부상으로 떨어진 경기력과 부진한 골 결정력, 낮은 활동력을 이유로 거스 히딩크는 계속 주전으로 실험하던 이동국을 과감히 엔트리에 제외했고, 이동국은 이 충격으로 술을 마시며 신음한다. 이동국은 이 이후 마음을 단단히 먹고, 활동량을 늘려나갔으며 리그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 결과 2004년 AFC 아시안컵에서 기용받았고 요르단과의 0:0 무승부 이후 아랍에미리트 전에서 선제골을 넣어 2-0 승리에 기여한다. 그 다음 쿠웨이트전에서도 내리 연속 2골을 기록하며 부진에 대한 오명을 씻었다. 그 이후 8강 이란전에서도 1골을 기록하지만 대한민국은 이란에게 3-4로 패하고만다.


이러한 2004년 AFC 아시안컵에서 대활약으로 2006년 월드컵 예선전에 기용된 이동국은 2차 예선 6경기중 3경기에서 중용받았고, 베트남전과 몰디브 전에서 골을 넣으며 활약했다. 예외로 몰디브전에선 좀 많은 기회를 날려 무승부를 하게 한 장본인으로 비난받기도 하였다. 그 이후 열린 3차 예선에서도 6경기중 5경기를 중용받으며, 쿠웨이트전에서 홈과 원정에서 전부 1골,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도 홈에서 1골을 넣어 총 3골을 기록해 원정에서 무려 5골을 넣음으로서 대한민국을 2006 월드컵 본선으로 올려놓는데 큰 활약을 하며 본프레레호의 황태자로 불렸다.


월드컵 예선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한 이동국은 2005 동아시아컵에서도 중용되었으나 3경기 전부 골을 넣지 못했고, 결국 한국은 조 최하위로 탈락하였고, 그 이후 2006년 독일월드컵이 오기전까지 9경기의 친선경기에서 단 2골만을 넣었으며 칼스버그컵과 아시안컵 예선전에서도 골을 기록하지 못하며 다시 골부진의 시대가 찾아왔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2006년 독일월드컵을 앞두고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당하며, 독일 월드컵에서도 뛰지 못했고 결국 독일 월드컵에서 뛰지 못해 2002년에 이어 2006년까지 월드컵 본선 출전이 좌절되었다. 그 이후 2007년 AFC 아시안컵에서 차출되었으나, 5경기 전부 득점하지 못했고 그 이후, 음주 파동으로 국가대표 1년간 출전 금지, 대한축구협회 주관 대회 2년간 출전 금지를 받으며 국가대표의 생을 마감하는듯 했다.


그러나 2009년 중징계 기간이 끝나고, 이동국이 2009년 전북으로 이적하여 K리그 득점왕을 수상할 수준에 오르자 여론은 이동국을 다시 재발탁해야한다고 했고, 허정무 대표팀 감독은 " 이동국은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야한다 " (에펨에서 본 대산데?) 라고 말했다. 그리고 허정무 감독은 이동국을 친선경기에 다시 중용하지 시작했고, 처음 7경기에선 단 한골도 기록하지 못하며 골 결정력 부재에 시달려야만 했으나, 2010년 동아시아컵에서 3경기 전부 출전하여 홍콩과 일본을 상대로 1골씩을 기록해 2골을 넣어 동아시안컵 득점왕에 뽑혔고, 이은 런던에서의 코트디부아르전에서도 1골을 넣으며 몰아치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그 이후 2010 월드컵을 앞둔 에콰도르전에서 이동국이 부상을 당하며, 출전이 불투명했으나 허정무는 이동국을 엔트리에 포함시키기로 하였고, 이동국은 2010년 월드컵에 무임승차를 하게 되었다. 그 이후 아르헨티나전에서 13분을 뛰면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고, 우루과이전에서도 후반전 15분에 교체출전하였다. 그러나 우루과이전에서 박지성이 준 완벽한 1:1찬스에서 물회오리슛을 하며, 전국민에게 카페베네슛을 선보였고 그 이후 이동국의 국가대표 여론은 완벽하게 돌아섰다.


그 이후 조광래 감독이 들어섰고, 이동국은 조광래에게 미움을 받았다. 인터뷰에서 위협적이지 않은 공격수라며 이동국을 비난하던 조광래는 이동국을 절대 차출하지 않았고, 이동국의 국가대표 커리어가 드디어 여기서 마감하는듯 했다. 그러나 2011년 K리그 도움왕을 수상하고 아챔에서도 MVP와 득점왕을 차지하자 여론은 다시 한번 이동국을 발탁해야한다고 했고, 아니꼬왔던 조광래는 이동국을 발탁하긴 하였지만 본래 전략이 아닌 3톱 전략으로 시작해 그중 한명으로 출전시켜 후반전에 바로 교체시켰고, 그 이후에도 출전기회는 10분 미만으로 조광래에게 사실상 버림받은 존재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조광래가 레바논전 단 한경기 졸전으로 쫒겨나고 최강희가 국가대표 감독으로 올라서면서, 이동국은 다시 한번 최강희에게 부름을 받았다. 당시 최강희는 2009년 사실상 스트라이커의 커리어를 끝낼것으로 보였던 이동국을 득점왕으로 만들며 제 2의 전성기를 구가시킨 장본인이였기에 이동국의 국가대표 여론에서도 이동국의 활약을 기대했다. 실제로 우즈베키스탄과의 친선전에서 2골을 기록함으로서 최강희의 믿음에 보답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이후 있었던 2014 월드컵 예선에서 쿠웨이트전에서도 1골을 넣음으로서 이동국의 부활을 예고했지만, 스페인과의 친선경기, 월드컵 예선에서의 카타르와 레바논전, 잠비아의 친선경기, 이렇게 총 4경기에서 연속 무득점을 하며 다시 한번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다행히 우즈베키스탄과의 예선전에서 1골을 기록하고, 호주와의 평가전에서도 1골을 기록하며 비난여론을 잠재우는듯 싶었지만, 그 이후 크로아티전과 예선전 4경기 연속 총 5경기에서 다시 무득점을 하면서 이동국에 대한 국가대표 비난여론은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그 이후 최강희 감독이 사임하고, 홍명보호가 시작되었으나 홍명보호에선 이동국을 엔트리에 포함시키지 않아 이동국의 국대 커리어는 사실상 끝나는것으로 예상되고, A매치 100경기정도만 채워질 수 있을것으로 모든이들이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히딩크가 안정환을 두고 밀고당기기를 했듯, 홍명보호 역시 이동국을 밀고당기기하는것이라고도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는것으로 보아 정확한것은 FIFA 월드컵 본선 이전의 친선경기에서 갈려질것으로 보인다.



이동국은 역대 국가대표 스트라이커중 가장 몰아치기를 잘했던 선수로 기억되있으며, 상당히 많은 경기를 무득점으로 보냈기에 그만큼 많은 비난을 받았다. 다른말로 하면 일관성이 부족한 선수이기도 했고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이동국의 대한 자질을 비난하고 있지만, 국가대표에서 많은 경기에서 혹사당한만큼 그의 노력은 인정받아야한다.




5. 박주영(2005~현재)


" 박주영이 대한민국의 슈퍼스타인 이유는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


여러분이 가장 잘 알고있는 국가대표 스트라이커가 누군가? 라고 물으면 아마도 다수의 지지를 받는건 바로 이 박주영이 아닐까 싶다. 축구천재로 잘 알려진 박주영은 바로 언론이 만들어준 최고의 스타선수중 한명이다. 그러나 한템포 빠른 공격감각, 과단성 있는 슈팅, 감각적인 위치선정으로 실제로 엄청난 활약을 펼쳤던 박주영이기에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것이 아닐까 싶다. A매치 60경기 출전의 23골이란 준수한 기록을 보이고 있는것도 완벽한 사실이고말이다.


감각적인 위치선정으로 수비벽라인을 허물고 공격진으로 들어가는 감각은 아직도 한국 최고수준으로 알려져있으며, 쉐도우 스트라이커로서의 역할도 청대에서 수행해 좋은 결과를 창출해낸적이 있다. 본래 빠른 드리블과 좋은 패스능력도 지니고 있었던 박주영이였으나, 모나코에 이적이후 드리블능력과 패스능력이 많이 떨어지고 타게터와 스코어러의 모습이 많이 오른 모습이지만 일본전 각시탈 골은 그의 감각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박주영의 클럽역사는 통수배신으로 상당히 유명하다. 청대시절의 활약으로 2001년 포항 스틸러스에서 5천만원을 지원해 브라질 유학을 가면서 포항 스틸러스와 계약 우선권을 약속했으나, 2004년 서울과 계약하면서 포항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고, K리그 드리프트제를 부활시킨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2005년 FC서울로 데뷔한 박주영은 첫 시즌 리그 12골을 몰아치며, K리그 득점순위 2위에 K리그 최초 만장일치로 신인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부진이 거듭되어, 2006년은 26경기 7득점에 머물렀고, 2007년엔 고작 11경기 2득점에 그쳤다. 2008년에도 별 다를 필요 없이 13경기 2골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국가대표에서 훌륭한 모습을 보인 박주영을 주목한 프랑스 리그1의 모나코는 32억에 박주영을 영입한다. 게다가 무려 첫 출장에 1골 1도움이라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모나코에서 첫시즌 31경기출장 5골 6도움이라는 괜찮은 기록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 이후 2009-2010년에도, 27경기에 출장해 7득점을 했고 2010-2011시즌에는 무려 33경기 출장 12골을 기록하며 해외5대리그에서 두자릿수 득점을 하는 기염을 토해내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박주영의 팀인 모나코는 강등에 쳐했고 박주영은 이적을 모색했다. 가장 유력한 구단은 같은 리그의 릴로서 프랑스 리그1 챔피언이였다. 메디컬 테스트까지 끝낸 박주영은 사실상 계약이 확정되는듯 싶었으나, 벵거의 전화를 받은 박주영은 계약을 앞두고 영국으로 떠나 아스날에서 메디컬 테스트를 받고 통수입단하였다. 이에 대해 릴은 하이재킹 논란을 알리며 박주영을 매우 비난하였다.


박주영은 아스널로 이적해 9번을 부여받으며 활약을 기대했다. 당시 3옵션 공격수였던 박주영은 유리몸이였던 반페르시를 위해 영입되었고, 실제로 많은 경기에 출전할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반페르시의 미친듯한 활약으로 박주영의 입지가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결국 아스날에 1년동안 리그에서 단 7분만을 뛰어보았고, FA컵 3경기에서 1골, 챔피언스리그 2경기에서 0골로 6경기 1골을 기록하며 최악의 시즌을 보내며 리저브 팀으로 이동되었다.


결국 2012-2013시즌 부활을 위해 스페인의 셀타 비고로 임대하였고, 데뷔전에서 골을 기록했으나 그 이후 급격한 골결정력 부재에 시달렸다. 게다가 셀타 비고의 감독이 경질되고, 새 감독이 들어오자 박주영을 공격수 최하위옵션으로 판단하였고, 실제로도 22경기 출전 3골이란 나쁜 기록을 하게 되었다. 특히 후반 4경기에서 많은 기회를 얻은 박주영이 득점하지 못해, 박주영은 셀타비고에서 사실상 전력외로 분류되었고, 시즌 최종전에서도 박주영은 무단불참하기도 했다.


그 이후 아스널로 돌아왔으나, 계약 해지를 통보받아 사실상 무직 선수가 되었다. 한국의 국가대표로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그외에도 병역 비리로도 한국인에게 많은 욕을 먹어왔고, 역대 한국 스트라이커로서의 자격문제가 많이 운운되어왔다. 한국이 만들어낸 인조스타의 한계점을 드러낸 박주영이지만, 그래도 그가 국가대표를 위해 뛰어온것은 비난해선 안된다.


박주영의 국가대표 커리어는 청소년때부터 시작된다. 카타르대회에서 양민학살을 하면서 모습을 드러낸 박주영은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에서도 득점왕을 하며 화려한 스타의 시작을 알렸다. 특히나 중국인 수비수들을 제치고 넣은 슛은 아직도 회자될정도로 박주영의 능력을 알려주는 골이였다. 2005년 서울에 입단하면서 성인 대표팀에서도 모습을 드러낸 박주영은, 2006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우즈베키스탄에게 0-1로 지고 있었던 경기에서 동점골을 넣으며 동점을 만들었고, 같은 예선전에서 쿠웨이트전에서도 선제골을 넣으며 4-0 승리에 일조하는등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 외에도 그리스, 핀란드등의 팀과의 친선경기에서도 1골씩 기록하며 1-1, 1-0을 만들어내며 한국에서 득점을 만들어낼 수 있는 선수로 떠올랐다. 그 이후에서도 국대에 자주 승선하였고, 특히 2008년 동아시아컵에서 중국에 선제골을 넣으면서 2년만에 다시 득점포를 열었다. 그러나 중국의 투혼으로 2-1로 다시 한국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으나, 곧바로 박주영이 동점골을 기록하면서 2골을 기록해 최종적으로 한국이 3-2로 승리하게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결과로 동아시아컵에서 한국이 2번째로 우승하는데 일조하였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2008년에 2010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 다시 승선하였고, 시드배정에서 요르단을 상대로 홈과 원정에서 1골씩 2골을 기록하며 월드컵에서 서브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을 알렸고, 교체경기에서 출전한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 1골을 넣으면서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아랍에미리트에선 드디어 선발로 출전하여 5분만에 골을 기록해 승리에 기여하였다. 이 이후 본격적인 주전으로 활동한 박주영은 B조 경기에 전부 선발출전하여 나이지리아전에서 1골을 넣어 무승부에 일조하여 조2위로 16강에 진출하지만, 이동국의 우루과이 물회오리전슛과 박주영의 무득점으로 안타깝게도 16강에서 만족해야만 했다.


그 이후에도 2010 아시안게임에서도 예선 3경기에 출전하여 팔레스테인을 상대로 1골을 기록했고, 16강전 중국과의 경기에서도 1골을 기록하며 승리를 이끌었다. 또한 8강전에서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도 1:1 연장전상황에서 1골을 넣어 승리를 확정지었으며 활약했으나 4강에서 아랍에미리트에게 연장전 후반 추가시간에 득점을 허용함으로서 안타깝게 패배하고 말았다.


2011년에는 2014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을 위해 참여했으며, 첫경기인 레바논전에서 3골을 넣어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시작을 승리로 이끌고, 쿠웨이트전에서도 선제골로 무승부에 일조했다. 이은 아랍에미리트전과의 홈경기에서도 선제골, 원정경기에서도 쐐기골을 박으며 A매치 4연속 골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박주영의 병역 비리가 이때쯤 대두되었고, 최강희는 박주영에게 이를 해명하는것이 좋겠다고 이야기했으나 박주영은 묵묵부답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더불어 소속팀에서 출전기회까지 잡지못한 박주영은 결국 최강희의 플랜에서 서서히 제외되기 시작하며 국가대표 커리어로서 끝나는듯 싶었다. 그러나 2012 런던올림픽이 열렸고, 홍명보는 자신의 팀의 원톱으로 박주영을 원했고, 병역비리를 감싸며 와일드카드로 박주영을 차출하였다.


그 결과 조별리그에서 스위선때 기가막힌 선제골을 기록하며 대한민국의 승리를 이끌었고 나머지 2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해 조 2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8강에서는 무려 영국을 만나며 석패를 당할것이라 예상했으나 오히려 한국은 지동원의 선제골로 리드했고, 결국 영국을 승부차기 끝에 이기며 기적적으로 4강에 올라가게 되었다. 4강에선 강팀 브라질을 만나며 전반전에서 비등비등한 모습을 연출하였으나, 내리 연속 3골을 먹히며 브라질에게 패배하였고 3,4위 전에서 일본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박주영은 일본 수비수 4명을 제치고 선제골을 만들어냄으로서 승리를 일조해 일본을 누르고 3위에 오르는데 성공하였다.


그 이후 국가대표에 승선하진 못하였지만, 홍명보가 박주영을 신뢰하고 있기에 박주영의 국가대표 승선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박주영이 여러가지 많은 분쟁을 만들었고, 국가대표로서 올바른 멘탈을 소유하고 있지 많다는 여론도 높으므로 아직까지 박주영의 승선이 무조건 좋다고 생각할 순 없다. 그러나 박주영이 국가대표에 떠나고나서 한국의 스트라이커 계보가 끊긴 지금, 박주영의 부활은 필요하게 될 수 도 있다.




마치며..


참 아이러니한점이 있다. 이러한 국가대표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잇는 선수들이 활약할때도 매번 우리나라에게 요구되었던건 골 결정력이였다. 하지만 그때도 분명 여기 소개된 스트라이커, 그리고 소개받지 못했던 최용수나 조재진등 많은 국가대표 스트라이커들은 골을 만들어왔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은 월드컵 8회 본선 진출이라는 대 업적을 이루었으며, 각종 아시아 국제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었던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박주영 이후로 스트라이커 계보가 끊어져버린 지금, 대한민국은 절실할정도로 골이 필요해졌다. 최강희호 최근 3경기 예선전과 홍명보호 2경기에서 스트라이커의 득점이 하나도 없다는건 큰일날 일이다. 한때 이동국이 10경기 연속 무득점을 하며 이러한 상황을 맞이했지만, 조재진 등의 스트라이커가 그것을 매꾸어왔다. 


하지만 이젠 그런것을 매꿀만할 스트라이커가 없다. 이제야 유럽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손흥민은 아직까지 국가대표 경험이 부족하고, 아시안팀을 상대로 할때 아시안팀의 촘촘한 수비로 본인의 장기인 돌파가 어렵다. 지동원 역시 선더랜드에서 많은 경기를 뛰지 못했고, 이제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간신히 경기감각을 찾는 시점이다. 유병수는 어느덧 국가대표 승선에서 더이상 가망성이 없어보이고, 김신욱은 A매치 20경기에 가까운 출전을 했으나 단 한골만을 넣어봤을뿐이다. 


앞으로 누가 이 국가대표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이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필요하다. 그러한 스트라이커가 말이다. 역대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이었던 선수들은 매번 비난받아왔다. 그러한 비난을 감당할 수 있으며 한국의 부족한 골 결정력을 상향시켜줄 스트라이커, 이제 우리는 그 스트라이커를 찾아야만한다.







대한민국 스트라이커 계보, 최순호부터 박주영까지.

2013.07.05


(1) 최순호, 황선홍, 그들이 달려온 길.


최강희 감독이 월드컵 본선에 팀을 올려놓고 사임한지 벌써 한달이 지났고, 홍명보호가 지난 동아시아컵에서 호주전을 기점으로 출항한뒤로 홍명보호가 2번째 경기를 치루었다. 최강희 감독의 마지막 월드컵 예선 3경기부터 홍명보호 2경기까지 찾아오는 5경기동안의 득점력 부재는 한국 스트라이커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한다. 


예전부터 한국의 득점력 부재는 항상 있어왔던 일이고, 그 점을 이란주먹감자년이 비꼬는 용도로 사용할 정도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스트라이커의 계보가 끝이 나버렸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매년 한두명의 스트라이커가 독보적인 시즌을 펼치며 득점력부재의 한국을 구출해왔다. 그러나 스트라이커 계보가 박주영 이후로 끊겨버린 이후, 어떠한 스트라이커도 그 계보에 들 실력은 보이지 않고있다.


그렇다면 여태까지 대한민국의 득점력부재를 구출하고, 국가대표에서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이어왔던 선수들은 누굴까. 대체로 많은 논쟁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 이회택 - 차범근 - 최순호 - 황선홍 - 안정환(or 최용수) - 이동국(or 조재진) - 박주영 " 라인으로 보고 있다. 가장 논쟁이 되는 선수는 이동국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에 대해선 그 선수의 파트 부분에서 이야기하도록 해보자.


우선 내가 생각하는 국가대표 스트라이커의 계보는 이회택 - 차범근 - 최순호 - 황선홍 - 안정환 - 이동국 - 박주영 라인이다. 그리고 나는 이 선수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싶다. 여태까지 대한민국을 위해 투철하게 뛰어왔으며 그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비난에 시달려야했던 국가대표 스트라이커들의 이야기들을 적어보겠다. 그러나 이회택같은 경우 자료도 많이 없고, 본인이 잘 모르는 세대이므로 제외하도록 하고, 차범근이야 역대 스페셜 등등으로 많은 이들이 알고 있으니 최순호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1. 최순호(1980~1990)




" 키가 큰 장신 공격수는 대체로 둔하고 창조성이 없다. 그러나 최순호는 그러한 개념을 깨트렸다. "


A매치 95경기 출전, 30골. 한국 스트라이커로서 차범근과 같이 한 획을 그은 전설의 공격수다. 현재 U-20 월드컵에서 김현이라는 유망주가 한국의 즐라탄과 유사하다며 그 가능성을 보고 있는데, 진정한 한국의 즐라탄은 바로 최순호가 아니였을까 싶다. 185cm 라는 엄청난 장신임에도 불구하고 속도가 뛰어났으며, 기술과 축구지능, 테크닉까지 어느하나 부족하지 않았던 최순호는 한국 축구계에서 가장 빛나지 못한 케이스가 아닐까싶다.차범근개객기


역대 한국 최고의 축구선수인 차범근 아래 가려진 최순호의 능력이 다시 재조명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당시 최순호는 세컨 스트라이커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본인이 결정지을 수 있는 뛰어난 선수였고, 신체조건이 좋아 몸싸움도 외국선수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유벤투스와 인터밀란등의 명문구단들이 몇년간 끈질기게 최순호를 영입하려 했지만, 실패한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더불어 최순호는 A매치 승률이 차범근에 이어 2위인데, 사실 차범근이 아시아권을 주로 학살했단것만을 생각한다면, 이는 놀라운 기록이다. 특히나 차범근이 있을때 한번도 꺽지못한 호주를 상대로 무패를 유지했으며, 친선경기에서 비아시아권 팀을 상대로도 꽤나 승리를 거둔것으로 ㅇ


최순호는 포항제철 축구단(현 포항 스틸러스)과 럭키금성 황소(현 FC서울그리고 배신의 서울, 이 당시에는 충청이 연고지)에서만 뛰면서, 1980-1986년까지 전성기로서 활약한 선수인데, 사실 그는 소속팀에서의 활약보다 국가대표로서의 활약이 더 뛰어나다. 최순호는 포항제철 축구단에서 4년간 55경기, 24골을 터트리며 전성기를 맞았지만, 럭키금성 황소로 이적한 뒤에는 28경기에 뛰어 2골을 기록하였다. 물론 세컨드 스트라이커로서 공격의 창조적인 모습을 불어넣었기에 좋은 모습을 보인것은 사실이다. 그이후 다시 포항제철 축구단으로 재입단하여 공격형 미드필더로, 16경기 0골을 기록하며 사실상 선수생활을 종결지었으며, 그 이후 지도자 생활을 위해 프랑스로 넘어가 프랑스 2부리그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골은 전부 리그골 기준)


최순호가 본격적으로 국가대표로서의 이름을 떨친때는 1980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서였다.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서 차범근의 차출불가로 대체 인원으로 뽑힌 최순호는 인도네시아와 타이를 상대로 각각 한골씩 기록하며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 이후 차범근을 이을 계보 스트라이커로서의 이름을 올리며 유망주의 등장을 알렸다.


그리고 1980년에 열린 AFC 아시안컵에서 본선전 4경기를 치르게 되는데, 당시 최순호는 차범근과 버금가는 활약을 펼치며 한국과 아시아를 놀라게 하였다. 당시의 경기기록은 다음과 같다.


1980년 9월 16일, 말레이시아 0 VS 1 대한민국 - 최순호 1골

1980년 9월 19일, 카타르 0 VS 2 대한민국- 최순호 1골, 이정일 1골

1980년 9월 21일, 쿠웨이트 0 VS 3 대한민국 - 최순호 2골, 손태준 1골

1980년 9월 24일, 아랍에미리트 1 VS 4 대한민국 - 최순호 3골(해트트릭), 정해원 1골


무려 본선 4경기에서 전부 골을 기록하고, 총 7골을 기록한 최순호는 말그대로 센세이션이였다. 최순호는 그 이후 결승 토너먼트 2경기(4강전, 결승전)에서도 골을 기록하진 못했지만, 좋은 움직임을 보여주었고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끌며 득점왕에 오른다. 이때가 고작 19살이였다.


그 이후에도 FIFA가 주관하는 U-20 월드컵에서 1981년, 빗장수비의 U-20 이탈리아를 상대로 2골을 넣으며 이탈리아를 놀라게 했고, 본 월드컵 예선에서도 타이를 상대로 2골을 넣었고, 좋은 위치선정으로 공격을 도우며 한국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이 월드컵 예선에서 쿠웨이트에게 패배했고, 결국 예선전에서 전승을 한 쿠웨이트가 올라가며 안타깝게도 월드컵에서 떨어지고 만다.


또한 1985년, 다시 1986년 월드컵이 찾아오기 전에 열린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서도 타이전 1골, 연이어 열린 바레인전에서 2골, 그 이후 이라크전에서도 2골을 넣으며 5골을 넣은 미친 활약을 보여주며 1986년 월드컵 예선전 엔트리에 당당히 이름에 올리는데 성공한다. 안타깝게도 1차 예선에서 직접 골을 넣진 못했지만 역시나 좋은 움직임을 보였고, 2차 예선에서 인도네시아에게 골을 넣는데 성공하였으며, 3차 예선에서 일본전때 일본진의 수비진을 흔드는 활약을 보이는 활약으로 대한민국이 FIFA 월드컵 본선에 참여하는 역사적인 순간에 함께할 수 있었다. ( 다시 말하지만 최순호는 세컨드 스트라이커의 이미지로서 좋은 패스로 창조적인 공격을 열어내는 선수였다. )


그리고 대망의 본선전이 열렸으나,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등의 강호와 만만치 않은 상대인 불가리아와 같은 조에 걸리면서 사실상 그 이상의 진출은 매우 힘들어보였다. 그나마 희망적인 부분은 차범근이 본선부터 합류한다는 부분이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벽은 높아보였다. 실제로도 불가리아전에서 1:1 무승부, 아르헨티나에게 3:1 패배, 이탈리아에게 3:2 패배를 함으로서 1무 2패로 탈락하지만, 당시 한국이 모든팀에게 골을 넣었으며, 좋은 모습을 보여준것은 한국의 이름을 빛내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최순호는 이탈리아전에서 골을 기록하는데 성공하며, 이탈리아에게 다시 한번 최순호의 이름을 세겨넣었다. 이 1986년 월드컵에서 최순호는 총 1골 3도움의 기록을 올렸으며, 그 이후 열린 1986년 아시안 게임에서도 인도전에서 1골, 인도네시아 전에서 2골을 기록하며 1986년을 빛내는 스트라이커로서 이름을 알렸다.


그 이후 1990년까지 꾸준히 국가대표에 선발되었으며, 103경기를 출전하고나서 최순호가 공식적으로 은퇴하였지만, FIFA 에서 95경기만을 인정해 센츄리클럽에서 어이없게 탈락된 일화도 있다.개불쌍


당시 최순호가 국가대표나 경기에서 뛰면서 " 너무 뛰지 않는다. 게으르기 짝이 없다. " 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명실상부 1980년대 한국 최고의 스트라이커로서 활약한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최순호 본인이 이 점에 대해서 " 비효율적이라 뛰지 않았다. 나쁘게 말하면 안뛰는 선수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 선택이 옳았다고 본다. 스트라이커는 골을 넣는데 집중해야 하기에 지금 우리 선수들에게도 불필요하게 많이 뛰지 말라고 한다. 내가 (이)동국이를 데리고 있을때 많이 움직이지말고 필요할때만 움직이라고 했다. " 라고 말하며 해명하기도 했다.




2. 황선홍(1990~2002)




" 그는 마치 베르캄프를 연상시키는 플레이를 한다. "


A매치 103경기, 50골. 한국산 폭격기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황선홍은 한국에서 가장 완성형 스트라이커로서 뽑힌다. 현재 포항 스틸러스에서 스틸타카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는 황선대원군황선홍은 현역 당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다. 빼어난 위치선정 능력으로 엄청난 득점력을 선보였으며, 뛰어난 헤딩능력과 슈팅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수비수를 여러명 끌고다님에도 불구하고, 순간속도와 특유의 지그재그 드리블로 수비수들을 벗겨낼 수 있는 스트라이커였다.


더불어 최순호가 활동량이 적었던것과는 대조적으로, 폭넓은 활동량과 뛰어난 시야능력으로 세컨트 스트라이커의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었으며, 국가대표 스트라이커로서 50골이라는 대 기록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14년이라는 기나긴 국가대표 경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은퇴하기전까지 발군의 능력을 보인것으로 유명하다. 특히나 2002년 4강 신화의 주역중 한명으로 알려져있다.


황선홍은 건국대를 졸업한 뒤, K리그 드리프트 제도를 거부하고 독일의 레버쿠젠(아마추어)차범근!로 이적하게 된다. 리그에 출장하진 못했지만 좋은 첫시즌을 보낸 황선홍은 2부리그 부퍼탈 SV로 임대되어 5경기 3골이라는 좋은 기록을 보여주며 순항하고 있었지만, 경기 도중 무릎을 다치는 부상으로 인해 시즌을 통째로 말아먹게 되고 결국 독일 생활을 접고 대한민국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 이후 K리그에서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하여 6시즌간 52경기 26골을 기록하였고,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하며 36경기 30골이라는 센세이션한 기록을 만든후, J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당시 K리그 드리프트에서 황선홍을 부르기 위해 포항 스틸러스는 무려 황선홍을 가져간 완산 푸마(전북 버팔로, 해체함)에게 4:1 트레이드를 감행하는데 그 멤버중엔 K리그 베스트를 5번이나 차지했던 노장 이흥실(사실 이흥실은 완산 푸마에서 선수겸 코치로 지도자경력을 쌓으려고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K리그 득점왕 2회를 했었던 이기근을 포함해 유승관, 이영록까지 넘겨주며 황선홍을 데리고온 일화가 있다. 현재까지 K리그에서도 4:1 트레이드는 황선홍이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그 당시 황선홍의 파급력이 어느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 이후 다시 수원으로 이적하였으나, 부상으로 정규 시즌에 뛰지 못하고 가시와 레이솔에 2년간 임대되어 34경기 12골이란 준수한 기록을 보여주었고, 이후 자유계약으로 풀려난 황선홍은 전남으로 이적하게 되지만, 다시 부상으로 인해 결국 은퇴하며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이러한 황선홍은 1988년 최순호가 국가대표의 기량으로 떨어지고 있을때쯔음 한국의 구세주로서 등장하게 된다. 건국대 출신으로 뛴 황선홍은 1998년 AFC 아시안컵에서 데뷔하였는데, 예선에서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골을 터트렸고, 본선 A조에서도 일본전에 출전해 선제골을 넣었으며, 이란전에서도 골을 기록하며 2골을 기록했고, 이러한 활약으로 1990년 월드컵 예선에 승선하게 된다.


1989년 월드컵 예선 1라운드에서 싱가포르전 2골, 말레이시아전 2골로 4골을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펼친 황선홍은 최종라운드에서도 북한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했고,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도 1골을 기록하며 총 6골로 한국의 본선 진출을 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러나 본선에서 스페인, 벨기에, 우루과이등 유럽 강호들을 상대로 대한민국은 3경기에서 황보관만이 단 한골만을 뽑아냈을 정도로 유럽의 커다란 벽을 느끼며 돌아와야했다. 그 이후 1990년 아시안게임에서도 파키스탄전에서 3골을 몰아치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좋은 활약을 보였다. ( 이때까지도 무려 프로가 아니였다. )


그리고 1994년 다시 월드컵이 찾아왔고, 황선홍은 1차 라운드 6경기에서 좋은 기회를 몇번이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골도 기록하지 못하며 골 결정력의 부재로 시달려야만 햇다. 그이후 최종 라운드에서도 4경기 연속으로 득점하지 못했고 10경기 연속 무득점을 이어가며 공격수가 받을 수 있는 비난이란 비난은 다 받았고 북한전을 상대로 1골을 넣으며 간신히 치면치레를 했다.


당시 본선 상대는 독일, 스페인, 볼리비아로서 독일, 스페인은 유럽의 강호였고 간신히 볼리비아정도와 50:50 의 전력으로 사실상 본선 진출은 매우 힘들어보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국이 스페인전에서 서정원의 90분 극장골로 2:2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하였고 볼리비아전에서 승리한다면 노력여하에 따라 본선 진출이 가능할 수 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황선홍이 볼리비아전에서 유일하게 있었던 결정적인 득점찬스에서 득점에 실패함으로서 황선홍은 국가대표 스트라이커로서 자격이 없다는 비난을 다시 한번 직면하였다.으이구불쌍


결국 볼리비아전에서도 무승부로 끝난 한국은, 독일전에서 전반 내리 3골을 먹히며 3:0 패배가 거의 확정되는듯 싶었다. 그러나 황선홍의 기적같은 52분 골에 이어, 홍명보의 62분 연속골로 분위기가 달아올랐고 3:2로 경기를 마치게 된다. 당시 독일언론은 " 결과는 독일의 승리, 그러나 경기력은 한국의 승리였다. " 라며 한국의 투혼을 인정했고 경기시간이 조금만 길었더라면 경기결과가 바뀌었을것이라고 했다. 황선홍도 이 경기에서 1골을 넣었기에 체면치레를 하며 비난여론을 잠재웠다.


그 이후 1994년 아시안게임에서 네팔전을 상대로 황선홍은 무려 8골을 뽑아내었고, 월드컵에서의 골부진여론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이 8골 기록은 한국 A매치 한경기 최다득점 기록으로 남았으며, 그 이후 오만전에서도 1골로 2-1승리를 견인하였고, 일본전에서도 2골로 3-2 승리를 견인해 아시안컵 득점왕에 수상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1996년 AFC 아시안컵에서도 아랍에미리트를 상대로 1골,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2골을 넣으면서 3경기 3골의 기록으로 8강에 진출한다. 그러나 8강에서 한국은 이란에게 6-2 패배로 8강에 만족해야만 했다.


황선홍이 이렇게 아시안게임과 아시안컵에서 다시 득점력을 회복하자, 한국은 당연히 황선홍을 1998 월드컵에 엔트리로 선발했고, 주전으로 기용될것으로 예상했었으나 안타깝게도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부상을 당함으로서중국ㅅㅂ 엔트리에 들고도 경기에 참여하지 못함으로서 안타까운 월드컵해를 보냈다. 당시 대한민국은 최용수란 걸출한 스트라이커와 이동국이란 유망주 스타를 낳았지만, 황선홍의 부재, 그리고 유럽과의 실력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본선에서 탈락한다.


황선홍은 1998 월드컵을 참가하지 못했지만, 그 이후에도 J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고 히딩크는 그러한 황선홍을 주목했다. 그리고 히딩크는 황선홍을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차출하였고, 프랑스에게 5-0으로 패배하지만 그 이후 멕시코전에서 2-1로 승리하였고 여기서 황선홍은 선제골을 넣는데 성공하였으며 그 다음 펼쳐진 오스트레일리아와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1-0 승리에 견인해 3경기 2골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만들어낸다.


그 이후 2002 월드컵 본선에서도 출전하였던 황선홍은 1라운드 D조의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으며 월드컵 본선 첫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본인에게 있어서도 국가대표 통산 50번째 골이라는 의미있는 기록을 만들어냈다. 그 이후 황선홍은 2002년 월드컵이 끝난 후 은퇴선언을 하며 국가대표 커리어에 종점을 찍었다. 


황선홍은 매우 이동국을 아낀것으로 알려져있는데, 황선홍이 2002년에 국가대표 스트라이커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해, 월드컵이 끝나고 은퇴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상당히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통한다. 


황선홍은 총 103경기를 출장하여 대한민국에서 3번째로 센츄리 클럽에 가입하였고, 그의 경기당 득점력은 현재 한국 국가대표중 가장 높은 경기당 득점률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외에도 국가대표 한경기 최다 골 기록 역시 황선홍이 가지고 있다.


황선홍은 역대 스트라이커를 잇는 계보중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골 득점력이 부진하다며 비난을 받은 아이러니한 선수다. 현재까지도 이 황선홍만큼 득점을 했던 선수는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황선홍의 50골 득점기록은 깨지기 힘들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더불어 황선홍은 현 국가대표 감독인 홍명보와 A매치에서 무려 72번이나 호흡을 맞춘것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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