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트라이커 계보, 최순호부터 박주영까지.

2013.07.25

(2) 안정환, 이동국, 박주영. 비운의 스트라이커들



3. 안정환(1998~2012)


" 안정환은 아름다운 축구를 한다. 박지성도 훌륭하지만 박지성도 안정환처럼 아름다운 축구를 할 수는 없다. "


A매치 70경기, 17골. 필드의 황태자로 불린 안정환은 아마도 최근세대가 기억하기에 가장 유명한 스트라이커중 한명이 아닐까 싶다. 2002년 월드컵 원톱으로 출전하여 기적같은 골들을 보여준 안정환은 월드컵 본선 3골로, 박지성과 같이 월드컵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중 한명으로서 당시 스트라이커중 독보적인 개인기로 아름다운 축구를 구사한 사람중 한명이다.


전형적인 스트라이커라기보다는 사실 세컨드 스트라이커 혹은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경기를 많이 뛰었고, 많은 골을 넣었던 입단 초기에도 윙포워드로 뛰었을뿐 실제로 전형적인 스코어러로서의 공격수로 뛴적은 거의 없고 세컨드 스트라이커로서 킬패스를 뿌리고 수비수들을 제치며 수비수들을 끌어내는 역할에 본인이 결정지을 수 있는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특히나 그의 개인기는 아직도 한국 최고로 뽑힐정도로 수준급의 개인기였다.


안정환은 아주대 시절부터 독보적인 존재감을 펼치며, K리그에 입단했고 1998-2000년까지 54경기에 출전해 27골을 넣으며 독보적인 존재감을 펼친다. 특히나 1999년, PK골 7골을 제외한 13골을 넣었던 시즌은 K리그 MVP를 받을 정도였다. 당시 안정환은 볼을 계속 끌면서, 수비수들을 다 제쳐버리고 골을 넣ㅇ 해설진들을 매번 당황시켰다. 매번 패스, 슛 타이밍을 놓쳤다고 판단하는 시점에 골을 터트리며 모든이들을 당황하게 했으나, 팀플레이가 부족한 이기적인 선수라고 혹평받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골이나 필드골을 넣으며 본인의 존재감을 널리 알렸다.


그 이후, AC 페루자에 임대형식으로 이적하면서 세리에A에 첫 진출한 한국인 선수가 되었고 2000-2002년동안 30경기 5골을 넣으며 활약했다. 여기엔 일화가 있는데, 2002년 당시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든골을 넣은 안정환을 보고 AC 페루자의 개싸이코쓰레기구단주가 안정환을 방출시키겠다고 하면서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 참고로 AC 페루자의 구단주는 멘탈이 씹쓰레기로 유명하다. 세리에A 에서도 독보적인 병신이였으며 여자선수를 영입하려고 하기까지 했다. 이 구단주의 병신짓들과 막장운영 덕분에 페루자는 결국 해체되었다 재창단된다. )


여기서 부산과 AC 페루자의 영입분쟁으로 안정환은 보상금으로 억대급의 빛을 지게 되고, 일본의 시미즈 에스펄스에서 이 보상금을 갚아주는 조건으로 이적해, 2002-2004년동안 38경기 14골을 넣으며 활약하였고, 그 이후 2004년에 요코하마 마리노스로 이적해 2004-2005년 34경기 16골을 넣어 우승에 일조하였다. 그 이후 2005년에 프랑스의 메스로 이적하여 16경기 2골을 넣었지만, 6개월만에 팀이 강등에 처하자 독일의 뒤스부르크로 이적하여 12경기 2골을 넣었다. 그러나 역시 뒤스부르크도 강등을 면치 못했고, 뒤스부르크는 2006년 계약을 해지하였다.


결국 6개월이나 무직 축구선수로 지내다 다시 K리그로 복귀한 안정환은 수원에서 25경기 5골을 넣었지만 전체적인 부진을 면치 못했고, 벤치신세로 몰리자 더 많은 경기를 위해 결국 친정팀인 부산 아이파크로 이적하여 26경기 6골을 넣으며 활동했다. 그러나 안정환 씨발돼지녀 사건으로 안정환은 벌금을 물기도 했고, 더불어 시즌 초에는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부상과 부진으로 끝맺음을 했다.


마지막으로 안정환은 중국의 다렌 스더로 3개월 단기이적을 하였는데, 좋은 활약을 보인 안정환은 2009년부터 2011년까지 58경기 18골을 넣으며 시즌 말미에 좋은 활약을 보였고, 2012년 공식적인 은퇴를 선언했다. 안정환은 역대 스트라이커중 가장 많은 리그(한국, 이탈리아, 일본, 프랑스, 독일, 중국)를 경험하였으며, 한국 계보를 잇는 스트라이커중 가장 비운의 생활을 보낸 스트라이커이기도 하다.


안정환은 아주대시절 1997년 한중전에서 국가대표로 데뷔하였는데, 2000년까지 국가대표로서 나쁘지 않게 활동했었다. 그리고 안정환의 역사를 뒤바꾸어줄 2002년 월드컵이 찾아오는데, 당시 히딩크는 안정환의 실력은 인정했으나 그의 얼굴이 스타성을 만들어, 선수가 연예인병에 걸릴까 안정환을 가지고 밀고당기기를 했고, 그러한 히딩크의 뜻을 알아차린 안정환은 언론을 멀리하며 실력을 보이는데 집중했고, 그 결과 히딩크는 기존의 공미였던 안정환을 원톱 스트라이커로 끌어올리며 기용한다. 기성용 이거보고 좀 배워라 이새끼야


 2002년 폴란드를 2:0으로 이긴 대한민국은 미국전에서 승리한다면 16강 진출을 거의 확정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게 선제골을 내주고 이을용이 패널티킥을 실축하며 한국은 패색이 짙었고, 이대로 패배하나 싶었으나, 안정환의 78분 기가막힌 동점골로 무승부를 유지하며 16강 진출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 이후 포르투칼전에서 박지성의 결승골로 대한민국은 2승 1무로 사상 첫 16강에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16강에서, 이탈리아를 만난 한국은 전반 3분, 패널티킥을 얻어 안정환이 찼으나 실축을 하고 말았다. 그 이후 안정환은 자신의 실책을 막기 위해 경기 내내 엄청나게 뛰어다녔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선제골로 이대로 패배하나 싶었으나, 88분 설기현의 기가막힌 동점골로 연장전에 들어갔고, 안정환은 이 연장전에서 117분, 골든골을 넣어 대한민국의 8강 진출을 이끌어냈다. 이 골로, 안정환이 패널티킥에 실축했지만, 그가 최고였다고 이끌었다. 안정환은 2013년, 정글의 법칙에 출연하여 이 패널티킥을 실축했을때, 정말 죽고싶었다고 밝혔다.


그 이후 8강의 스페인전에서도 승부차기를 성공하였고 4강전과 3,4위전에서도 최선을 다해뛰며 대한민국의 반짝 스타로 떠올랐지만, 이탈리아 구단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 이후 2004년 AFC 아시안컵에서도 이동국이라는 걸출한 스타의 득점세례속에서도 플레이를 원할하게 하고 본인 역시 아랍에미리트와 쿠웨이트를 상대로 1골씩 총 2골을 넣으며 스트라이커로서 좋은 활약을 했다.


그 이후 2006년 월드컵이 찾아왔고, 아시아 예선전에서 대한민국은 계속된 골결정력 부재로 시달리지만, 김두현등의 활약으로 본선에 진출하였고, 토고전에서 안정환은 토고의 선제골, 이천수의 동점골로 1:1 상황이던 게임에서 역전골을 넣어 토고를 이기며, 사상 첫 원전승을 이루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그 이후 안정환은 전체적인 성적 부진으로 국가대표에 거의 선발되지 못했고, 2010년 월드컵에서도 벤치를 지키면서 사실상 국가대표 커리어에 종점을 찍게 되었다. 


안정환은 무려 8개의  팀을 옮겨다녔고, 특히나 페루자에서의 마찰, 돼지녀 사건등 가장 비운의 사건을 많이 겪었던 선수로서 한국 국가대표의 계보를 잇는 선수라고 하기엔, 비운의 삶을 걸어왔지만 아직도 한국의 기억속에 안정환은 아름다운 축구를 하는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남아있다.


4. 이동국(1998~현재)


" 선수의 플레이가 화려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득점력은 크레스포를 떠올리게한다. "


A매치 99경기, 30골. 이동국은 현재 국가대표를 잇는 스트라이커중 가장 최근까지 국대에 승선했던 백전노장인 이동국은 한국의 전형적인 스코어러라고 볼 수 있다. 특유의 뛰어난 위치선정은 아직도 수준급이며, 특유의 발리슛과 터닝슛 역시 이동국의 주장기로 뽑히고 있다. 몸싸움을 크게 좋아하진 않지만, 타겟형 스트라이커로서 포스트 플레이에도 능하며 연계력이 좋은 스트라이커로 평가받고 있다.


최순호의 가르침을 받아, 필요할때만 움직이는 선수로, 여론에서는 뛰지않는 이동국이라며 비난받기도 하였다. 2009년 최강희의 선택을 받아 전북 현대 모터스에서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으며, 세컨드 스트라이커, 타겟형 스트라이커, 골 스코어러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매력적인 옵션이였다. 그렇기에 1998년부터 이동국은 아시안 대표팀, 청소년 대표팀, 올림픽 대표팀, 성인 대표팀등 거의 모든 대표팀에 참가하여 뛰기도 하였다.


이동국은 1998년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하여 고종수, 안정환과 함께 K리그 르네상스를 열며 활약한다. 포항 스틸러스에서의 좋은 활약과 대표팀에서의 활약으로 이동국은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자리매김했고, 결국 K리그 신인상까지 수상한다. 2000년도 축구협회의 주도하에 유망주들을 해외로 이적시키는 유망주 성장 작업에서 베르더 브레멘에 6개월 임대로 이적하게 되었다. 이동국은 당시 무릎부상을 재활중이였고 브레멘에서 무릎부상 재활과 적응을 하게 되었다. 브레멘에서 이동국의 부상으로 인해 선수보호차원으로 출장기회를 많이 주지 않았고, 이동국은 리그에서 7경기 0골을 기록하며 2002 월드컵 선발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포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당시 이 경력을 가지고 이동국을 비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축구에 대해 매우 무지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브레멘의 공격진은 아이우톤과 피사로로 이동국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을 뿐더러, 이동국은 경기를 뛰기위해 브레멘에 임대간것이 아니였다. 축협의 주도하에 선진축구를 배우고, 경험하는 자리였기에 이것을 가지고, 이동국을 비난하는건 매우 멍청한 행위나 다름이 없다.


그 이후 포항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이미 국가대표에서 혹사당한 이동국의 몸상태는 국가대표에 어울리지 않았으며, 더불어 활동량이 적은 이동국을 거스 히딩크는 선발시키지 않았고, 이동국은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병역 혜택을 받지 못한 이동국은 2003년 다행히 상주로 복무하여 축구선수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46경기 12골이라는 준수한 기록을 낳았으며 플레이 스타일도 적극적으로 바꾸는 등 많은 노력을 하며 2006년 월드컵에 승선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그 이후 2006년 월드컵 예선에서의 활약으로 이동국은 2007년 1월 미들즈브러로 이적료 0원에 이적하게 되며, (당시 포항은 한국축구를 위해 이동국의 이적료를 받지 않았다.) K리그에서 프리미어리그로 바로 입성한 첫번째 한국인 선수가 된다. 초기에는 인상적인 모습을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2008년까지 리그 23경기에서 0개의 골을 기록하였고, FA컵과 리그컵에서 1골씩 총 2골을 기록하여 부진을 면치 못했고 더선에서 발표한 최악의 공격수로 뽑히기도 하였다. 결국 이동국과 미들즈브러는 2008년 결국 상호계약해지되었다.


그 이후 다시 K리그로 돌아온 이동국은 상위권의 성남 천마 일화로 이적했지만, 10경기 2골이란 부진한 기록을 낳았고, 신태용이 성남의 감독으로 돌아오며 전력에서 배제되는 등 이대로 이동국은 끝나는것만 같았다. 그러나 마침 전북에서 조재진의 일본진출로 스트라이커의 부재가 있었고 최강희는 과감히 이동국을 트레이드한다. ( 이동국, 심상식 <-> 문대성, 홍진섭 ) 당시 최강희의 무리수라며 부진한 스트라이커를 영입하려는것을 전북의 팬들은 원치 않았으나 최강희는 본인의 뜻대로 이동국을 영입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적한 2009년, 29경기 20골로 K리그 득점왕에 차지했다. K리그에서 4번째로 20골 이상 득점왕에 선정되었으며 이러한 놀라운 활약에 K리그 MVP를 받게 된다. 이러한 활약으로 2010년 월드컵에 승선한 이동국은 2010년 리그에서 전 시즌보다 부진한 28경기 12골로 한시즌만 반짝하고 이제 끝나는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다. 그러나 2011년 29경기 16골 15도움으로 1경기당 1이 넘는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였고, 도움왕을 수상하여 K리그 역대 최초로 신인상, 득점왕, 도움왕, MVP 의 4개 개인타이틀을 전부 석권하는데 성공하였고 K리그 베스트 11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MVP와 득점왕을 수상하였다.


그 이후 2012년, 34경기 22골로 다시한번 K리그 득점2위에 올랐고 K리그 베스트 11에 포함되었으며 K리그 사상 최다 골 신기록을 세우는데 성공하였으며 2014 월드컵 예선 엔트리에 선발되는등 제 2의 전성기를 펼쳤고, 2013년에서도 독보적인 득점력으로 득점1위에 랭크하고 있으며, 7경기 연속골의 대기록을 작성하였고, 아직도 이동국이 현역이며 경기감각이 죽지 않는것으로 볼때 이동국이 K리그에서 더 뛸 수 있다고 판단되고 있다. 이제 이동국이 골을 넣는것이 새로운 신기록 수립이 되고 있으며, 이러한 이동국의 기록은 앞으로 K리그에서 쉽게 깨지지 않을것으로 예측된다.


이동국은 국가대표에 1998년 자메이카와의 친선경기에서 황선홍의 교체카드로 출전하여 짧은 출전시간에도 불구하고 좋은 모습을 보이며 A매치에 데뷔하였다.. 그 이후 1998 월드컵에서 5-0으로 지고있던 네덜란드전에서 강력한 중거리슛으로 월드컵 스타로 떠올랐다. 그 이후 1998 아시안 게임에서 6경기 연속 주전으로 활용되었지만 안타깝게도 A매치 데뷔골을 넣진 못했었다. 그 이후 2000년 골든컵에서 코스타리카를 상대로 첫 A매치 골을 넣으며 코스타리카전의 무승부에 일조하였다.


그 이후 2000년 아시안컵에서 중국전과 쿠웨이트 전에서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지만, 인도네시아전에서 3골로 해트트릭을 터트리며 독보적인 골감각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조 3위였지만, 다승점인 한국이 8강에 올랐고 이란과의 8강전에서 이란에게 71분골로 패배가 확정되던 순간 김상식이 90분에 기적같은 동점골을 넣었고, 연장전에서 이동국이 골든볼을 넣어 이란을 상대로 역전하는 기염을 터트렸다. 그 이후 사우디 아라비아에게 76, 80분 연속 2골을 내리먹혀 패배가 확정되던 순간에서도, 90분에 한골을 넣어 한국의 체면치레를 하게 해주었다.


그 이후 2001년에도 친선경기에서 나이지리아전 1골로 A매치 기간에 거의 모든경기에 참가하면서 2002년 월드컵에 당연히 승선할것이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2002년 골드컵에서 3경기 전부 득점하지 못했고, 한일 월드컵이 다가온 시점에서 열린 친선경기 5경기에서도 바레인전에서만 1골을 기록하면서 갑작스런 부진이 찾아왔다. 당시 이 부진은 대부분의 국대경기에 차출되면서 혹사된 무릎때문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이동국은 대부분의 국가대표전을 치루면서 무릎과 다리에 붕대를 풀고 경기한것을 보기 힘들정도로 계속된 혹사가 시작되었다.


그 이후 결국 무릎의 부상으로 떨어진 경기력과 부진한 골 결정력, 낮은 활동력을 이유로 거스 히딩크는 계속 주전으로 실험하던 이동국을 과감히 엔트리에 제외했고, 이동국은 이 충격으로 술을 마시며 신음한다. 이동국은 이 이후 마음을 단단히 먹고, 활동량을 늘려나갔으며 리그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 결과 2004년 AFC 아시안컵에서 기용받았고 요르단과의 0:0 무승부 이후 아랍에미리트 전에서 선제골을 넣어 2-0 승리에 기여한다. 그 다음 쿠웨이트전에서도 내리 연속 2골을 기록하며 부진에 대한 오명을 씻었다. 그 이후 8강 이란전에서도 1골을 기록하지만 대한민국은 이란에게 3-4로 패하고만다.


이러한 2004년 AFC 아시안컵에서 대활약으로 2006년 월드컵 예선전에 기용된 이동국은 2차 예선 6경기중 3경기에서 중용받았고, 베트남전과 몰디브 전에서 골을 넣으며 활약했다. 예외로 몰디브전에선 좀 많은 기회를 날려 무승부를 하게 한 장본인으로 비난받기도 하였다. 그 이후 열린 3차 예선에서도 6경기중 5경기를 중용받으며, 쿠웨이트전에서 홈과 원정에서 전부 1골,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도 홈에서 1골을 넣어 총 3골을 기록해 원정에서 무려 5골을 넣음으로서 대한민국을 2006 월드컵 본선으로 올려놓는데 큰 활약을 하며 본프레레호의 황태자로 불렸다.


월드컵 예선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한 이동국은 2005 동아시아컵에서도 중용되었으나 3경기 전부 골을 넣지 못했고, 결국 한국은 조 최하위로 탈락하였고, 그 이후 2006년 독일월드컵이 오기전까지 9경기의 친선경기에서 단 2골만을 넣었으며 칼스버그컵과 아시안컵 예선전에서도 골을 기록하지 못하며 다시 골부진의 시대가 찾아왔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2006년 독일월드컵을 앞두고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당하며, 독일 월드컵에서도 뛰지 못했고 결국 독일 월드컵에서 뛰지 못해 2002년에 이어 2006년까지 월드컵 본선 출전이 좌절되었다. 그 이후 2007년 AFC 아시안컵에서 차출되었으나, 5경기 전부 득점하지 못했고 그 이후, 음주 파동으로 국가대표 1년간 출전 금지, 대한축구협회 주관 대회 2년간 출전 금지를 받으며 국가대표의 생을 마감하는듯 했다.


그러나 2009년 중징계 기간이 끝나고, 이동국이 2009년 전북으로 이적하여 K리그 득점왕을 수상할 수준에 오르자 여론은 이동국을 다시 재발탁해야한다고 했고, 허정무 대표팀 감독은 " 이동국은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야한다 " (에펨에서 본 대산데?) 라고 말했다. 그리고 허정무 감독은 이동국을 친선경기에 다시 중용하지 시작했고, 처음 7경기에선 단 한골도 기록하지 못하며 골 결정력 부재에 시달려야만 했으나, 2010년 동아시아컵에서 3경기 전부 출전하여 홍콩과 일본을 상대로 1골씩을 기록해 2골을 넣어 동아시안컵 득점왕에 뽑혔고, 이은 런던에서의 코트디부아르전에서도 1골을 넣으며 몰아치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그 이후 2010 월드컵을 앞둔 에콰도르전에서 이동국이 부상을 당하며, 출전이 불투명했으나 허정무는 이동국을 엔트리에 포함시키기로 하였고, 이동국은 2010년 월드컵에 무임승차를 하게 되었다. 그 이후 아르헨티나전에서 13분을 뛰면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고, 우루과이전에서도 후반전 15분에 교체출전하였다. 그러나 우루과이전에서 박지성이 준 완벽한 1:1찬스에서 물회오리슛을 하며, 전국민에게 카페베네슛을 선보였고 그 이후 이동국의 국가대표 여론은 완벽하게 돌아섰다.


그 이후 조광래 감독이 들어섰고, 이동국은 조광래에게 미움을 받았다. 인터뷰에서 위협적이지 않은 공격수라며 이동국을 비난하던 조광래는 이동국을 절대 차출하지 않았고, 이동국의 국가대표 커리어가 드디어 여기서 마감하는듯 했다. 그러나 2011년 K리그 도움왕을 수상하고 아챔에서도 MVP와 득점왕을 차지하자 여론은 다시 한번 이동국을 발탁해야한다고 했고, 아니꼬왔던 조광래는 이동국을 발탁하긴 하였지만 본래 전략이 아닌 3톱 전략으로 시작해 그중 한명으로 출전시켜 후반전에 바로 교체시켰고, 그 이후에도 출전기회는 10분 미만으로 조광래에게 사실상 버림받은 존재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조광래가 레바논전 단 한경기 졸전으로 쫒겨나고 최강희가 국가대표 감독으로 올라서면서, 이동국은 다시 한번 최강희에게 부름을 받았다. 당시 최강희는 2009년 사실상 스트라이커의 커리어를 끝낼것으로 보였던 이동국을 득점왕으로 만들며 제 2의 전성기를 구가시킨 장본인이였기에 이동국의 국가대표 여론에서도 이동국의 활약을 기대했다. 실제로 우즈베키스탄과의 친선전에서 2골을 기록함으로서 최강희의 믿음에 보답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이후 있었던 2014 월드컵 예선에서 쿠웨이트전에서도 1골을 넣음으로서 이동국의 부활을 예고했지만, 스페인과의 친선경기, 월드컵 예선에서의 카타르와 레바논전, 잠비아의 친선경기, 이렇게 총 4경기에서 연속 무득점을 하며 다시 한번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다행히 우즈베키스탄과의 예선전에서 1골을 기록하고, 호주와의 평가전에서도 1골을 기록하며 비난여론을 잠재우는듯 싶었지만, 그 이후 크로아티전과 예선전 4경기 연속 총 5경기에서 다시 무득점을 하면서 이동국에 대한 국가대표 비난여론은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그 이후 최강희 감독이 사임하고, 홍명보호가 시작되었으나 홍명보호에선 이동국을 엔트리에 포함시키지 않아 이동국의 국대 커리어는 사실상 끝나는것으로 예상되고, A매치 100경기정도만 채워질 수 있을것으로 모든이들이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히딩크가 안정환을 두고 밀고당기기를 했듯, 홍명보호 역시 이동국을 밀고당기기하는것이라고도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는것으로 보아 정확한것은 FIFA 월드컵 본선 이전의 친선경기에서 갈려질것으로 보인다.



이동국은 역대 국가대표 스트라이커중 가장 몰아치기를 잘했던 선수로 기억되있으며, 상당히 많은 경기를 무득점으로 보냈기에 그만큼 많은 비난을 받았다. 다른말로 하면 일관성이 부족한 선수이기도 했고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이동국의 대한 자질을 비난하고 있지만, 국가대표에서 많은 경기에서 혹사당한만큼 그의 노력은 인정받아야한다.




5. 박주영(2005~현재)


" 박주영이 대한민국의 슈퍼스타인 이유는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


여러분이 가장 잘 알고있는 국가대표 스트라이커가 누군가? 라고 물으면 아마도 다수의 지지를 받는건 바로 이 박주영이 아닐까 싶다. 축구천재로 잘 알려진 박주영은 바로 언론이 만들어준 최고의 스타선수중 한명이다. 그러나 한템포 빠른 공격감각, 과단성 있는 슈팅, 감각적인 위치선정으로 실제로 엄청난 활약을 펼쳤던 박주영이기에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것이 아닐까 싶다. A매치 60경기 출전의 23골이란 준수한 기록을 보이고 있는것도 완벽한 사실이고말이다.


감각적인 위치선정으로 수비벽라인을 허물고 공격진으로 들어가는 감각은 아직도 한국 최고수준으로 알려져있으며, 쉐도우 스트라이커로서의 역할도 청대에서 수행해 좋은 결과를 창출해낸적이 있다. 본래 빠른 드리블과 좋은 패스능력도 지니고 있었던 박주영이였으나, 모나코에 이적이후 드리블능력과 패스능력이 많이 떨어지고 타게터와 스코어러의 모습이 많이 오른 모습이지만 일본전 각시탈 골은 그의 감각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박주영의 클럽역사는 통수배신으로 상당히 유명하다. 청대시절의 활약으로 2001년 포항 스틸러스에서 5천만원을 지원해 브라질 유학을 가면서 포항 스틸러스와 계약 우선권을 약속했으나, 2004년 서울과 계약하면서 포항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고, K리그 드리프트제를 부활시킨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2005년 FC서울로 데뷔한 박주영은 첫 시즌 리그 12골을 몰아치며, K리그 득점순위 2위에 K리그 최초 만장일치로 신인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부진이 거듭되어, 2006년은 26경기 7득점에 머물렀고, 2007년엔 고작 11경기 2득점에 그쳤다. 2008년에도 별 다를 필요 없이 13경기 2골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국가대표에서 훌륭한 모습을 보인 박주영을 주목한 프랑스 리그1의 모나코는 32억에 박주영을 영입한다. 게다가 무려 첫 출장에 1골 1도움이라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모나코에서 첫시즌 31경기출장 5골 6도움이라는 괜찮은 기록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 이후 2009-2010년에도, 27경기에 출장해 7득점을 했고 2010-2011시즌에는 무려 33경기 출장 12골을 기록하며 해외5대리그에서 두자릿수 득점을 하는 기염을 토해내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박주영의 팀인 모나코는 강등에 쳐했고 박주영은 이적을 모색했다. 가장 유력한 구단은 같은 리그의 릴로서 프랑스 리그1 챔피언이였다. 메디컬 테스트까지 끝낸 박주영은 사실상 계약이 확정되는듯 싶었으나, 벵거의 전화를 받은 박주영은 계약을 앞두고 영국으로 떠나 아스날에서 메디컬 테스트를 받고 통수입단하였다. 이에 대해 릴은 하이재킹 논란을 알리며 박주영을 매우 비난하였다.


박주영은 아스널로 이적해 9번을 부여받으며 활약을 기대했다. 당시 3옵션 공격수였던 박주영은 유리몸이였던 반페르시를 위해 영입되었고, 실제로 많은 경기에 출전할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반페르시의 미친듯한 활약으로 박주영의 입지가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결국 아스날에 1년동안 리그에서 단 7분만을 뛰어보았고, FA컵 3경기에서 1골, 챔피언스리그 2경기에서 0골로 6경기 1골을 기록하며 최악의 시즌을 보내며 리저브 팀으로 이동되었다.


결국 2012-2013시즌 부활을 위해 스페인의 셀타 비고로 임대하였고, 데뷔전에서 골을 기록했으나 그 이후 급격한 골결정력 부재에 시달렸다. 게다가 셀타 비고의 감독이 경질되고, 새 감독이 들어오자 박주영을 공격수 최하위옵션으로 판단하였고, 실제로도 22경기 출전 3골이란 나쁜 기록을 하게 되었다. 특히 후반 4경기에서 많은 기회를 얻은 박주영이 득점하지 못해, 박주영은 셀타비고에서 사실상 전력외로 분류되었고, 시즌 최종전에서도 박주영은 무단불참하기도 했다.


그 이후 아스널로 돌아왔으나, 계약 해지를 통보받아 사실상 무직 선수가 되었다. 한국의 국가대표로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그외에도 병역 비리로도 한국인에게 많은 욕을 먹어왔고, 역대 한국 스트라이커로서의 자격문제가 많이 운운되어왔다. 한국이 만들어낸 인조스타의 한계점을 드러낸 박주영이지만, 그래도 그가 국가대표를 위해 뛰어온것은 비난해선 안된다.


박주영의 국가대표 커리어는 청소년때부터 시작된다. 카타르대회에서 양민학살을 하면서 모습을 드러낸 박주영은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에서도 득점왕을 하며 화려한 스타의 시작을 알렸다. 특히나 중국인 수비수들을 제치고 넣은 슛은 아직도 회자될정도로 박주영의 능력을 알려주는 골이였다. 2005년 서울에 입단하면서 성인 대표팀에서도 모습을 드러낸 박주영은, 2006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우즈베키스탄에게 0-1로 지고 있었던 경기에서 동점골을 넣으며 동점을 만들었고, 같은 예선전에서 쿠웨이트전에서도 선제골을 넣으며 4-0 승리에 일조하는등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 외에도 그리스, 핀란드등의 팀과의 친선경기에서도 1골씩 기록하며 1-1, 1-0을 만들어내며 한국에서 득점을 만들어낼 수 있는 선수로 떠올랐다. 그 이후에서도 국대에 자주 승선하였고, 특히 2008년 동아시아컵에서 중국에 선제골을 넣으면서 2년만에 다시 득점포를 열었다. 그러나 중국의 투혼으로 2-1로 다시 한국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으나, 곧바로 박주영이 동점골을 기록하면서 2골을 기록해 최종적으로 한국이 3-2로 승리하게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결과로 동아시아컵에서 한국이 2번째로 우승하는데 일조하였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2008년에 2010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 다시 승선하였고, 시드배정에서 요르단을 상대로 홈과 원정에서 1골씩 2골을 기록하며 월드컵에서 서브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을 알렸고, 교체경기에서 출전한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 1골을 넣으면서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아랍에미리트에선 드디어 선발로 출전하여 5분만에 골을 기록해 승리에 기여하였다. 이 이후 본격적인 주전으로 활동한 박주영은 B조 경기에 전부 선발출전하여 나이지리아전에서 1골을 넣어 무승부에 일조하여 조2위로 16강에 진출하지만, 이동국의 우루과이 물회오리전슛과 박주영의 무득점으로 안타깝게도 16강에서 만족해야만 했다.


그 이후에도 2010 아시안게임에서도 예선 3경기에 출전하여 팔레스테인을 상대로 1골을 기록했고, 16강전 중국과의 경기에서도 1골을 기록하며 승리를 이끌었다. 또한 8강전에서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도 1:1 연장전상황에서 1골을 넣어 승리를 확정지었으며 활약했으나 4강에서 아랍에미리트에게 연장전 후반 추가시간에 득점을 허용함으로서 안타깝게 패배하고 말았다.


2011년에는 2014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을 위해 참여했으며, 첫경기인 레바논전에서 3골을 넣어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시작을 승리로 이끌고, 쿠웨이트전에서도 선제골로 무승부에 일조했다. 이은 아랍에미리트전과의 홈경기에서도 선제골, 원정경기에서도 쐐기골을 박으며 A매치 4연속 골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박주영의 병역 비리가 이때쯤 대두되었고, 최강희는 박주영에게 이를 해명하는것이 좋겠다고 이야기했으나 박주영은 묵묵부답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더불어 소속팀에서 출전기회까지 잡지못한 박주영은 결국 최강희의 플랜에서 서서히 제외되기 시작하며 국가대표 커리어로서 끝나는듯 싶었다. 그러나 2012 런던올림픽이 열렸고, 홍명보는 자신의 팀의 원톱으로 박주영을 원했고, 병역비리를 감싸며 와일드카드로 박주영을 차출하였다.


그 결과 조별리그에서 스위선때 기가막힌 선제골을 기록하며 대한민국의 승리를 이끌었고 나머지 2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해 조 2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8강에서는 무려 영국을 만나며 석패를 당할것이라 예상했으나 오히려 한국은 지동원의 선제골로 리드했고, 결국 영국을 승부차기 끝에 이기며 기적적으로 4강에 올라가게 되었다. 4강에선 강팀 브라질을 만나며 전반전에서 비등비등한 모습을 연출하였으나, 내리 연속 3골을 먹히며 브라질에게 패배하였고 3,4위 전에서 일본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박주영은 일본 수비수 4명을 제치고 선제골을 만들어냄으로서 승리를 일조해 일본을 누르고 3위에 오르는데 성공하였다.


그 이후 국가대표에 승선하진 못하였지만, 홍명보가 박주영을 신뢰하고 있기에 박주영의 국가대표 승선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박주영이 여러가지 많은 분쟁을 만들었고, 국가대표로서 올바른 멘탈을 소유하고 있지 많다는 여론도 높으므로 아직까지 박주영의 승선이 무조건 좋다고 생각할 순 없다. 그러나 박주영이 국가대표에 떠나고나서 한국의 스트라이커 계보가 끊긴 지금, 박주영의 부활은 필요하게 될 수 도 있다.




마치며..


참 아이러니한점이 있다. 이러한 국가대표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잇는 선수들이 활약할때도 매번 우리나라에게 요구되었던건 골 결정력이였다. 하지만 그때도 분명 여기 소개된 스트라이커, 그리고 소개받지 못했던 최용수나 조재진등 많은 국가대표 스트라이커들은 골을 만들어왔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은 월드컵 8회 본선 진출이라는 대 업적을 이루었으며, 각종 아시아 국제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었던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박주영 이후로 스트라이커 계보가 끊어져버린 지금, 대한민국은 절실할정도로 골이 필요해졌다. 최강희호 최근 3경기 예선전과 홍명보호 2경기에서 스트라이커의 득점이 하나도 없다는건 큰일날 일이다. 한때 이동국이 10경기 연속 무득점을 하며 이러한 상황을 맞이했지만, 조재진 등의 스트라이커가 그것을 매꾸어왔다. 


하지만 이젠 그런것을 매꿀만할 스트라이커가 없다. 이제야 유럽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손흥민은 아직까지 국가대표 경험이 부족하고, 아시안팀을 상대로 할때 아시안팀의 촘촘한 수비로 본인의 장기인 돌파가 어렵다. 지동원 역시 선더랜드에서 많은 경기를 뛰지 못했고, 이제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간신히 경기감각을 찾는 시점이다. 유병수는 어느덧 국가대표 승선에서 더이상 가망성이 없어보이고, 김신욱은 A매치 20경기에 가까운 출전을 했으나 단 한골만을 넣어봤을뿐이다. 


앞으로 누가 이 국가대표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이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필요하다. 그러한 스트라이커가 말이다. 역대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이었던 선수들은 매번 비난받아왔다. 그러한 비난을 감당할 수 있으며 한국의 부족한 골 결정력을 상향시켜줄 스트라이커, 이제 우리는 그 스트라이커를 찾아야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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