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표 7인의 원톱 경쟁 백서.

2013.11.10


최근 한준이 스페인 대표 7인의 원톱 경쟁 백서라는 칼럼을 작성했다. 디에구 코스타라는 걸출한 스트라이커가 브라질 국가대표를 포기하고, 스페인 국가대표로 들어가며 원톱의 경쟁이 가열되었기 때문이다. 코스타의 국가대표 선택으로 부진했던 토레스, 비야 등의 스트라이커들이 부활의 신호탄을 올리며 스페인의 원톱은 다시 재경쟁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가 걱정해야 할것은, 머나먼 유럽땅에 있는 스페인의 원톱이 아니다. 항상 스페인의 원톱의 무게감에 대해 이야기해왔지만, 그들의 최하옵션도, 우리 한국에겐 최고의 옵션이 될정도로 기량이 출중하다. 그들의 원톱걱정은 어찌보면 말도 안되는 걱정인 셈이다. 문제는 우리나라다. 매년 우리나라는 02년 안정환, 06년 조재진과 이동국 등 월드컵에서 출중한 기량의 스트라이커를 기용할 수 있었으나 이번 월드컵은 그렇지 않다.


아직도 한국의 원톱은 결정나지 않았고, 그 윤곽조차 크게 좁혀지지 않고 있다. 원 스피릿(One Spirit), 원골(One Goal)을 강조하며 탄탄한 수비력과 단 한개의 골로 승부를 결정짓는 축구로 월드컵에서 좋은 결과를 내려는 한국은 One Goal 을 넣어줄 스트라이커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한국의 원톱 스트라이커 후보에는 누가 있을까.


꾸준한 출전을 하지 않으면 뽑지 않겠다는 홍명보의 원칙, 그리고 홍명보가 좋아하는 선수들을 고려하여 대표 7인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박주영

1985년생, 28세, 아스날 FC(잉글랜드)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의 주역으로 잘 알려진 선수다. 아스날로 이적하기 전까지는 많은 출전 기회를 얻으며, 미래의 주전 원톱으로 성장할것이란 기대를 받았지만, 아스날로 이적한 이후 출전 기회가 없어지면서 선수로서의 위기에 직면해있다. 지난 시즌 셀타 비고로 이적하였으나 저조한 기록으로 선수로서의 감각과 실력이 많이 떨어져있다는 평이다. 이러한 박주영의 상황이 한국 원톱의 부재를 낳기도 했다. 


아직 박주영은 위기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홍명보가 가장 아끼는 애제자로서, 런던 올림픽 당시 군면제 논란에 있었던 박주영 대신 군대를 간다고 발언하며 자신의 제자를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박주영도 이번 겨울시장에서도 주전경쟁이 어둡다면 임대등을 통해 많은 출전을 보장받으려 노력할것이라고 뉘앙스를 풍겼으며, 홍명보도 박주영에게 임대를 권유했다. 


이렇게 홍명보가 아끼고 관리하는 만큼, 주전 기회를 얻게 된다면 가장 유력한 원톱 후보로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 홍명보호는 사실 박주영의 원톱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주영의 포스트 플레이를 통한 좋은 연계, 2선으로 내려가는 활동량. 특히나 순간적으로 오프사이드를 허무는 감각적인 침투는 가히 한국 최강이라 부를 수 있다. 


문제는 감각이다. 2년동안 셀타 비고 임대를 제외한다면, 실전경기를 뛰지 못했다. 더불어 군 면제 논란이나 하이재킹 등 국내에서 이미지가 좋지 않은 박주영의 차출이 대표팀을 흔들리게 할 수도 있단 점 역시 단점으로 작용한다.



이동국

1979년, 34세, 전북 현대 모터스(한국)


1998년 월드컵에서 강렬한 중거리포로 등장한 이동국은 브라질 월드컵 본선 견인까지 무려 15년동안 국가대표를 위해 뛴 헌신적인 선수로 유명하다. 이제 노쇠하면서 기량이 떨어진다는 점에서는 많은 이들이 동감하는 부분이지만, 여전히 K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며 전북의 상위권을 이끌었다. 하지만 홍명보가 이동국을 국가대표로서 전혀 고려하지 않다는 점에서는 이동국에게 악재가 될 수 있다.


이동국은 서서히 선수로서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홍명보의 원칙에 딱 들어맞는 선수이기도 한데, 리그에서 꾸준히 출전하고 있으며,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기에, 원칙을 고수하는 홍명보가 최종옵션으로 고려해봤을법 하다. 장기부상으로 시즌 아웃이 될것으로 우려했으나, 다행히 최근 울산전과의 경기에 출전해 골을 기록할뻔 하기도 했다. 오심으로 무효가 되긴 했지만.


이동국의 장점은 뛰어난 연계력이다. 직접 골을 해결짓는 능력도 뛰어나지만, 최강희호에서 보여준 포스트 플레이와 연계력, 그리고 공간 창출 능력은 알아줄만하다.  무엇보다 A매치 99경기 출전, 30골이라는 기록으로 현재 원톱 후보중 가장 출중한 A매치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동국 본인으로서도 본선에서 주전 스트라이커로 영광을 누려본적이 없기에, 마지막 월드컵을 위해 헌신할 자세가 되어있을것이다.



김신욱

1988년생, 25세, 울산 현대 축구단(한국)


현재 K리그 득점 선두를 달리며, 울산의 리그 1위를 견인하고 있는 김신욱. 최강희 호에서 뻥축구의 중심이 되면서 전봇대라는 별명까지 붙으며 수많은 욕을 얻어먹은 선수다. 그 당시만 해도 국내용이라는 비난이 어마어마했으나, 본인이 부족한 점을 빨리 깨닫고 꾸준히 훈련하고 노력한 결과, 자신의 단점인 발속도를 어느정도 극복해냈고, 활동량을 넓히며 연계력까지 업그레이드시켰으며, 기존에도 탁월했던 발재간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홍명보호에 승선하는데 성공했다.


역시 홍명보호의 원칙에 걸맞는 선수인데다가, 울산에서도 순도 높은 골을 자랑하며 홍명보호의 부재인 One Goal 을 넣어줄 스트라이커의 대안책으로서 떠오르고 있다. 울산의 철퇴축구와 비슷한 이념을 가졌기 때문에 본인의 적응도 수월할것이라 생각된다. 더불어 기존보다 활동량을 폭넓게 넓히며 중원까지 내려와 볼배급을 하며 연계력이 더욱 업그레이드 되었기에, 홍명보호의 원톱으로서 가장 적합하다고 평가하고싶다. 


문제점은 김신욱이라는 선수의 전술적 단순함이다. 기본적으로 발재간이 뛰어나고 속도도 갖추는데 성공했지만, 다른 선수들이 여전히 김신욱에게 머리로만 공을 보내주려한다면 의미가 없다. 다른 선수들도 빨리 김신욱을 파악하고,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할 수만 있다면 좋은 대안책이 될 수 있다.



손흥민

1992년생, 21세, 바이엘 04 레버쿠젠(독일)


해트트릭 손! Kia~~ 국뽕에 취한다!! ...아니 아무튼 현재 한국 최고의 재능으로 차붐의 후예라 불리는 손흥민은 국대에서도 이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위치는 바로 측면 공격수인데, 그 이유는 홍명보호가 원하는 원톱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주영처럼 포스트 플레이에 능하며 넓은 활동량으로 공을 배급해 연계시켜줄 공격수를 원하는 홍명보의 원톱체제에 손흥민이 적합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더불어 손흥민의 폭발적인 골 결정력을 살리기 위해서도 원톱보다 측면으로 내놓은것이라 생각한다.


올해 레버쿠젠으로 이적해 클럽에서 공격 삼각편대로 활동하며, 가장 부진하단 평을 받고 있지만 함부르크전에서 3골 1도움으로 한국인 최초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다시 한번 희망의 불씨를 살리고 있다. 손흥민의 원톱 체제의 가장 큰 장점은 포지션 경쟁의 최소화다. 무슨 이야기인고하니, 포지션 위치가 겹치는 구자철과 김보경을 공존하게 할 수 있단 이야기다. 현재 손흥민이 왼쪽 측면, 이청용이 오른쪽 측면을 뛰게 된다면 하나의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를 두고 두 선수가 경쟁해야만 한다. 하지만 손흥민이 올라간다면 그 점이 해결되기에 한국 최고의 재능을 가진 선수들을 전부 뛰게 할 수 있다.


단점은 연계력과 제공권, 그리고 원톱으로서의 부담감정도가 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 포스트 플레이에 능한 선수를 중요시하는 홍명보이기에 손흥민은 기본적인 전제조건에서 밀린다. 더불어 소속팀에서도 불안한 활약감을 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국대에서도 좋은 활약을 하지 못한다면 선수에게 지나친 부담감을 안게할 수 있다. 홍명보도 그 점을 충분히 고려해 원톱으로 사용할지 고심할것이다.



지동원

1991년생, 22세, 선더랜드 AFC(잉글랜드)


선더랜드에서 뛰고 있는 지동원은 홍명보가 가장 많이 실험해본 원톱 옵션중 하나다. 준수한 제공권 능력과 연계력. 분데스리가 후반기에 보여준 골 결정력 등을 고려해 계속 실험해봤으나 여태까지 이렇다할 활약을 보이지 못한게 사실이다. 클럽에서도 주전경쟁에서 밀리며, 서서히 벤치로 밀려나고 있기에 본인 스스로 그 능력을 입증해야만 한다.


사실 지동원 본인이 자신의 스타일을 잘 찾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제공권도, 발재간도, 공간발견과 창출 능력도 준수하지만, 어느 하나 뛰어나지 못하다. 약팀을 상대로는 즐라탄과도 같은 다재다능한 선수지만, 강팀을 상대로는 이도저도 아닌 선수로 보일 수 있기에, 자신의 강점을 발견하고 그 점을 클럽 감독에게 어필하는게 중요하다. 그렇게해서 홍명보의 원칙을 위해서라도 출전해야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의 지동원에게서 미래는 그리 밝아보이지 않다.


어찌되었건, 홍명보가 박주영을 뽑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다시 한번 실험해볼 지동원의 원톱이기에 예의주시해야한다. 홍명보가 런던올림픽 멤버들을 중용하는 상황이기에, 지동원의 실력만 돌아온다면 월드컵에서 뛸 영광을 누릴 가능성은 충분하다.



김동섭

1989년생, 24세, 성남 일화 천마(한국)


런던올림픽때부터 홍명보의 아이들로서 유명했던 김동섭이다. 특히나 이번시즌 7경기 연속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며 13골을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다. 국대에서도 초기에 승선되는 등 희망을 보인 김동섭이지만, 올림픽 때와 달리 좋은 모습을 계속 보이지 못했다. 호주전만큼의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지 못한 김동섭은 결국, 국대 엔트리에서 제외되며 조급함만 앞서고 있는 상황이다.


김동섭의 장점은 큰 키와 스피드, 그리고 뛰어난 연계력을 들 수 있다. 홍명보호가 가장 원하는 유형의 선수이며, 원칙에서도 맞는다. 소속팀에서 꾸준히 출전하고 있다. 다만 문제점은 조급함이다. 최근 들어 홍명보호에 승선하지 못하고, 김신욱이 스피드 면을 해결했다는 점에서도 김동섭은 매우 초조해졌나보다.


김동섭은 하위 스플릿으로 내려간 이후, 단 2골밖에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했고, 본인에게 있어서도 2개월 연속 공격포인트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불필요한 반칙으로 공격의 흐름을 끊는 등 조급함만 앞서고 있다. 김동섭은 좀 더 침착하게 자신의 강점을 서서히 살려나가야 한다.


런던올림픽의 주역, 홍명보의 아이들이니만큼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현재로서 원톱 경쟁에서 멀어져가고 있는 안타까운 선수다.



이근호

1985년생, 28세, 상주 상무 피닉스(한국)


한국의 메시. 대한민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에 매년 지대한 공을 세웠던 이근호다. 무엇보다 최근 국대에 승선해 미친듯한 능력을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놀라운 공간창출과 활동량은 홍명보의 맘에 쏙 들었을 법하며, 새로 떠오르는 원톱의 별이 될 수 있다. 한때 유럽 진출에 실패하며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현재 마음을 다잡고 뒤는 그의 실력은 한국에 꼭 필요한 인재다.


이근호는 원톱으로서 국대에서는 엄청난 활동량으로 그라운드의 개처럼 뛰어다닌다. 중앙, 측면, 최전방을 수없이 오고가며 공을 배급하고 공간을 창출하며 연계하는데 주력한다. 문제는 득점력인데 K리그 첼린지에서 좋은 득점력을 보이고 있지만, 국가대표에선 최근 경기에서는 과거와 달리 좋은 득점 기횔 아쉽게 놓치는 등 부족한 면을 보였다. 


하지만 현재 이근호의 모습은 분명 인상적이고, 그가 들어올때마다 한국 공격진의 공격전개 레벨이 달라진다는 점을 우리는 꾸준히 봐왔기에, 충분히 원톱으로서 브라질까지 꾸준히 주전경쟁을 할것이라 보인다.


대한민국 스트라이커 계보, 최순호부터 박주영까지.

2013.07.05


(1) 최순호, 황선홍, 그들이 달려온 길.


최강희 감독이 월드컵 본선에 팀을 올려놓고 사임한지 벌써 한달이 지났고, 홍명보호가 지난 동아시아컵에서 호주전을 기점으로 출항한뒤로 홍명보호가 2번째 경기를 치루었다. 최강희 감독의 마지막 월드컵 예선 3경기부터 홍명보호 2경기까지 찾아오는 5경기동안의 득점력 부재는 한국 스트라이커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한다. 


예전부터 한국의 득점력 부재는 항상 있어왔던 일이고, 그 점을 이란주먹감자년이 비꼬는 용도로 사용할 정도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스트라이커의 계보가 끝이 나버렸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매년 한두명의 스트라이커가 독보적인 시즌을 펼치며 득점력부재의 한국을 구출해왔다. 그러나 스트라이커 계보가 박주영 이후로 끊겨버린 이후, 어떠한 스트라이커도 그 계보에 들 실력은 보이지 않고있다.


그렇다면 여태까지 대한민국의 득점력부재를 구출하고, 국가대표에서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이어왔던 선수들은 누굴까. 대체로 많은 논쟁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 이회택 - 차범근 - 최순호 - 황선홍 - 안정환(or 최용수) - 이동국(or 조재진) - 박주영 " 라인으로 보고 있다. 가장 논쟁이 되는 선수는 이동국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에 대해선 그 선수의 파트 부분에서 이야기하도록 해보자.


우선 내가 생각하는 국가대표 스트라이커의 계보는 이회택 - 차범근 - 최순호 - 황선홍 - 안정환 - 이동국 - 박주영 라인이다. 그리고 나는 이 선수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싶다. 여태까지 대한민국을 위해 투철하게 뛰어왔으며 그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비난에 시달려야했던 국가대표 스트라이커들의 이야기들을 적어보겠다. 그러나 이회택같은 경우 자료도 많이 없고, 본인이 잘 모르는 세대이므로 제외하도록 하고, 차범근이야 역대 스페셜 등등으로 많은 이들이 알고 있으니 최순호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1. 최순호(1980~1990)




" 키가 큰 장신 공격수는 대체로 둔하고 창조성이 없다. 그러나 최순호는 그러한 개념을 깨트렸다. "


A매치 95경기 출전, 30골. 한국 스트라이커로서 차범근과 같이 한 획을 그은 전설의 공격수다. 현재 U-20 월드컵에서 김현이라는 유망주가 한국의 즐라탄과 유사하다며 그 가능성을 보고 있는데, 진정한 한국의 즐라탄은 바로 최순호가 아니였을까 싶다. 185cm 라는 엄청난 장신임에도 불구하고 속도가 뛰어났으며, 기술과 축구지능, 테크닉까지 어느하나 부족하지 않았던 최순호는 한국 축구계에서 가장 빛나지 못한 케이스가 아닐까싶다.차범근개객기


역대 한국 최고의 축구선수인 차범근 아래 가려진 최순호의 능력이 다시 재조명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당시 최순호는 세컨 스트라이커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본인이 결정지을 수 있는 뛰어난 선수였고, 신체조건이 좋아 몸싸움도 외국선수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유벤투스와 인터밀란등의 명문구단들이 몇년간 끈질기게 최순호를 영입하려 했지만, 실패한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더불어 최순호는 A매치 승률이 차범근에 이어 2위인데, 사실 차범근이 아시아권을 주로 학살했단것만을 생각한다면, 이는 놀라운 기록이다. 특히나 차범근이 있을때 한번도 꺽지못한 호주를 상대로 무패를 유지했으며, 친선경기에서 비아시아권 팀을 상대로도 꽤나 승리를 거둔것으로 ㅇ


최순호는 포항제철 축구단(현 포항 스틸러스)과 럭키금성 황소(현 FC서울그리고 배신의 서울, 이 당시에는 충청이 연고지)에서만 뛰면서, 1980-1986년까지 전성기로서 활약한 선수인데, 사실 그는 소속팀에서의 활약보다 국가대표로서의 활약이 더 뛰어나다. 최순호는 포항제철 축구단에서 4년간 55경기, 24골을 터트리며 전성기를 맞았지만, 럭키금성 황소로 이적한 뒤에는 28경기에 뛰어 2골을 기록하였다. 물론 세컨드 스트라이커로서 공격의 창조적인 모습을 불어넣었기에 좋은 모습을 보인것은 사실이다. 그이후 다시 포항제철 축구단으로 재입단하여 공격형 미드필더로, 16경기 0골을 기록하며 사실상 선수생활을 종결지었으며, 그 이후 지도자 생활을 위해 프랑스로 넘어가 프랑스 2부리그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골은 전부 리그골 기준)


최순호가 본격적으로 국가대표로서의 이름을 떨친때는 1980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서였다.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서 차범근의 차출불가로 대체 인원으로 뽑힌 최순호는 인도네시아와 타이를 상대로 각각 한골씩 기록하며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 이후 차범근을 이을 계보 스트라이커로서의 이름을 올리며 유망주의 등장을 알렸다.


그리고 1980년에 열린 AFC 아시안컵에서 본선전 4경기를 치르게 되는데, 당시 최순호는 차범근과 버금가는 활약을 펼치며 한국과 아시아를 놀라게 하였다. 당시의 경기기록은 다음과 같다.


1980년 9월 16일, 말레이시아 0 VS 1 대한민국 - 최순호 1골

1980년 9월 19일, 카타르 0 VS 2 대한민국- 최순호 1골, 이정일 1골

1980년 9월 21일, 쿠웨이트 0 VS 3 대한민국 - 최순호 2골, 손태준 1골

1980년 9월 24일, 아랍에미리트 1 VS 4 대한민국 - 최순호 3골(해트트릭), 정해원 1골


무려 본선 4경기에서 전부 골을 기록하고, 총 7골을 기록한 최순호는 말그대로 센세이션이였다. 최순호는 그 이후 결승 토너먼트 2경기(4강전, 결승전)에서도 골을 기록하진 못했지만, 좋은 움직임을 보여주었고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끌며 득점왕에 오른다. 이때가 고작 19살이였다.


그 이후에도 FIFA가 주관하는 U-20 월드컵에서 1981년, 빗장수비의 U-20 이탈리아를 상대로 2골을 넣으며 이탈리아를 놀라게 했고, 본 월드컵 예선에서도 타이를 상대로 2골을 넣었고, 좋은 위치선정으로 공격을 도우며 한국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이 월드컵 예선에서 쿠웨이트에게 패배했고, 결국 예선전에서 전승을 한 쿠웨이트가 올라가며 안타깝게도 월드컵에서 떨어지고 만다.


또한 1985년, 다시 1986년 월드컵이 찾아오기 전에 열린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서도 타이전 1골, 연이어 열린 바레인전에서 2골, 그 이후 이라크전에서도 2골을 넣으며 5골을 넣은 미친 활약을 보여주며 1986년 월드컵 예선전 엔트리에 당당히 이름에 올리는데 성공한다. 안타깝게도 1차 예선에서 직접 골을 넣진 못했지만 역시나 좋은 움직임을 보였고, 2차 예선에서 인도네시아에게 골을 넣는데 성공하였으며, 3차 예선에서 일본전때 일본진의 수비진을 흔드는 활약을 보이는 활약으로 대한민국이 FIFA 월드컵 본선에 참여하는 역사적인 순간에 함께할 수 있었다. ( 다시 말하지만 최순호는 세컨드 스트라이커의 이미지로서 좋은 패스로 창조적인 공격을 열어내는 선수였다. )


그리고 대망의 본선전이 열렸으나,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등의 강호와 만만치 않은 상대인 불가리아와 같은 조에 걸리면서 사실상 그 이상의 진출은 매우 힘들어보였다. 그나마 희망적인 부분은 차범근이 본선부터 합류한다는 부분이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벽은 높아보였다. 실제로도 불가리아전에서 1:1 무승부, 아르헨티나에게 3:1 패배, 이탈리아에게 3:2 패배를 함으로서 1무 2패로 탈락하지만, 당시 한국이 모든팀에게 골을 넣었으며, 좋은 모습을 보여준것은 한국의 이름을 빛내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최순호는 이탈리아전에서 골을 기록하는데 성공하며, 이탈리아에게 다시 한번 최순호의 이름을 세겨넣었다. 이 1986년 월드컵에서 최순호는 총 1골 3도움의 기록을 올렸으며, 그 이후 열린 1986년 아시안 게임에서도 인도전에서 1골, 인도네시아 전에서 2골을 기록하며 1986년을 빛내는 스트라이커로서 이름을 알렸다.


그 이후 1990년까지 꾸준히 국가대표에 선발되었으며, 103경기를 출전하고나서 최순호가 공식적으로 은퇴하였지만, FIFA 에서 95경기만을 인정해 센츄리클럽에서 어이없게 탈락된 일화도 있다.개불쌍


당시 최순호가 국가대표나 경기에서 뛰면서 " 너무 뛰지 않는다. 게으르기 짝이 없다. " 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명실상부 1980년대 한국 최고의 스트라이커로서 활약한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최순호 본인이 이 점에 대해서 " 비효율적이라 뛰지 않았다. 나쁘게 말하면 안뛰는 선수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 선택이 옳았다고 본다. 스트라이커는 골을 넣는데 집중해야 하기에 지금 우리 선수들에게도 불필요하게 많이 뛰지 말라고 한다. 내가 (이)동국이를 데리고 있을때 많이 움직이지말고 필요할때만 움직이라고 했다. " 라고 말하며 해명하기도 했다.




2. 황선홍(1990~2002)




" 그는 마치 베르캄프를 연상시키는 플레이를 한다. "


A매치 103경기, 50골. 한국산 폭격기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황선홍은 한국에서 가장 완성형 스트라이커로서 뽑힌다. 현재 포항 스틸러스에서 스틸타카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는 황선대원군황선홍은 현역 당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다. 빼어난 위치선정 능력으로 엄청난 득점력을 선보였으며, 뛰어난 헤딩능력과 슈팅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수비수를 여러명 끌고다님에도 불구하고, 순간속도와 특유의 지그재그 드리블로 수비수들을 벗겨낼 수 있는 스트라이커였다.


더불어 최순호가 활동량이 적었던것과는 대조적으로, 폭넓은 활동량과 뛰어난 시야능력으로 세컨트 스트라이커의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었으며, 국가대표 스트라이커로서 50골이라는 대 기록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14년이라는 기나긴 국가대표 경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은퇴하기전까지 발군의 능력을 보인것으로 유명하다. 특히나 2002년 4강 신화의 주역중 한명으로 알려져있다.


황선홍은 건국대를 졸업한 뒤, K리그 드리프트 제도를 거부하고 독일의 레버쿠젠(아마추어)차범근!로 이적하게 된다. 리그에 출장하진 못했지만 좋은 첫시즌을 보낸 황선홍은 2부리그 부퍼탈 SV로 임대되어 5경기 3골이라는 좋은 기록을 보여주며 순항하고 있었지만, 경기 도중 무릎을 다치는 부상으로 인해 시즌을 통째로 말아먹게 되고 결국 독일 생활을 접고 대한민국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 이후 K리그에서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하여 6시즌간 52경기 26골을 기록하였고,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하며 36경기 30골이라는 센세이션한 기록을 만든후, J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당시 K리그 드리프트에서 황선홍을 부르기 위해 포항 스틸러스는 무려 황선홍을 가져간 완산 푸마(전북 버팔로, 해체함)에게 4:1 트레이드를 감행하는데 그 멤버중엔 K리그 베스트를 5번이나 차지했던 노장 이흥실(사실 이흥실은 완산 푸마에서 선수겸 코치로 지도자경력을 쌓으려고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K리그 득점왕 2회를 했었던 이기근을 포함해 유승관, 이영록까지 넘겨주며 황선홍을 데리고온 일화가 있다. 현재까지 K리그에서도 4:1 트레이드는 황선홍이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그 당시 황선홍의 파급력이 어느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 이후 다시 수원으로 이적하였으나, 부상으로 정규 시즌에 뛰지 못하고 가시와 레이솔에 2년간 임대되어 34경기 12골이란 준수한 기록을 보여주었고, 이후 자유계약으로 풀려난 황선홍은 전남으로 이적하게 되지만, 다시 부상으로 인해 결국 은퇴하며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이러한 황선홍은 1988년 최순호가 국가대표의 기량으로 떨어지고 있을때쯔음 한국의 구세주로서 등장하게 된다. 건국대 출신으로 뛴 황선홍은 1998년 AFC 아시안컵에서 데뷔하였는데, 예선에서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골을 터트렸고, 본선 A조에서도 일본전에 출전해 선제골을 넣었으며, 이란전에서도 골을 기록하며 2골을 기록했고, 이러한 활약으로 1990년 월드컵 예선에 승선하게 된다.


1989년 월드컵 예선 1라운드에서 싱가포르전 2골, 말레이시아전 2골로 4골을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펼친 황선홍은 최종라운드에서도 북한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했고,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도 1골을 기록하며 총 6골로 한국의 본선 진출을 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러나 본선에서 스페인, 벨기에, 우루과이등 유럽 강호들을 상대로 대한민국은 3경기에서 황보관만이 단 한골만을 뽑아냈을 정도로 유럽의 커다란 벽을 느끼며 돌아와야했다. 그 이후 1990년 아시안게임에서도 파키스탄전에서 3골을 몰아치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좋은 활약을 보였다. ( 이때까지도 무려 프로가 아니였다. )


그리고 1994년 다시 월드컵이 찾아왔고, 황선홍은 1차 라운드 6경기에서 좋은 기회를 몇번이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골도 기록하지 못하며 골 결정력의 부재로 시달려야만 햇다. 그이후 최종 라운드에서도 4경기 연속으로 득점하지 못했고 10경기 연속 무득점을 이어가며 공격수가 받을 수 있는 비난이란 비난은 다 받았고 북한전을 상대로 1골을 넣으며 간신히 치면치레를 했다.


당시 본선 상대는 독일, 스페인, 볼리비아로서 독일, 스페인은 유럽의 강호였고 간신히 볼리비아정도와 50:50 의 전력으로 사실상 본선 진출은 매우 힘들어보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국이 스페인전에서 서정원의 90분 극장골로 2:2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하였고 볼리비아전에서 승리한다면 노력여하에 따라 본선 진출이 가능할 수 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황선홍이 볼리비아전에서 유일하게 있었던 결정적인 득점찬스에서 득점에 실패함으로서 황선홍은 국가대표 스트라이커로서 자격이 없다는 비난을 다시 한번 직면하였다.으이구불쌍


결국 볼리비아전에서도 무승부로 끝난 한국은, 독일전에서 전반 내리 3골을 먹히며 3:0 패배가 거의 확정되는듯 싶었다. 그러나 황선홍의 기적같은 52분 골에 이어, 홍명보의 62분 연속골로 분위기가 달아올랐고 3:2로 경기를 마치게 된다. 당시 독일언론은 " 결과는 독일의 승리, 그러나 경기력은 한국의 승리였다. " 라며 한국의 투혼을 인정했고 경기시간이 조금만 길었더라면 경기결과가 바뀌었을것이라고 했다. 황선홍도 이 경기에서 1골을 넣었기에 체면치레를 하며 비난여론을 잠재웠다.


그 이후 1994년 아시안게임에서 네팔전을 상대로 황선홍은 무려 8골을 뽑아내었고, 월드컵에서의 골부진여론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이 8골 기록은 한국 A매치 한경기 최다득점 기록으로 남았으며, 그 이후 오만전에서도 1골로 2-1승리를 견인하였고, 일본전에서도 2골로 3-2 승리를 견인해 아시안컵 득점왕에 수상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1996년 AFC 아시안컵에서도 아랍에미리트를 상대로 1골,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2골을 넣으면서 3경기 3골의 기록으로 8강에 진출한다. 그러나 8강에서 한국은 이란에게 6-2 패배로 8강에 만족해야만 했다.


황선홍이 이렇게 아시안게임과 아시안컵에서 다시 득점력을 회복하자, 한국은 당연히 황선홍을 1998 월드컵에 엔트리로 선발했고, 주전으로 기용될것으로 예상했었으나 안타깝게도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부상을 당함으로서중국ㅅㅂ 엔트리에 들고도 경기에 참여하지 못함으로서 안타까운 월드컵해를 보냈다. 당시 대한민국은 최용수란 걸출한 스트라이커와 이동국이란 유망주 스타를 낳았지만, 황선홍의 부재, 그리고 유럽과의 실력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본선에서 탈락한다.


황선홍은 1998 월드컵을 참가하지 못했지만, 그 이후에도 J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고 히딩크는 그러한 황선홍을 주목했다. 그리고 히딩크는 황선홍을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차출하였고, 프랑스에게 5-0으로 패배하지만 그 이후 멕시코전에서 2-1로 승리하였고 여기서 황선홍은 선제골을 넣는데 성공하였으며 그 다음 펼쳐진 오스트레일리아와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1-0 승리에 견인해 3경기 2골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만들어낸다.


그 이후 2002 월드컵 본선에서도 출전하였던 황선홍은 1라운드 D조의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으며 월드컵 본선 첫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본인에게 있어서도 국가대표 통산 50번째 골이라는 의미있는 기록을 만들어냈다. 그 이후 황선홍은 2002년 월드컵이 끝난 후 은퇴선언을 하며 국가대표 커리어에 종점을 찍었다. 


황선홍은 매우 이동국을 아낀것으로 알려져있는데, 황선홍이 2002년에 국가대표 스트라이커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해, 월드컵이 끝나고 은퇴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상당히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통한다. 


황선홍은 총 103경기를 출장하여 대한민국에서 3번째로 센츄리 클럽에 가입하였고, 그의 경기당 득점력은 현재 한국 국가대표중 가장 높은 경기당 득점률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외에도 국가대표 한경기 최다 골 기록 역시 황선홍이 가지고 있다.


황선홍은 역대 스트라이커를 잇는 계보중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골 득점력이 부진하다며 비난을 받은 아이러니한 선수다. 현재까지도 이 황선홍만큼 득점을 했던 선수는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황선홍의 50골 득점기록은 깨지기 힘들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더불어 황선홍은 현 국가대표 감독인 홍명보와 A매치에서 무려 72번이나 호흡을 맞춘것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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