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표 7인의 원톱 경쟁 백서.

2013.11.10


최근 한준이 스페인 대표 7인의 원톱 경쟁 백서라는 칼럼을 작성했다. 디에구 코스타라는 걸출한 스트라이커가 브라질 국가대표를 포기하고, 스페인 국가대표로 들어가며 원톱의 경쟁이 가열되었기 때문이다. 코스타의 국가대표 선택으로 부진했던 토레스, 비야 등의 스트라이커들이 부활의 신호탄을 올리며 스페인의 원톱은 다시 재경쟁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가 걱정해야 할것은, 머나먼 유럽땅에 있는 스페인의 원톱이 아니다. 항상 스페인의 원톱의 무게감에 대해 이야기해왔지만, 그들의 최하옵션도, 우리 한국에겐 최고의 옵션이 될정도로 기량이 출중하다. 그들의 원톱걱정은 어찌보면 말도 안되는 걱정인 셈이다. 문제는 우리나라다. 매년 우리나라는 02년 안정환, 06년 조재진과 이동국 등 월드컵에서 출중한 기량의 스트라이커를 기용할 수 있었으나 이번 월드컵은 그렇지 않다.


아직도 한국의 원톱은 결정나지 않았고, 그 윤곽조차 크게 좁혀지지 않고 있다. 원 스피릿(One Spirit), 원골(One Goal)을 강조하며 탄탄한 수비력과 단 한개의 골로 승부를 결정짓는 축구로 월드컵에서 좋은 결과를 내려는 한국은 One Goal 을 넣어줄 스트라이커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한국의 원톱 스트라이커 후보에는 누가 있을까.


꾸준한 출전을 하지 않으면 뽑지 않겠다는 홍명보의 원칙, 그리고 홍명보가 좋아하는 선수들을 고려하여 대표 7인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박주영

1985년생, 28세, 아스날 FC(잉글랜드)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의 주역으로 잘 알려진 선수다. 아스날로 이적하기 전까지는 많은 출전 기회를 얻으며, 미래의 주전 원톱으로 성장할것이란 기대를 받았지만, 아스날로 이적한 이후 출전 기회가 없어지면서 선수로서의 위기에 직면해있다. 지난 시즌 셀타 비고로 이적하였으나 저조한 기록으로 선수로서의 감각과 실력이 많이 떨어져있다는 평이다. 이러한 박주영의 상황이 한국 원톱의 부재를 낳기도 했다. 


아직 박주영은 위기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홍명보가 가장 아끼는 애제자로서, 런던 올림픽 당시 군면제 논란에 있었던 박주영 대신 군대를 간다고 발언하며 자신의 제자를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박주영도 이번 겨울시장에서도 주전경쟁이 어둡다면 임대등을 통해 많은 출전을 보장받으려 노력할것이라고 뉘앙스를 풍겼으며, 홍명보도 박주영에게 임대를 권유했다. 


이렇게 홍명보가 아끼고 관리하는 만큼, 주전 기회를 얻게 된다면 가장 유력한 원톱 후보로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 홍명보호는 사실 박주영의 원톱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주영의 포스트 플레이를 통한 좋은 연계, 2선으로 내려가는 활동량. 특히나 순간적으로 오프사이드를 허무는 감각적인 침투는 가히 한국 최강이라 부를 수 있다. 


문제는 감각이다. 2년동안 셀타 비고 임대를 제외한다면, 실전경기를 뛰지 못했다. 더불어 군 면제 논란이나 하이재킹 등 국내에서 이미지가 좋지 않은 박주영의 차출이 대표팀을 흔들리게 할 수도 있단 점 역시 단점으로 작용한다.



이동국

1979년, 34세, 전북 현대 모터스(한국)


1998년 월드컵에서 강렬한 중거리포로 등장한 이동국은 브라질 월드컵 본선 견인까지 무려 15년동안 국가대표를 위해 뛴 헌신적인 선수로 유명하다. 이제 노쇠하면서 기량이 떨어진다는 점에서는 많은 이들이 동감하는 부분이지만, 여전히 K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며 전북의 상위권을 이끌었다. 하지만 홍명보가 이동국을 국가대표로서 전혀 고려하지 않다는 점에서는 이동국에게 악재가 될 수 있다.


이동국은 서서히 선수로서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홍명보의 원칙에 딱 들어맞는 선수이기도 한데, 리그에서 꾸준히 출전하고 있으며,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기에, 원칙을 고수하는 홍명보가 최종옵션으로 고려해봤을법 하다. 장기부상으로 시즌 아웃이 될것으로 우려했으나, 다행히 최근 울산전과의 경기에 출전해 골을 기록할뻔 하기도 했다. 오심으로 무효가 되긴 했지만.


이동국의 장점은 뛰어난 연계력이다. 직접 골을 해결짓는 능력도 뛰어나지만, 최강희호에서 보여준 포스트 플레이와 연계력, 그리고 공간 창출 능력은 알아줄만하다.  무엇보다 A매치 99경기 출전, 30골이라는 기록으로 현재 원톱 후보중 가장 출중한 A매치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동국 본인으로서도 본선에서 주전 스트라이커로 영광을 누려본적이 없기에, 마지막 월드컵을 위해 헌신할 자세가 되어있을것이다.



김신욱

1988년생, 25세, 울산 현대 축구단(한국)


현재 K리그 득점 선두를 달리며, 울산의 리그 1위를 견인하고 있는 김신욱. 최강희 호에서 뻥축구의 중심이 되면서 전봇대라는 별명까지 붙으며 수많은 욕을 얻어먹은 선수다. 그 당시만 해도 국내용이라는 비난이 어마어마했으나, 본인이 부족한 점을 빨리 깨닫고 꾸준히 훈련하고 노력한 결과, 자신의 단점인 발속도를 어느정도 극복해냈고, 활동량을 넓히며 연계력까지 업그레이드시켰으며, 기존에도 탁월했던 발재간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홍명보호에 승선하는데 성공했다.


역시 홍명보호의 원칙에 걸맞는 선수인데다가, 울산에서도 순도 높은 골을 자랑하며 홍명보호의 부재인 One Goal 을 넣어줄 스트라이커의 대안책으로서 떠오르고 있다. 울산의 철퇴축구와 비슷한 이념을 가졌기 때문에 본인의 적응도 수월할것이라 생각된다. 더불어 기존보다 활동량을 폭넓게 넓히며 중원까지 내려와 볼배급을 하며 연계력이 더욱 업그레이드 되었기에, 홍명보호의 원톱으로서 가장 적합하다고 평가하고싶다. 


문제점은 김신욱이라는 선수의 전술적 단순함이다. 기본적으로 발재간이 뛰어나고 속도도 갖추는데 성공했지만, 다른 선수들이 여전히 김신욱에게 머리로만 공을 보내주려한다면 의미가 없다. 다른 선수들도 빨리 김신욱을 파악하고,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할 수만 있다면 좋은 대안책이 될 수 있다.



손흥민

1992년생, 21세, 바이엘 04 레버쿠젠(독일)


해트트릭 손! Kia~~ 국뽕에 취한다!! ...아니 아무튼 현재 한국 최고의 재능으로 차붐의 후예라 불리는 손흥민은 국대에서도 이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위치는 바로 측면 공격수인데, 그 이유는 홍명보호가 원하는 원톱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주영처럼 포스트 플레이에 능하며 넓은 활동량으로 공을 배급해 연계시켜줄 공격수를 원하는 홍명보의 원톱체제에 손흥민이 적합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더불어 손흥민의 폭발적인 골 결정력을 살리기 위해서도 원톱보다 측면으로 내놓은것이라 생각한다.


올해 레버쿠젠으로 이적해 클럽에서 공격 삼각편대로 활동하며, 가장 부진하단 평을 받고 있지만 함부르크전에서 3골 1도움으로 한국인 최초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다시 한번 희망의 불씨를 살리고 있다. 손흥민의 원톱 체제의 가장 큰 장점은 포지션 경쟁의 최소화다. 무슨 이야기인고하니, 포지션 위치가 겹치는 구자철과 김보경을 공존하게 할 수 있단 이야기다. 현재 손흥민이 왼쪽 측면, 이청용이 오른쪽 측면을 뛰게 된다면 하나의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를 두고 두 선수가 경쟁해야만 한다. 하지만 손흥민이 올라간다면 그 점이 해결되기에 한국 최고의 재능을 가진 선수들을 전부 뛰게 할 수 있다.


단점은 연계력과 제공권, 그리고 원톱으로서의 부담감정도가 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 포스트 플레이에 능한 선수를 중요시하는 홍명보이기에 손흥민은 기본적인 전제조건에서 밀린다. 더불어 소속팀에서도 불안한 활약감을 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국대에서도 좋은 활약을 하지 못한다면 선수에게 지나친 부담감을 안게할 수 있다. 홍명보도 그 점을 충분히 고려해 원톱으로 사용할지 고심할것이다.



지동원

1991년생, 22세, 선더랜드 AFC(잉글랜드)


선더랜드에서 뛰고 있는 지동원은 홍명보가 가장 많이 실험해본 원톱 옵션중 하나다. 준수한 제공권 능력과 연계력. 분데스리가 후반기에 보여준 골 결정력 등을 고려해 계속 실험해봤으나 여태까지 이렇다할 활약을 보이지 못한게 사실이다. 클럽에서도 주전경쟁에서 밀리며, 서서히 벤치로 밀려나고 있기에 본인 스스로 그 능력을 입증해야만 한다.


사실 지동원 본인이 자신의 스타일을 잘 찾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제공권도, 발재간도, 공간발견과 창출 능력도 준수하지만, 어느 하나 뛰어나지 못하다. 약팀을 상대로는 즐라탄과도 같은 다재다능한 선수지만, 강팀을 상대로는 이도저도 아닌 선수로 보일 수 있기에, 자신의 강점을 발견하고 그 점을 클럽 감독에게 어필하는게 중요하다. 그렇게해서 홍명보의 원칙을 위해서라도 출전해야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의 지동원에게서 미래는 그리 밝아보이지 않다.


어찌되었건, 홍명보가 박주영을 뽑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다시 한번 실험해볼 지동원의 원톱이기에 예의주시해야한다. 홍명보가 런던올림픽 멤버들을 중용하는 상황이기에, 지동원의 실력만 돌아온다면 월드컵에서 뛸 영광을 누릴 가능성은 충분하다.



김동섭

1989년생, 24세, 성남 일화 천마(한국)


런던올림픽때부터 홍명보의 아이들로서 유명했던 김동섭이다. 특히나 이번시즌 7경기 연속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며 13골을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다. 국대에서도 초기에 승선되는 등 희망을 보인 김동섭이지만, 올림픽 때와 달리 좋은 모습을 계속 보이지 못했다. 호주전만큼의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지 못한 김동섭은 결국, 국대 엔트리에서 제외되며 조급함만 앞서고 있는 상황이다.


김동섭의 장점은 큰 키와 스피드, 그리고 뛰어난 연계력을 들 수 있다. 홍명보호가 가장 원하는 유형의 선수이며, 원칙에서도 맞는다. 소속팀에서 꾸준히 출전하고 있다. 다만 문제점은 조급함이다. 최근 들어 홍명보호에 승선하지 못하고, 김신욱이 스피드 면을 해결했다는 점에서도 김동섭은 매우 초조해졌나보다.


김동섭은 하위 스플릿으로 내려간 이후, 단 2골밖에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했고, 본인에게 있어서도 2개월 연속 공격포인트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불필요한 반칙으로 공격의 흐름을 끊는 등 조급함만 앞서고 있다. 김동섭은 좀 더 침착하게 자신의 강점을 서서히 살려나가야 한다.


런던올림픽의 주역, 홍명보의 아이들이니만큼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현재로서 원톱 경쟁에서 멀어져가고 있는 안타까운 선수다.



이근호

1985년생, 28세, 상주 상무 피닉스(한국)


한국의 메시. 대한민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에 매년 지대한 공을 세웠던 이근호다. 무엇보다 최근 국대에 승선해 미친듯한 능력을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놀라운 공간창출과 활동량은 홍명보의 맘에 쏙 들었을 법하며, 새로 떠오르는 원톱의 별이 될 수 있다. 한때 유럽 진출에 실패하며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현재 마음을 다잡고 뒤는 그의 실력은 한국에 꼭 필요한 인재다.


이근호는 원톱으로서 국대에서는 엄청난 활동량으로 그라운드의 개처럼 뛰어다닌다. 중앙, 측면, 최전방을 수없이 오고가며 공을 배급하고 공간을 창출하며 연계하는데 주력한다. 문제는 득점력인데 K리그 첼린지에서 좋은 득점력을 보이고 있지만, 국가대표에선 최근 경기에서는 과거와 달리 좋은 득점 기횔 아쉽게 놓치는 등 부족한 면을 보였다. 


하지만 현재 이근호의 모습은 분명 인상적이고, 그가 들어올때마다 한국 공격진의 공격전개 레벨이 달라진다는 점을 우리는 꾸준히 봐왔기에, 충분히 원톱으로서 브라질까지 꾸준히 주전경쟁을 할것이라 보인다.

대한민국 스트라이커 계보, 최순호부터 박주영까지.

2013.07.25

(2) 안정환, 이동국, 박주영. 비운의 스트라이커들



3. 안정환(1998~2012)


" 안정환은 아름다운 축구를 한다. 박지성도 훌륭하지만 박지성도 안정환처럼 아름다운 축구를 할 수는 없다. "


A매치 70경기, 17골. 필드의 황태자로 불린 안정환은 아마도 최근세대가 기억하기에 가장 유명한 스트라이커중 한명이 아닐까 싶다. 2002년 월드컵 원톱으로 출전하여 기적같은 골들을 보여준 안정환은 월드컵 본선 3골로, 박지성과 같이 월드컵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중 한명으로서 당시 스트라이커중 독보적인 개인기로 아름다운 축구를 구사한 사람중 한명이다.


전형적인 스트라이커라기보다는 사실 세컨드 스트라이커 혹은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경기를 많이 뛰었고, 많은 골을 넣었던 입단 초기에도 윙포워드로 뛰었을뿐 실제로 전형적인 스코어러로서의 공격수로 뛴적은 거의 없고 세컨드 스트라이커로서 킬패스를 뿌리고 수비수들을 제치며 수비수들을 끌어내는 역할에 본인이 결정지을 수 있는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특히나 그의 개인기는 아직도 한국 최고로 뽑힐정도로 수준급의 개인기였다.


안정환은 아주대 시절부터 독보적인 존재감을 펼치며, K리그에 입단했고 1998-2000년까지 54경기에 출전해 27골을 넣으며 독보적인 존재감을 펼친다. 특히나 1999년, PK골 7골을 제외한 13골을 넣었던 시즌은 K리그 MVP를 받을 정도였다. 당시 안정환은 볼을 계속 끌면서, 수비수들을 다 제쳐버리고 골을 넣ㅇ 해설진들을 매번 당황시켰다. 매번 패스, 슛 타이밍을 놓쳤다고 판단하는 시점에 골을 터트리며 모든이들을 당황하게 했으나, 팀플레이가 부족한 이기적인 선수라고 혹평받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골이나 필드골을 넣으며 본인의 존재감을 널리 알렸다.


그 이후, AC 페루자에 임대형식으로 이적하면서 세리에A에 첫 진출한 한국인 선수가 되었고 2000-2002년동안 30경기 5골을 넣으며 활약했다. 여기엔 일화가 있는데, 2002년 당시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든골을 넣은 안정환을 보고 AC 페루자의 개싸이코쓰레기구단주가 안정환을 방출시키겠다고 하면서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 참고로 AC 페루자의 구단주는 멘탈이 씹쓰레기로 유명하다. 세리에A 에서도 독보적인 병신이였으며 여자선수를 영입하려고 하기까지 했다. 이 구단주의 병신짓들과 막장운영 덕분에 페루자는 결국 해체되었다 재창단된다. )


여기서 부산과 AC 페루자의 영입분쟁으로 안정환은 보상금으로 억대급의 빛을 지게 되고, 일본의 시미즈 에스펄스에서 이 보상금을 갚아주는 조건으로 이적해, 2002-2004년동안 38경기 14골을 넣으며 활약하였고, 그 이후 2004년에 요코하마 마리노스로 이적해 2004-2005년 34경기 16골을 넣어 우승에 일조하였다. 그 이후 2005년에 프랑스의 메스로 이적하여 16경기 2골을 넣었지만, 6개월만에 팀이 강등에 처하자 독일의 뒤스부르크로 이적하여 12경기 2골을 넣었다. 그러나 역시 뒤스부르크도 강등을 면치 못했고, 뒤스부르크는 2006년 계약을 해지하였다.


결국 6개월이나 무직 축구선수로 지내다 다시 K리그로 복귀한 안정환은 수원에서 25경기 5골을 넣었지만 전체적인 부진을 면치 못했고, 벤치신세로 몰리자 더 많은 경기를 위해 결국 친정팀인 부산 아이파크로 이적하여 26경기 6골을 넣으며 활동했다. 그러나 안정환 씨발돼지녀 사건으로 안정환은 벌금을 물기도 했고, 더불어 시즌 초에는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부상과 부진으로 끝맺음을 했다.


마지막으로 안정환은 중국의 다렌 스더로 3개월 단기이적을 하였는데, 좋은 활약을 보인 안정환은 2009년부터 2011년까지 58경기 18골을 넣으며 시즌 말미에 좋은 활약을 보였고, 2012년 공식적인 은퇴를 선언했다. 안정환은 역대 스트라이커중 가장 많은 리그(한국, 이탈리아, 일본, 프랑스, 독일, 중국)를 경험하였으며, 한국 계보를 잇는 스트라이커중 가장 비운의 생활을 보낸 스트라이커이기도 하다.


안정환은 아주대시절 1997년 한중전에서 국가대표로 데뷔하였는데, 2000년까지 국가대표로서 나쁘지 않게 활동했었다. 그리고 안정환의 역사를 뒤바꾸어줄 2002년 월드컵이 찾아오는데, 당시 히딩크는 안정환의 실력은 인정했으나 그의 얼굴이 스타성을 만들어, 선수가 연예인병에 걸릴까 안정환을 가지고 밀고당기기를 했고, 그러한 히딩크의 뜻을 알아차린 안정환은 언론을 멀리하며 실력을 보이는데 집중했고, 그 결과 히딩크는 기존의 공미였던 안정환을 원톱 스트라이커로 끌어올리며 기용한다. 기성용 이거보고 좀 배워라 이새끼야


 2002년 폴란드를 2:0으로 이긴 대한민국은 미국전에서 승리한다면 16강 진출을 거의 확정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게 선제골을 내주고 이을용이 패널티킥을 실축하며 한국은 패색이 짙었고, 이대로 패배하나 싶었으나, 안정환의 78분 기가막힌 동점골로 무승부를 유지하며 16강 진출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 이후 포르투칼전에서 박지성의 결승골로 대한민국은 2승 1무로 사상 첫 16강에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16강에서, 이탈리아를 만난 한국은 전반 3분, 패널티킥을 얻어 안정환이 찼으나 실축을 하고 말았다. 그 이후 안정환은 자신의 실책을 막기 위해 경기 내내 엄청나게 뛰어다녔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선제골로 이대로 패배하나 싶었으나, 88분 설기현의 기가막힌 동점골로 연장전에 들어갔고, 안정환은 이 연장전에서 117분, 골든골을 넣어 대한민국의 8강 진출을 이끌어냈다. 이 골로, 안정환이 패널티킥에 실축했지만, 그가 최고였다고 이끌었다. 안정환은 2013년, 정글의 법칙에 출연하여 이 패널티킥을 실축했을때, 정말 죽고싶었다고 밝혔다.


그 이후 8강의 스페인전에서도 승부차기를 성공하였고 4강전과 3,4위전에서도 최선을 다해뛰며 대한민국의 반짝 스타로 떠올랐지만, 이탈리아 구단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 이후 2004년 AFC 아시안컵에서도 이동국이라는 걸출한 스타의 득점세례속에서도 플레이를 원할하게 하고 본인 역시 아랍에미리트와 쿠웨이트를 상대로 1골씩 총 2골을 넣으며 스트라이커로서 좋은 활약을 했다.


그 이후 2006년 월드컵이 찾아왔고, 아시아 예선전에서 대한민국은 계속된 골결정력 부재로 시달리지만, 김두현등의 활약으로 본선에 진출하였고, 토고전에서 안정환은 토고의 선제골, 이천수의 동점골로 1:1 상황이던 게임에서 역전골을 넣어 토고를 이기며, 사상 첫 원전승을 이루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그 이후 안정환은 전체적인 성적 부진으로 국가대표에 거의 선발되지 못했고, 2010년 월드컵에서도 벤치를 지키면서 사실상 국가대표 커리어에 종점을 찍게 되었다. 


안정환은 무려 8개의  팀을 옮겨다녔고, 특히나 페루자에서의 마찰, 돼지녀 사건등 가장 비운의 사건을 많이 겪었던 선수로서 한국 국가대표의 계보를 잇는 선수라고 하기엔, 비운의 삶을 걸어왔지만 아직도 한국의 기억속에 안정환은 아름다운 축구를 하는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남아있다.


4. 이동국(1998~현재)


" 선수의 플레이가 화려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득점력은 크레스포를 떠올리게한다. "


A매치 99경기, 30골. 이동국은 현재 국가대표를 잇는 스트라이커중 가장 최근까지 국대에 승선했던 백전노장인 이동국은 한국의 전형적인 스코어러라고 볼 수 있다. 특유의 뛰어난 위치선정은 아직도 수준급이며, 특유의 발리슛과 터닝슛 역시 이동국의 주장기로 뽑히고 있다. 몸싸움을 크게 좋아하진 않지만, 타겟형 스트라이커로서 포스트 플레이에도 능하며 연계력이 좋은 스트라이커로 평가받고 있다.


최순호의 가르침을 받아, 필요할때만 움직이는 선수로, 여론에서는 뛰지않는 이동국이라며 비난받기도 하였다. 2009년 최강희의 선택을 받아 전북 현대 모터스에서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으며, 세컨드 스트라이커, 타겟형 스트라이커, 골 스코어러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매력적인 옵션이였다. 그렇기에 1998년부터 이동국은 아시안 대표팀, 청소년 대표팀, 올림픽 대표팀, 성인 대표팀등 거의 모든 대표팀에 참가하여 뛰기도 하였다.


이동국은 1998년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하여 고종수, 안정환과 함께 K리그 르네상스를 열며 활약한다. 포항 스틸러스에서의 좋은 활약과 대표팀에서의 활약으로 이동국은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자리매김했고, 결국 K리그 신인상까지 수상한다. 2000년도 축구협회의 주도하에 유망주들을 해외로 이적시키는 유망주 성장 작업에서 베르더 브레멘에 6개월 임대로 이적하게 되었다. 이동국은 당시 무릎부상을 재활중이였고 브레멘에서 무릎부상 재활과 적응을 하게 되었다. 브레멘에서 이동국의 부상으로 인해 선수보호차원으로 출장기회를 많이 주지 않았고, 이동국은 리그에서 7경기 0골을 기록하며 2002 월드컵 선발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포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당시 이 경력을 가지고 이동국을 비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축구에 대해 매우 무지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브레멘의 공격진은 아이우톤과 피사로로 이동국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을 뿐더러, 이동국은 경기를 뛰기위해 브레멘에 임대간것이 아니였다. 축협의 주도하에 선진축구를 배우고, 경험하는 자리였기에 이것을 가지고, 이동국을 비난하는건 매우 멍청한 행위나 다름이 없다.


그 이후 포항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이미 국가대표에서 혹사당한 이동국의 몸상태는 국가대표에 어울리지 않았으며, 더불어 활동량이 적은 이동국을 거스 히딩크는 선발시키지 않았고, 이동국은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병역 혜택을 받지 못한 이동국은 2003년 다행히 상주로 복무하여 축구선수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46경기 12골이라는 준수한 기록을 낳았으며 플레이 스타일도 적극적으로 바꾸는 등 많은 노력을 하며 2006년 월드컵에 승선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그 이후 2006년 월드컵 예선에서의 활약으로 이동국은 2007년 1월 미들즈브러로 이적료 0원에 이적하게 되며, (당시 포항은 한국축구를 위해 이동국의 이적료를 받지 않았다.) K리그에서 프리미어리그로 바로 입성한 첫번째 한국인 선수가 된다. 초기에는 인상적인 모습을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2008년까지 리그 23경기에서 0개의 골을 기록하였고, FA컵과 리그컵에서 1골씩 총 2골을 기록하여 부진을 면치 못했고 더선에서 발표한 최악의 공격수로 뽑히기도 하였다. 결국 이동국과 미들즈브러는 2008년 결국 상호계약해지되었다.


그 이후 다시 K리그로 돌아온 이동국은 상위권의 성남 천마 일화로 이적했지만, 10경기 2골이란 부진한 기록을 낳았고, 신태용이 성남의 감독으로 돌아오며 전력에서 배제되는 등 이대로 이동국은 끝나는것만 같았다. 그러나 마침 전북에서 조재진의 일본진출로 스트라이커의 부재가 있었고 최강희는 과감히 이동국을 트레이드한다. ( 이동국, 심상식 <-> 문대성, 홍진섭 ) 당시 최강희의 무리수라며 부진한 스트라이커를 영입하려는것을 전북의 팬들은 원치 않았으나 최강희는 본인의 뜻대로 이동국을 영입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적한 2009년, 29경기 20골로 K리그 득점왕에 차지했다. K리그에서 4번째로 20골 이상 득점왕에 선정되었으며 이러한 놀라운 활약에 K리그 MVP를 받게 된다. 이러한 활약으로 2010년 월드컵에 승선한 이동국은 2010년 리그에서 전 시즌보다 부진한 28경기 12골로 한시즌만 반짝하고 이제 끝나는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다. 그러나 2011년 29경기 16골 15도움으로 1경기당 1이 넘는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였고, 도움왕을 수상하여 K리그 역대 최초로 신인상, 득점왕, 도움왕, MVP 의 4개 개인타이틀을 전부 석권하는데 성공하였고 K리그 베스트 11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MVP와 득점왕을 수상하였다.


그 이후 2012년, 34경기 22골로 다시한번 K리그 득점2위에 올랐고 K리그 베스트 11에 포함되었으며 K리그 사상 최다 골 신기록을 세우는데 성공하였으며 2014 월드컵 예선 엔트리에 선발되는등 제 2의 전성기를 펼쳤고, 2013년에서도 독보적인 득점력으로 득점1위에 랭크하고 있으며, 7경기 연속골의 대기록을 작성하였고, 아직도 이동국이 현역이며 경기감각이 죽지 않는것으로 볼때 이동국이 K리그에서 더 뛸 수 있다고 판단되고 있다. 이제 이동국이 골을 넣는것이 새로운 신기록 수립이 되고 있으며, 이러한 이동국의 기록은 앞으로 K리그에서 쉽게 깨지지 않을것으로 예측된다.


이동국은 국가대표에 1998년 자메이카와의 친선경기에서 황선홍의 교체카드로 출전하여 짧은 출전시간에도 불구하고 좋은 모습을 보이며 A매치에 데뷔하였다.. 그 이후 1998 월드컵에서 5-0으로 지고있던 네덜란드전에서 강력한 중거리슛으로 월드컵 스타로 떠올랐다. 그 이후 1998 아시안 게임에서 6경기 연속 주전으로 활용되었지만 안타깝게도 A매치 데뷔골을 넣진 못했었다. 그 이후 2000년 골든컵에서 코스타리카를 상대로 첫 A매치 골을 넣으며 코스타리카전의 무승부에 일조하였다.


그 이후 2000년 아시안컵에서 중국전과 쿠웨이트 전에서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지만, 인도네시아전에서 3골로 해트트릭을 터트리며 독보적인 골감각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조 3위였지만, 다승점인 한국이 8강에 올랐고 이란과의 8강전에서 이란에게 71분골로 패배가 확정되던 순간 김상식이 90분에 기적같은 동점골을 넣었고, 연장전에서 이동국이 골든볼을 넣어 이란을 상대로 역전하는 기염을 터트렸다. 그 이후 사우디 아라비아에게 76, 80분 연속 2골을 내리먹혀 패배가 확정되던 순간에서도, 90분에 한골을 넣어 한국의 체면치레를 하게 해주었다.


그 이후 2001년에도 친선경기에서 나이지리아전 1골로 A매치 기간에 거의 모든경기에 참가하면서 2002년 월드컵에 당연히 승선할것이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2002년 골드컵에서 3경기 전부 득점하지 못했고, 한일 월드컵이 다가온 시점에서 열린 친선경기 5경기에서도 바레인전에서만 1골을 기록하면서 갑작스런 부진이 찾아왔다. 당시 이 부진은 대부분의 국대경기에 차출되면서 혹사된 무릎때문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이동국은 대부분의 국가대표전을 치루면서 무릎과 다리에 붕대를 풀고 경기한것을 보기 힘들정도로 계속된 혹사가 시작되었다.


그 이후 결국 무릎의 부상으로 떨어진 경기력과 부진한 골 결정력, 낮은 활동력을 이유로 거스 히딩크는 계속 주전으로 실험하던 이동국을 과감히 엔트리에 제외했고, 이동국은 이 충격으로 술을 마시며 신음한다. 이동국은 이 이후 마음을 단단히 먹고, 활동량을 늘려나갔으며 리그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 결과 2004년 AFC 아시안컵에서 기용받았고 요르단과의 0:0 무승부 이후 아랍에미리트 전에서 선제골을 넣어 2-0 승리에 기여한다. 그 다음 쿠웨이트전에서도 내리 연속 2골을 기록하며 부진에 대한 오명을 씻었다. 그 이후 8강 이란전에서도 1골을 기록하지만 대한민국은 이란에게 3-4로 패하고만다.


이러한 2004년 AFC 아시안컵에서 대활약으로 2006년 월드컵 예선전에 기용된 이동국은 2차 예선 6경기중 3경기에서 중용받았고, 베트남전과 몰디브 전에서 골을 넣으며 활약했다. 예외로 몰디브전에선 좀 많은 기회를 날려 무승부를 하게 한 장본인으로 비난받기도 하였다. 그 이후 열린 3차 예선에서도 6경기중 5경기를 중용받으며, 쿠웨이트전에서 홈과 원정에서 전부 1골,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도 홈에서 1골을 넣어 총 3골을 기록해 원정에서 무려 5골을 넣음으로서 대한민국을 2006 월드컵 본선으로 올려놓는데 큰 활약을 하며 본프레레호의 황태자로 불렸다.


월드컵 예선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한 이동국은 2005 동아시아컵에서도 중용되었으나 3경기 전부 골을 넣지 못했고, 결국 한국은 조 최하위로 탈락하였고, 그 이후 2006년 독일월드컵이 오기전까지 9경기의 친선경기에서 단 2골만을 넣었으며 칼스버그컵과 아시안컵 예선전에서도 골을 기록하지 못하며 다시 골부진의 시대가 찾아왔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2006년 독일월드컵을 앞두고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당하며, 독일 월드컵에서도 뛰지 못했고 결국 독일 월드컵에서 뛰지 못해 2002년에 이어 2006년까지 월드컵 본선 출전이 좌절되었다. 그 이후 2007년 AFC 아시안컵에서 차출되었으나, 5경기 전부 득점하지 못했고 그 이후, 음주 파동으로 국가대표 1년간 출전 금지, 대한축구협회 주관 대회 2년간 출전 금지를 받으며 국가대표의 생을 마감하는듯 했다.


그러나 2009년 중징계 기간이 끝나고, 이동국이 2009년 전북으로 이적하여 K리그 득점왕을 수상할 수준에 오르자 여론은 이동국을 다시 재발탁해야한다고 했고, 허정무 대표팀 감독은 " 이동국은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야한다 " (에펨에서 본 대산데?) 라고 말했다. 그리고 허정무 감독은 이동국을 친선경기에 다시 중용하지 시작했고, 처음 7경기에선 단 한골도 기록하지 못하며 골 결정력 부재에 시달려야만 했으나, 2010년 동아시아컵에서 3경기 전부 출전하여 홍콩과 일본을 상대로 1골씩을 기록해 2골을 넣어 동아시안컵 득점왕에 뽑혔고, 이은 런던에서의 코트디부아르전에서도 1골을 넣으며 몰아치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그 이후 2010 월드컵을 앞둔 에콰도르전에서 이동국이 부상을 당하며, 출전이 불투명했으나 허정무는 이동국을 엔트리에 포함시키기로 하였고, 이동국은 2010년 월드컵에 무임승차를 하게 되었다. 그 이후 아르헨티나전에서 13분을 뛰면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고, 우루과이전에서도 후반전 15분에 교체출전하였다. 그러나 우루과이전에서 박지성이 준 완벽한 1:1찬스에서 물회오리슛을 하며, 전국민에게 카페베네슛을 선보였고 그 이후 이동국의 국가대표 여론은 완벽하게 돌아섰다.


그 이후 조광래 감독이 들어섰고, 이동국은 조광래에게 미움을 받았다. 인터뷰에서 위협적이지 않은 공격수라며 이동국을 비난하던 조광래는 이동국을 절대 차출하지 않았고, 이동국의 국가대표 커리어가 드디어 여기서 마감하는듯 했다. 그러나 2011년 K리그 도움왕을 수상하고 아챔에서도 MVP와 득점왕을 차지하자 여론은 다시 한번 이동국을 발탁해야한다고 했고, 아니꼬왔던 조광래는 이동국을 발탁하긴 하였지만 본래 전략이 아닌 3톱 전략으로 시작해 그중 한명으로 출전시켜 후반전에 바로 교체시켰고, 그 이후에도 출전기회는 10분 미만으로 조광래에게 사실상 버림받은 존재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조광래가 레바논전 단 한경기 졸전으로 쫒겨나고 최강희가 국가대표 감독으로 올라서면서, 이동국은 다시 한번 최강희에게 부름을 받았다. 당시 최강희는 2009년 사실상 스트라이커의 커리어를 끝낼것으로 보였던 이동국을 득점왕으로 만들며 제 2의 전성기를 구가시킨 장본인이였기에 이동국의 국가대표 여론에서도 이동국의 활약을 기대했다. 실제로 우즈베키스탄과의 친선전에서 2골을 기록함으로서 최강희의 믿음에 보답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이후 있었던 2014 월드컵 예선에서 쿠웨이트전에서도 1골을 넣음으로서 이동국의 부활을 예고했지만, 스페인과의 친선경기, 월드컵 예선에서의 카타르와 레바논전, 잠비아의 친선경기, 이렇게 총 4경기에서 연속 무득점을 하며 다시 한번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다행히 우즈베키스탄과의 예선전에서 1골을 기록하고, 호주와의 평가전에서도 1골을 기록하며 비난여론을 잠재우는듯 싶었지만, 그 이후 크로아티전과 예선전 4경기 연속 총 5경기에서 다시 무득점을 하면서 이동국에 대한 국가대표 비난여론은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그 이후 최강희 감독이 사임하고, 홍명보호가 시작되었으나 홍명보호에선 이동국을 엔트리에 포함시키지 않아 이동국의 국대 커리어는 사실상 끝나는것으로 예상되고, A매치 100경기정도만 채워질 수 있을것으로 모든이들이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히딩크가 안정환을 두고 밀고당기기를 했듯, 홍명보호 역시 이동국을 밀고당기기하는것이라고도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는것으로 보아 정확한것은 FIFA 월드컵 본선 이전의 친선경기에서 갈려질것으로 보인다.



이동국은 역대 국가대표 스트라이커중 가장 몰아치기를 잘했던 선수로 기억되있으며, 상당히 많은 경기를 무득점으로 보냈기에 그만큼 많은 비난을 받았다. 다른말로 하면 일관성이 부족한 선수이기도 했고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이동국의 대한 자질을 비난하고 있지만, 국가대표에서 많은 경기에서 혹사당한만큼 그의 노력은 인정받아야한다.




5. 박주영(2005~현재)


" 박주영이 대한민국의 슈퍼스타인 이유는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


여러분이 가장 잘 알고있는 국가대표 스트라이커가 누군가? 라고 물으면 아마도 다수의 지지를 받는건 바로 이 박주영이 아닐까 싶다. 축구천재로 잘 알려진 박주영은 바로 언론이 만들어준 최고의 스타선수중 한명이다. 그러나 한템포 빠른 공격감각, 과단성 있는 슈팅, 감각적인 위치선정으로 실제로 엄청난 활약을 펼쳤던 박주영이기에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것이 아닐까 싶다. A매치 60경기 출전의 23골이란 준수한 기록을 보이고 있는것도 완벽한 사실이고말이다.


감각적인 위치선정으로 수비벽라인을 허물고 공격진으로 들어가는 감각은 아직도 한국 최고수준으로 알려져있으며, 쉐도우 스트라이커로서의 역할도 청대에서 수행해 좋은 결과를 창출해낸적이 있다. 본래 빠른 드리블과 좋은 패스능력도 지니고 있었던 박주영이였으나, 모나코에 이적이후 드리블능력과 패스능력이 많이 떨어지고 타게터와 스코어러의 모습이 많이 오른 모습이지만 일본전 각시탈 골은 그의 감각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박주영의 클럽역사는 통수배신으로 상당히 유명하다. 청대시절의 활약으로 2001년 포항 스틸러스에서 5천만원을 지원해 브라질 유학을 가면서 포항 스틸러스와 계약 우선권을 약속했으나, 2004년 서울과 계약하면서 포항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고, K리그 드리프트제를 부활시킨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2005년 FC서울로 데뷔한 박주영은 첫 시즌 리그 12골을 몰아치며, K리그 득점순위 2위에 K리그 최초 만장일치로 신인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부진이 거듭되어, 2006년은 26경기 7득점에 머물렀고, 2007년엔 고작 11경기 2득점에 그쳤다. 2008년에도 별 다를 필요 없이 13경기 2골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국가대표에서 훌륭한 모습을 보인 박주영을 주목한 프랑스 리그1의 모나코는 32억에 박주영을 영입한다. 게다가 무려 첫 출장에 1골 1도움이라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모나코에서 첫시즌 31경기출장 5골 6도움이라는 괜찮은 기록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 이후 2009-2010년에도, 27경기에 출장해 7득점을 했고 2010-2011시즌에는 무려 33경기 출장 12골을 기록하며 해외5대리그에서 두자릿수 득점을 하는 기염을 토해내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박주영의 팀인 모나코는 강등에 쳐했고 박주영은 이적을 모색했다. 가장 유력한 구단은 같은 리그의 릴로서 프랑스 리그1 챔피언이였다. 메디컬 테스트까지 끝낸 박주영은 사실상 계약이 확정되는듯 싶었으나, 벵거의 전화를 받은 박주영은 계약을 앞두고 영국으로 떠나 아스날에서 메디컬 테스트를 받고 통수입단하였다. 이에 대해 릴은 하이재킹 논란을 알리며 박주영을 매우 비난하였다.


박주영은 아스널로 이적해 9번을 부여받으며 활약을 기대했다. 당시 3옵션 공격수였던 박주영은 유리몸이였던 반페르시를 위해 영입되었고, 실제로 많은 경기에 출전할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반페르시의 미친듯한 활약으로 박주영의 입지가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결국 아스날에 1년동안 리그에서 단 7분만을 뛰어보았고, FA컵 3경기에서 1골, 챔피언스리그 2경기에서 0골로 6경기 1골을 기록하며 최악의 시즌을 보내며 리저브 팀으로 이동되었다.


결국 2012-2013시즌 부활을 위해 스페인의 셀타 비고로 임대하였고, 데뷔전에서 골을 기록했으나 그 이후 급격한 골결정력 부재에 시달렸다. 게다가 셀타 비고의 감독이 경질되고, 새 감독이 들어오자 박주영을 공격수 최하위옵션으로 판단하였고, 실제로도 22경기 출전 3골이란 나쁜 기록을 하게 되었다. 특히 후반 4경기에서 많은 기회를 얻은 박주영이 득점하지 못해, 박주영은 셀타비고에서 사실상 전력외로 분류되었고, 시즌 최종전에서도 박주영은 무단불참하기도 했다.


그 이후 아스널로 돌아왔으나, 계약 해지를 통보받아 사실상 무직 선수가 되었다. 한국의 국가대표로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그외에도 병역 비리로도 한국인에게 많은 욕을 먹어왔고, 역대 한국 스트라이커로서의 자격문제가 많이 운운되어왔다. 한국이 만들어낸 인조스타의 한계점을 드러낸 박주영이지만, 그래도 그가 국가대표를 위해 뛰어온것은 비난해선 안된다.


박주영의 국가대표 커리어는 청소년때부터 시작된다. 카타르대회에서 양민학살을 하면서 모습을 드러낸 박주영은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에서도 득점왕을 하며 화려한 스타의 시작을 알렸다. 특히나 중국인 수비수들을 제치고 넣은 슛은 아직도 회자될정도로 박주영의 능력을 알려주는 골이였다. 2005년 서울에 입단하면서 성인 대표팀에서도 모습을 드러낸 박주영은, 2006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우즈베키스탄에게 0-1로 지고 있었던 경기에서 동점골을 넣으며 동점을 만들었고, 같은 예선전에서 쿠웨이트전에서도 선제골을 넣으며 4-0 승리에 일조하는등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 외에도 그리스, 핀란드등의 팀과의 친선경기에서도 1골씩 기록하며 1-1, 1-0을 만들어내며 한국에서 득점을 만들어낼 수 있는 선수로 떠올랐다. 그 이후에서도 국대에 자주 승선하였고, 특히 2008년 동아시아컵에서 중국에 선제골을 넣으면서 2년만에 다시 득점포를 열었다. 그러나 중국의 투혼으로 2-1로 다시 한국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으나, 곧바로 박주영이 동점골을 기록하면서 2골을 기록해 최종적으로 한국이 3-2로 승리하게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결과로 동아시아컵에서 한국이 2번째로 우승하는데 일조하였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2008년에 2010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 다시 승선하였고, 시드배정에서 요르단을 상대로 홈과 원정에서 1골씩 2골을 기록하며 월드컵에서 서브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을 알렸고, 교체경기에서 출전한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 1골을 넣으면서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아랍에미리트에선 드디어 선발로 출전하여 5분만에 골을 기록해 승리에 기여하였다. 이 이후 본격적인 주전으로 활동한 박주영은 B조 경기에 전부 선발출전하여 나이지리아전에서 1골을 넣어 무승부에 일조하여 조2위로 16강에 진출하지만, 이동국의 우루과이 물회오리전슛과 박주영의 무득점으로 안타깝게도 16강에서 만족해야만 했다.


그 이후에도 2010 아시안게임에서도 예선 3경기에 출전하여 팔레스테인을 상대로 1골을 기록했고, 16강전 중국과의 경기에서도 1골을 기록하며 승리를 이끌었다. 또한 8강전에서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도 1:1 연장전상황에서 1골을 넣어 승리를 확정지었으며 활약했으나 4강에서 아랍에미리트에게 연장전 후반 추가시간에 득점을 허용함으로서 안타깝게 패배하고 말았다.


2011년에는 2014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을 위해 참여했으며, 첫경기인 레바논전에서 3골을 넣어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시작을 승리로 이끌고, 쿠웨이트전에서도 선제골로 무승부에 일조했다. 이은 아랍에미리트전과의 홈경기에서도 선제골, 원정경기에서도 쐐기골을 박으며 A매치 4연속 골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박주영의 병역 비리가 이때쯤 대두되었고, 최강희는 박주영에게 이를 해명하는것이 좋겠다고 이야기했으나 박주영은 묵묵부답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더불어 소속팀에서 출전기회까지 잡지못한 박주영은 결국 최강희의 플랜에서 서서히 제외되기 시작하며 국가대표 커리어로서 끝나는듯 싶었다. 그러나 2012 런던올림픽이 열렸고, 홍명보는 자신의 팀의 원톱으로 박주영을 원했고, 병역비리를 감싸며 와일드카드로 박주영을 차출하였다.


그 결과 조별리그에서 스위선때 기가막힌 선제골을 기록하며 대한민국의 승리를 이끌었고 나머지 2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해 조 2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8강에서는 무려 영국을 만나며 석패를 당할것이라 예상했으나 오히려 한국은 지동원의 선제골로 리드했고, 결국 영국을 승부차기 끝에 이기며 기적적으로 4강에 올라가게 되었다. 4강에선 강팀 브라질을 만나며 전반전에서 비등비등한 모습을 연출하였으나, 내리 연속 3골을 먹히며 브라질에게 패배하였고 3,4위 전에서 일본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박주영은 일본 수비수 4명을 제치고 선제골을 만들어냄으로서 승리를 일조해 일본을 누르고 3위에 오르는데 성공하였다.


그 이후 국가대표에 승선하진 못하였지만, 홍명보가 박주영을 신뢰하고 있기에 박주영의 국가대표 승선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박주영이 여러가지 많은 분쟁을 만들었고, 국가대표로서 올바른 멘탈을 소유하고 있지 많다는 여론도 높으므로 아직까지 박주영의 승선이 무조건 좋다고 생각할 순 없다. 그러나 박주영이 국가대표에 떠나고나서 한국의 스트라이커 계보가 끊긴 지금, 박주영의 부활은 필요하게 될 수 도 있다.




마치며..


참 아이러니한점이 있다. 이러한 국가대표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잇는 선수들이 활약할때도 매번 우리나라에게 요구되었던건 골 결정력이였다. 하지만 그때도 분명 여기 소개된 스트라이커, 그리고 소개받지 못했던 최용수나 조재진등 많은 국가대표 스트라이커들은 골을 만들어왔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은 월드컵 8회 본선 진출이라는 대 업적을 이루었으며, 각종 아시아 국제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었던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박주영 이후로 스트라이커 계보가 끊어져버린 지금, 대한민국은 절실할정도로 골이 필요해졌다. 최강희호 최근 3경기 예선전과 홍명보호 2경기에서 스트라이커의 득점이 하나도 없다는건 큰일날 일이다. 한때 이동국이 10경기 연속 무득점을 하며 이러한 상황을 맞이했지만, 조재진 등의 스트라이커가 그것을 매꾸어왔다. 


하지만 이젠 그런것을 매꿀만할 스트라이커가 없다. 이제야 유럽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손흥민은 아직까지 국가대표 경험이 부족하고, 아시안팀을 상대로 할때 아시안팀의 촘촘한 수비로 본인의 장기인 돌파가 어렵다. 지동원 역시 선더랜드에서 많은 경기를 뛰지 못했고, 이제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간신히 경기감각을 찾는 시점이다. 유병수는 어느덧 국가대표 승선에서 더이상 가망성이 없어보이고, 김신욱은 A매치 20경기에 가까운 출전을 했으나 단 한골만을 넣어봤을뿐이다. 


앞으로 누가 이 국가대표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이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필요하다. 그러한 스트라이커가 말이다. 역대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이었던 선수들은 매번 비난받아왔다. 그러한 비난을 감당할 수 있으며 한국의 부족한 골 결정력을 상향시켜줄 스트라이커, 이제 우리는 그 스트라이커를 찾아야만한다.







대한민국 스트라이커 계보, 최순호부터 박주영까지.

2013.07.05


(1) 최순호, 황선홍, 그들이 달려온 길.


최강희 감독이 월드컵 본선에 팀을 올려놓고 사임한지 벌써 한달이 지났고, 홍명보호가 지난 동아시아컵에서 호주전을 기점으로 출항한뒤로 홍명보호가 2번째 경기를 치루었다. 최강희 감독의 마지막 월드컵 예선 3경기부터 홍명보호 2경기까지 찾아오는 5경기동안의 득점력 부재는 한국 스트라이커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한다. 


예전부터 한국의 득점력 부재는 항상 있어왔던 일이고, 그 점을 이란주먹감자년이 비꼬는 용도로 사용할 정도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스트라이커의 계보가 끝이 나버렸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매년 한두명의 스트라이커가 독보적인 시즌을 펼치며 득점력부재의 한국을 구출해왔다. 그러나 스트라이커 계보가 박주영 이후로 끊겨버린 이후, 어떠한 스트라이커도 그 계보에 들 실력은 보이지 않고있다.


그렇다면 여태까지 대한민국의 득점력부재를 구출하고, 국가대표에서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이어왔던 선수들은 누굴까. 대체로 많은 논쟁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 이회택 - 차범근 - 최순호 - 황선홍 - 안정환(or 최용수) - 이동국(or 조재진) - 박주영 " 라인으로 보고 있다. 가장 논쟁이 되는 선수는 이동국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에 대해선 그 선수의 파트 부분에서 이야기하도록 해보자.


우선 내가 생각하는 국가대표 스트라이커의 계보는 이회택 - 차범근 - 최순호 - 황선홍 - 안정환 - 이동국 - 박주영 라인이다. 그리고 나는 이 선수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싶다. 여태까지 대한민국을 위해 투철하게 뛰어왔으며 그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비난에 시달려야했던 국가대표 스트라이커들의 이야기들을 적어보겠다. 그러나 이회택같은 경우 자료도 많이 없고, 본인이 잘 모르는 세대이므로 제외하도록 하고, 차범근이야 역대 스페셜 등등으로 많은 이들이 알고 있으니 최순호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1. 최순호(1980~1990)




" 키가 큰 장신 공격수는 대체로 둔하고 창조성이 없다. 그러나 최순호는 그러한 개념을 깨트렸다. "


A매치 95경기 출전, 30골. 한국 스트라이커로서 차범근과 같이 한 획을 그은 전설의 공격수다. 현재 U-20 월드컵에서 김현이라는 유망주가 한국의 즐라탄과 유사하다며 그 가능성을 보고 있는데, 진정한 한국의 즐라탄은 바로 최순호가 아니였을까 싶다. 185cm 라는 엄청난 장신임에도 불구하고 속도가 뛰어났으며, 기술과 축구지능, 테크닉까지 어느하나 부족하지 않았던 최순호는 한국 축구계에서 가장 빛나지 못한 케이스가 아닐까싶다.차범근개객기


역대 한국 최고의 축구선수인 차범근 아래 가려진 최순호의 능력이 다시 재조명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당시 최순호는 세컨 스트라이커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본인이 결정지을 수 있는 뛰어난 선수였고, 신체조건이 좋아 몸싸움도 외국선수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유벤투스와 인터밀란등의 명문구단들이 몇년간 끈질기게 최순호를 영입하려 했지만, 실패한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더불어 최순호는 A매치 승률이 차범근에 이어 2위인데, 사실 차범근이 아시아권을 주로 학살했단것만을 생각한다면, 이는 놀라운 기록이다. 특히나 차범근이 있을때 한번도 꺽지못한 호주를 상대로 무패를 유지했으며, 친선경기에서 비아시아권 팀을 상대로도 꽤나 승리를 거둔것으로 ㅇ


최순호는 포항제철 축구단(현 포항 스틸러스)과 럭키금성 황소(현 FC서울그리고 배신의 서울, 이 당시에는 충청이 연고지)에서만 뛰면서, 1980-1986년까지 전성기로서 활약한 선수인데, 사실 그는 소속팀에서의 활약보다 국가대표로서의 활약이 더 뛰어나다. 최순호는 포항제철 축구단에서 4년간 55경기, 24골을 터트리며 전성기를 맞았지만, 럭키금성 황소로 이적한 뒤에는 28경기에 뛰어 2골을 기록하였다. 물론 세컨드 스트라이커로서 공격의 창조적인 모습을 불어넣었기에 좋은 모습을 보인것은 사실이다. 그이후 다시 포항제철 축구단으로 재입단하여 공격형 미드필더로, 16경기 0골을 기록하며 사실상 선수생활을 종결지었으며, 그 이후 지도자 생활을 위해 프랑스로 넘어가 프랑스 2부리그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골은 전부 리그골 기준)


최순호가 본격적으로 국가대표로서의 이름을 떨친때는 1980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서였다.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서 차범근의 차출불가로 대체 인원으로 뽑힌 최순호는 인도네시아와 타이를 상대로 각각 한골씩 기록하며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 이후 차범근을 이을 계보 스트라이커로서의 이름을 올리며 유망주의 등장을 알렸다.


그리고 1980년에 열린 AFC 아시안컵에서 본선전 4경기를 치르게 되는데, 당시 최순호는 차범근과 버금가는 활약을 펼치며 한국과 아시아를 놀라게 하였다. 당시의 경기기록은 다음과 같다.


1980년 9월 16일, 말레이시아 0 VS 1 대한민국 - 최순호 1골

1980년 9월 19일, 카타르 0 VS 2 대한민국- 최순호 1골, 이정일 1골

1980년 9월 21일, 쿠웨이트 0 VS 3 대한민국 - 최순호 2골, 손태준 1골

1980년 9월 24일, 아랍에미리트 1 VS 4 대한민국 - 최순호 3골(해트트릭), 정해원 1골


무려 본선 4경기에서 전부 골을 기록하고, 총 7골을 기록한 최순호는 말그대로 센세이션이였다. 최순호는 그 이후 결승 토너먼트 2경기(4강전, 결승전)에서도 골을 기록하진 못했지만, 좋은 움직임을 보여주었고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끌며 득점왕에 오른다. 이때가 고작 19살이였다.


그 이후에도 FIFA가 주관하는 U-20 월드컵에서 1981년, 빗장수비의 U-20 이탈리아를 상대로 2골을 넣으며 이탈리아를 놀라게 했고, 본 월드컵 예선에서도 타이를 상대로 2골을 넣었고, 좋은 위치선정으로 공격을 도우며 한국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이 월드컵 예선에서 쿠웨이트에게 패배했고, 결국 예선전에서 전승을 한 쿠웨이트가 올라가며 안타깝게도 월드컵에서 떨어지고 만다.


또한 1985년, 다시 1986년 월드컵이 찾아오기 전에 열린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서도 타이전 1골, 연이어 열린 바레인전에서 2골, 그 이후 이라크전에서도 2골을 넣으며 5골을 넣은 미친 활약을 보여주며 1986년 월드컵 예선전 엔트리에 당당히 이름에 올리는데 성공한다. 안타깝게도 1차 예선에서 직접 골을 넣진 못했지만 역시나 좋은 움직임을 보였고, 2차 예선에서 인도네시아에게 골을 넣는데 성공하였으며, 3차 예선에서 일본전때 일본진의 수비진을 흔드는 활약을 보이는 활약으로 대한민국이 FIFA 월드컵 본선에 참여하는 역사적인 순간에 함께할 수 있었다. ( 다시 말하지만 최순호는 세컨드 스트라이커의 이미지로서 좋은 패스로 창조적인 공격을 열어내는 선수였다. )


그리고 대망의 본선전이 열렸으나,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등의 강호와 만만치 않은 상대인 불가리아와 같은 조에 걸리면서 사실상 그 이상의 진출은 매우 힘들어보였다. 그나마 희망적인 부분은 차범근이 본선부터 합류한다는 부분이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벽은 높아보였다. 실제로도 불가리아전에서 1:1 무승부, 아르헨티나에게 3:1 패배, 이탈리아에게 3:2 패배를 함으로서 1무 2패로 탈락하지만, 당시 한국이 모든팀에게 골을 넣었으며, 좋은 모습을 보여준것은 한국의 이름을 빛내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최순호는 이탈리아전에서 골을 기록하는데 성공하며, 이탈리아에게 다시 한번 최순호의 이름을 세겨넣었다. 이 1986년 월드컵에서 최순호는 총 1골 3도움의 기록을 올렸으며, 그 이후 열린 1986년 아시안 게임에서도 인도전에서 1골, 인도네시아 전에서 2골을 기록하며 1986년을 빛내는 스트라이커로서 이름을 알렸다.


그 이후 1990년까지 꾸준히 국가대표에 선발되었으며, 103경기를 출전하고나서 최순호가 공식적으로 은퇴하였지만, FIFA 에서 95경기만을 인정해 센츄리클럽에서 어이없게 탈락된 일화도 있다.개불쌍


당시 최순호가 국가대표나 경기에서 뛰면서 " 너무 뛰지 않는다. 게으르기 짝이 없다. " 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명실상부 1980년대 한국 최고의 스트라이커로서 활약한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최순호 본인이 이 점에 대해서 " 비효율적이라 뛰지 않았다. 나쁘게 말하면 안뛰는 선수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 선택이 옳았다고 본다. 스트라이커는 골을 넣는데 집중해야 하기에 지금 우리 선수들에게도 불필요하게 많이 뛰지 말라고 한다. 내가 (이)동국이를 데리고 있을때 많이 움직이지말고 필요할때만 움직이라고 했다. " 라고 말하며 해명하기도 했다.




2. 황선홍(1990~2002)




" 그는 마치 베르캄프를 연상시키는 플레이를 한다. "


A매치 103경기, 50골. 한국산 폭격기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황선홍은 한국에서 가장 완성형 스트라이커로서 뽑힌다. 현재 포항 스틸러스에서 스틸타카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는 황선대원군황선홍은 현역 당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다. 빼어난 위치선정 능력으로 엄청난 득점력을 선보였으며, 뛰어난 헤딩능력과 슈팅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수비수를 여러명 끌고다님에도 불구하고, 순간속도와 특유의 지그재그 드리블로 수비수들을 벗겨낼 수 있는 스트라이커였다.


더불어 최순호가 활동량이 적었던것과는 대조적으로, 폭넓은 활동량과 뛰어난 시야능력으로 세컨트 스트라이커의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었으며, 국가대표 스트라이커로서 50골이라는 대 기록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14년이라는 기나긴 국가대표 경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은퇴하기전까지 발군의 능력을 보인것으로 유명하다. 특히나 2002년 4강 신화의 주역중 한명으로 알려져있다.


황선홍은 건국대를 졸업한 뒤, K리그 드리프트 제도를 거부하고 독일의 레버쿠젠(아마추어)차범근!로 이적하게 된다. 리그에 출장하진 못했지만 좋은 첫시즌을 보낸 황선홍은 2부리그 부퍼탈 SV로 임대되어 5경기 3골이라는 좋은 기록을 보여주며 순항하고 있었지만, 경기 도중 무릎을 다치는 부상으로 인해 시즌을 통째로 말아먹게 되고 결국 독일 생활을 접고 대한민국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 이후 K리그에서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하여 6시즌간 52경기 26골을 기록하였고,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하며 36경기 30골이라는 센세이션한 기록을 만든후, J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당시 K리그 드리프트에서 황선홍을 부르기 위해 포항 스틸러스는 무려 황선홍을 가져간 완산 푸마(전북 버팔로, 해체함)에게 4:1 트레이드를 감행하는데 그 멤버중엔 K리그 베스트를 5번이나 차지했던 노장 이흥실(사실 이흥실은 완산 푸마에서 선수겸 코치로 지도자경력을 쌓으려고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K리그 득점왕 2회를 했었던 이기근을 포함해 유승관, 이영록까지 넘겨주며 황선홍을 데리고온 일화가 있다. 현재까지 K리그에서도 4:1 트레이드는 황선홍이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그 당시 황선홍의 파급력이 어느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 이후 다시 수원으로 이적하였으나, 부상으로 정규 시즌에 뛰지 못하고 가시와 레이솔에 2년간 임대되어 34경기 12골이란 준수한 기록을 보여주었고, 이후 자유계약으로 풀려난 황선홍은 전남으로 이적하게 되지만, 다시 부상으로 인해 결국 은퇴하며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이러한 황선홍은 1988년 최순호가 국가대표의 기량으로 떨어지고 있을때쯔음 한국의 구세주로서 등장하게 된다. 건국대 출신으로 뛴 황선홍은 1998년 AFC 아시안컵에서 데뷔하였는데, 예선에서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골을 터트렸고, 본선 A조에서도 일본전에 출전해 선제골을 넣었으며, 이란전에서도 골을 기록하며 2골을 기록했고, 이러한 활약으로 1990년 월드컵 예선에 승선하게 된다.


1989년 월드컵 예선 1라운드에서 싱가포르전 2골, 말레이시아전 2골로 4골을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펼친 황선홍은 최종라운드에서도 북한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했고,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도 1골을 기록하며 총 6골로 한국의 본선 진출을 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러나 본선에서 스페인, 벨기에, 우루과이등 유럽 강호들을 상대로 대한민국은 3경기에서 황보관만이 단 한골만을 뽑아냈을 정도로 유럽의 커다란 벽을 느끼며 돌아와야했다. 그 이후 1990년 아시안게임에서도 파키스탄전에서 3골을 몰아치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좋은 활약을 보였다. ( 이때까지도 무려 프로가 아니였다. )


그리고 1994년 다시 월드컵이 찾아왔고, 황선홍은 1차 라운드 6경기에서 좋은 기회를 몇번이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골도 기록하지 못하며 골 결정력의 부재로 시달려야만 햇다. 그이후 최종 라운드에서도 4경기 연속으로 득점하지 못했고 10경기 연속 무득점을 이어가며 공격수가 받을 수 있는 비난이란 비난은 다 받았고 북한전을 상대로 1골을 넣으며 간신히 치면치레를 했다.


당시 본선 상대는 독일, 스페인, 볼리비아로서 독일, 스페인은 유럽의 강호였고 간신히 볼리비아정도와 50:50 의 전력으로 사실상 본선 진출은 매우 힘들어보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국이 스페인전에서 서정원의 90분 극장골로 2:2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하였고 볼리비아전에서 승리한다면 노력여하에 따라 본선 진출이 가능할 수 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황선홍이 볼리비아전에서 유일하게 있었던 결정적인 득점찬스에서 득점에 실패함으로서 황선홍은 국가대표 스트라이커로서 자격이 없다는 비난을 다시 한번 직면하였다.으이구불쌍


결국 볼리비아전에서도 무승부로 끝난 한국은, 독일전에서 전반 내리 3골을 먹히며 3:0 패배가 거의 확정되는듯 싶었다. 그러나 황선홍의 기적같은 52분 골에 이어, 홍명보의 62분 연속골로 분위기가 달아올랐고 3:2로 경기를 마치게 된다. 당시 독일언론은 " 결과는 독일의 승리, 그러나 경기력은 한국의 승리였다. " 라며 한국의 투혼을 인정했고 경기시간이 조금만 길었더라면 경기결과가 바뀌었을것이라고 했다. 황선홍도 이 경기에서 1골을 넣었기에 체면치레를 하며 비난여론을 잠재웠다.


그 이후 1994년 아시안게임에서 네팔전을 상대로 황선홍은 무려 8골을 뽑아내었고, 월드컵에서의 골부진여론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이 8골 기록은 한국 A매치 한경기 최다득점 기록으로 남았으며, 그 이후 오만전에서도 1골로 2-1승리를 견인하였고, 일본전에서도 2골로 3-2 승리를 견인해 아시안컵 득점왕에 수상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1996년 AFC 아시안컵에서도 아랍에미리트를 상대로 1골,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2골을 넣으면서 3경기 3골의 기록으로 8강에 진출한다. 그러나 8강에서 한국은 이란에게 6-2 패배로 8강에 만족해야만 했다.


황선홍이 이렇게 아시안게임과 아시안컵에서 다시 득점력을 회복하자, 한국은 당연히 황선홍을 1998 월드컵에 엔트리로 선발했고, 주전으로 기용될것으로 예상했었으나 안타깝게도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부상을 당함으로서중국ㅅㅂ 엔트리에 들고도 경기에 참여하지 못함으로서 안타까운 월드컵해를 보냈다. 당시 대한민국은 최용수란 걸출한 스트라이커와 이동국이란 유망주 스타를 낳았지만, 황선홍의 부재, 그리고 유럽과의 실력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본선에서 탈락한다.


황선홍은 1998 월드컵을 참가하지 못했지만, 그 이후에도 J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고 히딩크는 그러한 황선홍을 주목했다. 그리고 히딩크는 황선홍을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차출하였고, 프랑스에게 5-0으로 패배하지만 그 이후 멕시코전에서 2-1로 승리하였고 여기서 황선홍은 선제골을 넣는데 성공하였으며 그 다음 펼쳐진 오스트레일리아와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1-0 승리에 견인해 3경기 2골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만들어낸다.


그 이후 2002 월드컵 본선에서도 출전하였던 황선홍은 1라운드 D조의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으며 월드컵 본선 첫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본인에게 있어서도 국가대표 통산 50번째 골이라는 의미있는 기록을 만들어냈다. 그 이후 황선홍은 2002년 월드컵이 끝난 후 은퇴선언을 하며 국가대표 커리어에 종점을 찍었다. 


황선홍은 매우 이동국을 아낀것으로 알려져있는데, 황선홍이 2002년에 국가대표 스트라이커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해, 월드컵이 끝나고 은퇴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상당히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통한다. 


황선홍은 총 103경기를 출장하여 대한민국에서 3번째로 센츄리 클럽에 가입하였고, 그의 경기당 득점력은 현재 한국 국가대표중 가장 높은 경기당 득점률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외에도 국가대표 한경기 최다 골 기록 역시 황선홍이 가지고 있다.


황선홍은 역대 스트라이커를 잇는 계보중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골 득점력이 부진하다며 비난을 받은 아이러니한 선수다. 현재까지도 이 황선홍만큼 득점을 했던 선수는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황선홍의 50골 득점기록은 깨지기 힘들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더불어 황선홍은 현 국가대표 감독인 홍명보와 A매치에서 무려 72번이나 호흡을 맞춘것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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